정치권 비자금 파문의 직격탄을 맞은 곳은 SK그룹이지만 다른 기업도 편치만은 않을 전망이다.
하지만 한나라당이 공식 후원금도 아닌 100억원 규모의 비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 극에 달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한 초선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대선을 앞두고 전국의 지구당과 시·도 지부, 직능단체 등에 필요한 선거경비가 얼마인지 제출하라고 한 적이 있다. 이를 합산하니까 대략 800억원이 넘었다. 그런데 당시 남아 있는 돈은 30억원이었다. 이때부터 당 중진을 중심으로 대선자금 모금을 시작한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SK그룹으로부터 받은 100억원도 이런 당내 논의를 거쳐 받은 자금이고 모금 통로가 최돈웅 의원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몇 가지 의문이 떠오른다. 과연 SK그룹이 한나라당에 건넨 100억원이 전부일까. 민주당에는 불법 정치자금이 건네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SK그룹 외에 다른 대기업은 불법 정치자금을 제공하지 않았을까.
“상식 수준에서 생각하면 되지 않겠는가? SK그룹이 민주당에 25억원을 후원했다면 다른 재벌들도 그 수준에서 대선 후원금을 내지 않았겠나. 그 과정에서 법정한도를 넘어선 불법자금도 있었을 것이다. 분명한 것은 SK그룹이 한나라당에 100억원을 지원했다는 것은 비정상적이라는 것이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SK그룹은 한나라당에 풀 베팅을 한 것 같다.”
“민주당과 한나라당 1대 4 정도 후원금”
대선 당시 민주당 당직자를 지냈고 현재는 열린우리당 소속인 한 의원은 이렇게 말했다. 그는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되기 전까지 4년여 기간 동안 ‘이회창 대세론’이 한국 사회를 지배했다. 따라서 기업 하는 사람이라면 한나라당 쪽에 베팅할 수밖에 없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는 “당 재정팀 쪽에서는 대기업의 후원금 규모가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1대 4 정도로, 한나라당이 절대 우세했던 것으로 보고 있다”고 덧붙였다.
열린우리당 쪽 입장을 정리하면 SK그룹뿐 아니라 상당수 대기업이 지난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거액의 자금을 뿌렸으며 절대 액수에서는 한나라당이 월등히 많았다는 것이다. 한나라당 한 당에만 100억원을 건넨 것을 놓고는 ‘지나쳤다’는 여론이 우세하지만, 정가에서는 대선을 앞두고 대기업들이 여야를 가리지 않고 수십억 원대의 후원금을 건넸다는 게 정설로 통하고 있다. 공식 당 후원금 외에 적지 않은 돈이 정치권으로 건네졌으며 비공식적으로 오간 돈이 공식 후원금의 몇 배에 이를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 민주당 분당 때 정가에서는 지난 대선기간 동안 재벌기업이 민주당에 건넸다는 대선자금 규모에 관한 소문이 흘러나오기도 했다. 이에 따르면 SK그룹과 경쟁관계에 있는 A그룹이 70억원, B그룹이 50억원 등 거액을 지원했다는 것. 이 소문은 주로 민주당 주변에서 흘러나오고 있는데, 민주당 분당을 전후해 대선 당시 당 재정을 장악했던 신주류들을 공격하려는 의도가 있는 것 아니냐는 분석도 없지 않다.
소문에 등장하는 일부 기업의 경우 총 지원금 가운데 10억원을 임원 명의 후원금으로 민주당에 전달했다는 식으로 구체적 정황까지 덧붙여져 얘기가 나돌고 있어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한나라당 주변에서는 지난 대선 때 최돈웅 의원을 비롯한 이회창 전 총재의 측근으로 분류되는 의원들이 별도 모임을 갖고 100대 기업 명단을 친소(親疎) 관계에 따라 나눠 이들 기업에 지원을 요청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선자금 모금에 관여했던 핵심인사들은 이 전 총재와 각별한 사이였다는 공통점도 있다. 문제의 최돈웅 의원은 이 전 총재의 경기고 동창으로 2001년 10월, 이 전 총재가 당 안팎의 비난을 무릅쓰고 강릉 보궐선거에 공천했던 인물이다. 최의원은 2000년 6월부터 당 재정위원장을 맡아왔는데, 이 전 총재는 돈 문제에 관한 한 최의원을 전폭적으로 신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대선 당시 사무총장을 지낸 김영일 의원도 이 전 총재의 측근 중의 측근. 김의원은 이 전 총재가 정치에 입문할 당시의 측근 7인방 가운데 한 명이기도 하다.
자금력 풍부한 일부 기업도 제공 소문 파다
이들 외에도 Y, H, N의원 등이 대선자금 모금이라는 ‘중책’을 맡았던 중진의원들. 이들 의원의 활약(?) 때문이었는지 지금 한나라당 주변에는 SK그룹 외에도 상당수 기업들이 수십억원에서 100억원대의 정치자금을 전달했다는 소문이 꾸준히 나돌고 있다. 구체적으로 C그룹의 경우 그룹 총수와 특별한 관계인 한나라당 모 중진의원을 통해 SK그룹이 건넨 돈에 맞먹는 거액의 비자금을 이 전 총재 측근들한테 전달했다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다.
최근 급부상하고 있는 D그룹도 한나라당 내 핵심 당직자와 고등학교 동창인 임원을 통해 100억원에 가까운 돈을 제공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와 함께 대선을 앞두고 정치권에 건네진 돈은 여야가 선거비용으로 신고한 돈의 적게는 3배, 많게는 5배 이상일 것이라는 관측이 나오고 있다. 각 당이 적어도 1000억원 가까운 비용을 썼을 것이라는 얘기다.
재계의 한 인사는 “대선이나 총선 때가 되면 그룹 내에서 지원 금액과 지원 대상 등에 대해 논의한다. 군부정권 시절부터 들인 버릇이다. 액수의 크고 작은 차이가 있을 뿐, 이런 입장에서 예외로 분류될 수 있는 기업은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 “지난 대선 때야 누가 보더라도 이 전 총재가 (대권을) 먹는 게임 아니냐. 이 전 총재 주변에서 눈치를 주지 않더라도 기업인들이 원심력에 끌려 보따리를 들고 갔다. 이 전 총재가 돈을 안 받는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물론 직접 받지 않았다는 말은 맞다. 하지만 그의 측근들이 (기업에) 전화했고, 대선자금 모금에 앞장섰다. 돈 준 기업들이야 측근들 보고 준 게 아니라 이 전 총재를 보고 준 것이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한편 이들 대기업 외에도 정가에는 규모는 작지만 자금력이 풍부한 일부 기업들이 정치자금을 제공하는 데 한몫했다는 소문도 나돌고 있다. 오락 관련 사업을 하는 E사와 건설업체인 F, G사 등 몇몇 대형 기업들이 특혜와 관련해 정치권을 상대로 치열한 로비를 벌였고, 특히 지난 대선을 앞두고 유력 정치인에게 거액의 로비자금을 건넸다는 것. 민주당도 이들 기업의 주요 로비 대상이었지만 대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으로 흘러간 돈이 훨씬 많을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정가에서는 이들 기업이 관련된 제2, 제3의 대형 비자금사건이 곧 터질 것이라는 관측도 나오고 있다.
과연 SK에서 시작된 정치자금 파문의 끝은 어디일까. 분명한 것은 지금 이 순간도 떨고 있는 정치인 못지않게 좌불안석인 기업인이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정치권과 재계는 몹시 추운 가을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