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외환위기 이후 감원은 상시적으로 이뤄져 왔지만 요즘 부는 감원바람은 그 세기가 태풍급이다. 기업들이 불황을 이겨내기 위해 너나없이 ‘칼’을 빼들고 있는 것이다. 이런 때일수록 샐러리맨들의 어깨는 처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자신을 다스리고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들은 ‘칼바람’이 두렵지 않다. 변화관리 컨설턴트들도 ‘자신의 존재가치를 높이고 네트워크를 튼튼하게 구축할 것’을 권한다. ‘주간동아’는 이를 몸으로 실천하고 있는 샐러리맨 5인을 소개한다.
“그렇다고 해도 인맥이 꼭 필요할까?”
“맞아. ‘빽’이나 줄서기보다는 실력이 먼저야. 인맥은 비리나 조장하는 거지.”
직장인들은 직장생활하는 데 있어 인맥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인맥관리를 제대로 못하고 있는 것으로 조사됐다. 헤드헌팅 전문업체 HRKorea가 10월2일 경력 3년 이상인 직장인 1122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전체의 96%가 ‘직장생활을 효과적으로 하기 위해서 인맥이 필요하다’고 답했으나 ‘인맥관리를 잘하느냐’는 질문엔 ‘그렇지 않다’고 응답한 사람이 66%에 달했다.
‘샐러리맨 10억원 만들기’ 열풍을 일으킨 김대중 교보증권 상계지점장(39)은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방대한 인맥을 자랑한다. 그는 직장생활에서 성공하고 부자가 되기 위한 조건의 하나로 ‘철저한 인맥관리’를 꼽는다. 그 역시 일과의 상당부분을 인맥관리에 투자할 정도로 인맥 만들기에 열심이다.
김지점장은 회사 내에서 상품 확장 캠페인이 벌어질 때마다 빼놓지 않고 1등을 차지해왔다고 한다. 전화 한 통만 걸면 도와줄 지인들이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보험회사 직원에게도 증권사 보험상품을 팔았다”며 환하게 웃었다.
그는 “문제가 생겼을 때 회사에 친구나 선배가 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아쉬워하기보다는 먼저 적극적으로 인맥을 만드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친구가 지인을 만들고 그 지인이 또 다른 친구를 낳고 그렇게 얽힌 인맥이 직장생활을 풍요롭게 만드는 자산이 된다는 게 그의 조언이다.
그의 인맥관리 비법은 매우 간단하다. 1주일에 몇 차례 시간을 내 인맥 관리용 통화를 하는 것. 지인들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달려가 도와주는 것도 인맥관리의 기본이란다.
“매일 지인들을 만나고 챙길 순 없지 않습니까. 항상 가까이 있다는 것을 알려야 합니다. 친한 고등학교 동창이라도 1년 만에 전화해 ‘도움이 좀 필요한데’라고 말하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1주일에 한 번씩 ‘전화 데이’를 정하거나 하루에 1시간 정도 시간을 내 친척, 초·중·고교 친구, 선배, 대학동기, 서클친구, 회사, 거래처 지인 등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는 게 인맥관리의 시작입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증권업계에 투신한 김지점장은 또래들보다 승진이 빠른 편이다. 그는 “감원 등에 대한 걱정은 하지 않는다”면서 “그동안 쌓아놓은 인맥이 자신감의 원동력”이라고 말했다.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나의 꿈, 10억원 만들기’라는 책을 출판하는 데도 각 분야에 포진한 지인들의 도움이 컸다고 한다.
사실 인맥이라고 하면 “내가 아는 사람이 누구인데” “누구누구 소개로 부탁드리는 건데” 하는 청탁에 동원되는 인맥이 전부라고 생각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그런 오해부터 버려야 한다. 인맥은 회사 안팎에 당신의 든든한 우군을 만드는 것이다. 다양한 채널을 통해 정보를 수집하고 항상 시의적절한 정보 채널을 가동할 수 있는 능력 또한 인맥을 쌓음으로써 갖출 수 있다.
‘어느 줄에 설까’ 고민하는 것은 인맥관리가 아니다. 언제나 나를 지지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드는 게 인맥관리의 핵심이다. 최근 ‘인맥지도를 그려라’는 책을 펴낸 HRKorea 유용미 컨설턴트는 “인맥은 그저 학연이나 지연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유·무형의 든든함을 안겨주는 일종의 재산”이라며 “부정적으로 생각하거나 두려워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인맥지도를 그려나가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건 가짜야!”
날카롭게 반짝이던 눈빛이 테이블에 펼쳐진 달러 뭉치를 응시한다. 주인공의 눈에 살며시 미소가 번지며 위조지폐가 걸러진다. 위조지폐를 감별하는 모습을 묘사한 외환은행 TV광고의 주인공은 이 은행 금융기관영업실 서태석 부장(60)이다. 서부장은 고객들에겐 행장보다도 더 유명한 외환은행의 간판 인물. 최근 몇 달 동안 신문 잡지 방송 인터뷰만도 20차례 넘게 했다.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위조지폐 감별 전문가인 서부장은 미국 연방수사국(FBI)과 비밀수사국(USSS)으로부터 위조지폐 정보교환 요원으로 위촉되는 등 세계적으로도 인정받는 위조지폐 사냥꾼이다. 장관 표창에서부터 서울직장인상까지 수상경력도 화려하다. 그는 ‘서태석의 위조지폐 가려내는 법’이라는 저서도 펴낸 바 있다.
은행과 기업의 각종 강연회에 단골 강사로 등장하는 그는 외환은행 TV광고에 출연하기 이전에도 유명인사였다. 그의 활약상이 200차례 가까이 언론에 보도된 덕이다. 서부장의 최종학력은 중학교 중퇴. 그는 “가장 낮은 직급인 서무원으로 입사해 정년을 마치고도 일하고 있으니 은행원으로서 성공한 편”이라며 웃었다.
서부장은 2001년 정년을 맞았지만 회사의 ‘간판’을 내보낼 수는 없는 노릇. 그는 2001년 8월 말 퇴직과 동시에 2년 계약을 맺고 계속 일을 해왔고 올 9월 계약이 만료되자 은행으로부터 연봉 1억원과 부장 승진을 제의받고 계약을 2년 더 연장했다.
‘사오정’(45세 정년) ‘오륙도’(56세까지 일하면 월급도둑)라는 우스갯소리가 판치는 마당에 정년을 넘겨 일하고 승진까지 한 것이다. 외환은행의 한 관계자는 “사실 서부장의 후배만으로도 업무를 수행하는 데는 지장이 없다”면서 “서부장과 재계약한 것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회사의 간판이라는 상징성이 더 크게 작용했다”고 말했다.
월스트리트저널은 ‘감원시대에 살아남는 법’이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책상에 코박고 앉아 있는 사람만큼 해고하기 쉬운 사람도 없다고 지적했다. 회사의 간판이 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언론인터뷰에 적극적으로 응하는 것은 기본. 인맥을 이용해서라도 세미나나 TV 라디오 신문 잡지에 얼굴을 드러내고 말할 기회를 잡아야 한다. 용기를 내 책을 출판하는 것도 좋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거나 관련업계에서 인지도가 높은 직원이 ‘일을 잘하는 것’으로 인정받은 경우가 많다. 업계에서, 혹은 대중에게 잘 알려진 직원이 회사를 그만둘 경우 그 기업의 미래에 대한 회의적인 의문들이 제기되는 경우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꼭 언론이 아니어도 좋다. 자신이 회사의 중요인물이라는 것을 주변에 적극적으로 알려라. 중요인물이 아니더라도 중요인물이라는 평판이 돌도록 만들어라. 이미지컨설팅회사 마크 앨런&Co의 마크 페이츠키는 “회사를 대표하는 얼굴이 될수록 감원 기회는 적어진다”고 말했다.
“역발상이 저의 무기입니다.”
김재열씨(33)는 고졸 학력으로 미국계 회계 컨설팅업체 딜로이트 투쉬의 전략기획담당 이사 자리에까지 올랐다. 1993년 청와대 ID를 도용, 국가전산망을 해킹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컴퓨터 해커가 바로 이 사람이다. 현재 호주계 맥쿼리자산운용㈜ 비상근 감사이기도 한 김씨는 ‘그쪽’ 세계를 떠난 지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곧잘 “해커 아니냐”는 질문을 받을 정도로 그 이미지로 굳어져 있다.
그러나 그 사건 이후 그는 대우그룹 기획조정실, 기획예산처 사무관을 거쳐 한 기업의 이사로 화려하게 변신해 부동산 개발, 기업 M&A, 금융과 공공부문 컨설팅 업무를 맡고 있다. 고졸이지만 실력을 인정받아 기획예산처 근무 당시에는 국가 채권 채무에 관한 종합적 관리방안을 혁신한 공로로 기획예산처로부터 ‘신지식인상’을 받기도 했다. 지난 2월엔 민주당 조직진단 컨설팅을 맡아 당 중앙조직의 슬림화와 지구당 개편작업 등을 진행했다.
전남 보성 출신인 그는 어려서 자주 아파 죽을 고비를 여러 차례 넘기면서 남들과 함께 어울리지 못하자 혼자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중학교 때 이미 사마천의 ‘사기’와 ‘삼국지’를 읽는 등 고전에 빠져들었던 그는 책을 통해 뒤집어 생각하는 ‘역발상’을 배웠다. 남들과 다른 생각, 패러다임을 바꾸는 튀는 방식의 접근법이 몸에 뱄다.
“지금 하고 있는 기획업무에서도 가장 중요한 게 역발상입니다. 어쩌면 해커도 같은 개념 아닐까요. 보안 차단문이 있으면 들어가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보통사람들과 달리 해커는 ‘역발상’으로 뒷문이나 담장 사이 틈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그런 곳을 뚫습니다. 그러니 지금까지 해커에서 공무원, 기획실 직원 등 다양한 직업을 전전하면서도 결국은 같은 길을 걸어온 셈이지요.”
올 초 그는 어느 시중은행에 대한 컨설팅 작업을 진행했는데 은행측에서 목표를 세계 일류로 잡는 것을 보고 “모든 은행이 1등만 원하며 과도경쟁을 벌일 때는 지나치게 노력하는 것이 오히려 기업에 해가 된다”며 현재 추세를 유지하라고 조언해 은행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그의 ‘엉뚱한’ 컨설팅 제안서는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그는 지금도 자신의 진단이 옳다고 생각한다. 시쳇말로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게 그의 모토이기 때문.
이 젊은 중역은 호기심과 아이디어가 많아 주변에 지지자들이 많다. 600여명의 회사 임직원들 사이에서 평도 좋다. 딜로이트 투쉬 김경춘 상무는 “나이에 비해 압축된 경험을 해서 그런지 통찰력이 있어 언제나 주변사람들로 하여금 혀를 내두르게 한다”고 말했다. 눈치보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 탓에 적도 많지만 김씨는 문제 해결을 위해 종합적으로 사고하고 융통성을 잘 발휘하는 직장인의 전형 같다.
어린이가 출연해 “갖고 싶은 건 제가 직접 모아서 사요”라고 말하는 국민은행(KB) 광고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금융교육이 잘 된 아이가 부자가 된다’는 컨셉트로 만들어진 이 광고는 국민은행이 의욕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키드 뱅크 프로그램’을 홍보하는 광고다. 어려서부터 체계적인 금융교육을 실시해야 ‘금융문맹(financial illiteracy)’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강조하는 이 프로그램은 금융교육 부족으로 신용불량자가 양산되는 우리 사회에 신선한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이 프로그램의 창안자는 국민은행 금융교육 태스크포스팀(TFT) 박철 전문연구원(36). 고려대 무역학과를 졸업하고 1995년 국민은행에 입사한 그는 인사팀에서 근무하던 지난해 8월 김정태 은행장에게 직접 이메일로 금융교육 프로그램안을 제출했다. 보수적인 은행 조직에서 일반 사원이 최고위직에게 개인적인 메일을 보낸 것도 파격적이지만 이 안을 즉각적으로 받아들인 은행장의 태도도 놀라웠다. 박연구원은 곧바로 연구소로 자리를 옮겨 TFT를 꾸렸다.
“금융문맹이란 소득 이상으로 소비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것이 결국 신용불량과 청소년 과소비 풍조로 이어집니다. 선진국은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유아 및 청소년 대상의 금융교육 프로그램이 잘 돼 있어 어릴 때부터 용돈 관리 및 저축의 중요성과 금리 등에 대해 가르치고 소비에 대한 책임의식을 길러줍니다. 우리도 황무지와 다름없는 금융교육 여건을 개선해야 한 단계 더 도약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박연구원이 금융교육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입사 직후 ‘미국 은행들의 아동 마케팅’에 관한 리포트를 쓰면서 미국 등 선진국의 금융교육 시스템을 접한 뒤부터. 선진국의 금융산업이 발달하게 된 배경에는 바로 체계적인 금융교육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후 그는 8년 동안 혼자서 자료를 수집하고, 외국 전문가들과 접촉하는 등 치밀하게 준비해왔다.
TFT를 이끌면서 그는 각급 학교 순회강연을 열고, 금융교육 책자인 ‘돈은 고마운 친구’와 ‘스무 살 이제 돈과 친해질 나이’를 내놓아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그는 올해 안으로 어린이 전용 금융사이트를 개설하고, 어린이 대상 금융상품도 내놓을 예정이다.
“금융교육 관련 자료가 집에 한 트럭분은 있습니다. 한때는 개인시간을 비현실적인 일에 낭비하는 것 아니냐는 회의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제 아이디어가 채택되고 그것이 사회 전체에 큰 영향을 미치게 돼 너무 기쁩니다.”
그의 금융문맹 퇴치운동이 곧바로 국민은행의 수익을 증대시킨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교육을 통한 사회적 공헌, 은행 이미지 개선 등의 효과는 엄청난 ‘보이지 않는 수익’을 올렸다.
대안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에 대한 분석부터 이뤄져야 한다. 든든한 대안은 회사생활을 몇 배 더 즐겁게 한다. 회사를 그만둬도 갈 곳이 있으니 걱정할 게 없다.
K기업에서 노무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최희원 부장(45)은 30대 중반부터 가지 않은 ‘제2의 길’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금 하고 있는 일을 통해 정말 자신이 행복한지, 더 잘 할 수 있는 다른 일은 없는지 등의 의구심이 마음 한켠에 자리잡은 것.
IMF 관리체제 이후 그의 고민은 더욱 깊어졌다. 정리해고가 일상화되면서 자신도 다른 일을 준비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커지기 시작했다. 설령 60세까지 근무한다 해도 평균수명인 80세까지 20년 동안 해야 할 무엇인가를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퇴직금으로 받게 될 목돈은 나머지 인생 전체의 비용으로 너무 적다는 생각도 그를 초조하게 만들었다.
그는 식당이나 차릴까 생각하다가도 창업했다 망하는 주변사람들을 보면서 식당 개업도 자본과 노하우가 있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자신만이 잘할 수 있는 일이 필요했다. 회사에서 기획과 노무관리 파트를 담당하면서 그는 자연스럽게 공인노무사 업무를 익혔는데 어느 날 시험공고 광고를 보고 ‘한번 해보자’고 결심하게 됐다. 그 결론을 내리는 데도 꼬박 1년이 걸렸다.
그때가 2000년 가을. 이후 그는 공부에만 매달렸다. 회사일은 자연히 뒷전일 수밖에 없었지만 표나게 등한시할 수는 없어 스트레스는 가중됐다. 회식자리나 친구들과 만나는 자리에도 온갖 핑계를 대고 빠졌다.
“발등에 불이 떨어지자 그처럼 죽기 살기로 하지 않을 수 없더군요.”
꼬박 2년을 ‘죽은 듯이’ 생활한 그는 결국 지난해 10월 공인노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뒤늦게 공부에 매달린 남편을 위해 헌신적으로 뒷바라지한 부인은 그날 너무 기뻐 기절했지만 그것은 ‘행복한 비명’이었다. 이렇게 대안을 마련하자 언제 직장을 그만둬야 하나 하는 등의 불안감은 씻은 듯이 사라졌다.
“지금은 그야말로 언제 나가는 게 좋은지 기회만 노리고 있습니다. 어차피 새로운 삶을 시작하려면 다리에 힘이 있을 때 전환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서두르지 않습니다. 지금 생활도 아직은 할 만하니까요. 대안을 마련한 뒤 회사생활이 전에 없이 즐거워져 쉽게 나가게 될 것 같지는 않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