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개 크레인 중 6개가 무너진 신감만부두.
부산항에는 컨테이너를 다루는 부두가 5개 있다. 이 부두에서는 높이 60m, 무게 985t, 가격 30억원짜리 갠트리(gantry) 크레인(이하 크레인)이 레일 위를 오가며 컨테이너를 싣고 내린다. 그런데 5개 부두 중 자성대부두와 신감만부두에서만 크레인이 무너졌다. 자성대부두에서는 12개 중 2개가 무너졌고, 지난해 4월 개장한 신감만부두에서는 7개 중 무려 6개가 자빠졌다.
자성대부두는 홍콩의 허치슨 그룹이 운영하는데, 허치슨측은 600억원의 보험(20대 분)에 가입해두어 손실을 보전할 수 있다. 그러나 신감만부두를 운영하는 동부그룹 산하의 동부부산컨테이너터미널(이하 동부터미널)은 2대 분인 60억원의 보험에만 가입돼 있어 보험금이 전액 나온다 해도 손해를 보전할 방법이 없다.
지난해 4월 개장 … 7개 중 6개 넘어가
새로 크레인을 제작해 설치하는 데는 10개월이 소요된다. 화물노조 파업에 이어 크레인이 없어 작업하지 못하는 기간, 여기에 새로운 크레인 제작비를 더하면 동부터미널측의 부담은 이만저만한 게 아니다. 부산항 또한 심각한 체선(滯船), 체화(滯貨) 위기를 겪을 수밖에 없어 국가의 물류 경쟁력도 현저히 떨어질 전망이다. ‘국 쏟고 다리 데고 야단까지 맞는’ 최악의 상황이 벌어졌으니 사단이 나지 않을 수 없다.
동부터미널에서 운영한 신감만부두의 위치. 유독 신감만부두에서만 많은 크레인이 쓰러졌다.
업계에서는 “초속 50m의 바람에 견디는 크레인을 만들려면 두께 얼마짜리 강판을 써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 치수에 맞는 강판이 없으면, 제작자는 그 치수보다 약간 더 두꺼운 강판을 쓴다. 따라서 실제로는 10% 정도 강한, 즉 초속 55m를 견딜 수 있게 만드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도 동부터미널의 크레인이 무너졌으니 의문이 아닐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4번 크레인의 전면 핀컵은 파손된 흔적이 없어 핀을 내리지 않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6번 크레인의 핀을 꼽았던 우측 전면의 핀컵 파손 정도.대우건설측은 핀컵 파손 정도로 보았을 때 6cm 깊이로만 핀을 꽂은 것 같다고 주장했다.6번 크레인의 후면 핀은 거의 파손되지 않았다(위부터).
고박장치란 부두 바닥에 ‘타이 다운(tie down)’과 ‘타이 바(tie bar)’를 설치해놓고, 체인 등을 이용해 크레인을 붙들어매는 장치를 말한다. 신감만부두에서는 바람이 불어오는 바다 쪽(전면)으로 네 군데를 묶고 그 반대편(후면)으로 두 군데를 묶는다.
이부장은 “‘매미’로 인해 우리 크레인에서 철판이 떨어져 나왔다면 부실 제작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크레인에서는 그러한 일이 전혀 일어나지 않았다. 사고는 크레인을 고정시키는 고박장치가 뽑힘으로써 일어났고, 고박장치는 다른 회사에서 제작했다”고 주장했다.
고박장치를 제작한 회사는 대우건설이다. 신감만부두의 고박장치를 설치할 때 현장 소장을 맡았던 이 회사의 김학성 이사는 “자성대부두의 크레인은 대부분 바로 뒤로 넘어졌는데, 신감만부두의 크레인은 레일 위를 달려가 다른 크레인과 충돌한 후 무너졌다. 6번 크레인은 강풍 탓에 레일 위로 225m를 달려가 5번 크레인과 부딪치며 같이 쓰러졌고, 4번 크레인은 75m를 달려가 3번, 2번, 1번과 연쇄 추돌하며 도미노게임 하듯이 한꺼번에 무너졌다”며 이렇게 말했다.
“고박장치는 바다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견디기 위해 만든 것이지, 레일과 같은 방향으로 가는 좌우의 힘에 견디기 위해 만든 장치가 아니다. 크레인이 레일을 따라 흐르는 것을 막으려면 크레인이 부두 바닥과 닿는 부위의 네 꼭지점 가까이에 있는 지름 18cm의 핀(pin)을 부두 표면에 19.7cm 깊이로 뚫어놓은 ‘핀컵(pin cup)’에 집어넣어야 한다. 이 핀은 3단계로 조작되는데, 1단을 내릴 때마다 대략 6cm씩 내려오므로 다 집어넣으려면 3단으로 조작해야 한다.
그런데 레일 위로 무려 225m를 흐른 6번 크레인은 전면의 좌우 핀은 1단만 내리고, 뒤쪽에 있는 핀은 내리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핀컵이 손상된 정도로 판단한 것인데 전면에 있는 핀컵은 크레인이 흐를 때의 충격으로 6cm 정도 파손돼 있으나 후면에 있는 핀컵은 전혀 파손된 흔적이 없다. 75m를 달려간 4번 크레인도 일부만 핀을 살짝 꽂았다. 그러나 쓰러지지 않은 7번 크레인은 네 군데 핀을 모두 고정시킨 것으로 알고 있다.”
김이사는 또 “군대에서 운전병이 그러하듯, 태풍이 분다고 하면 크레인의 브레이크를 채우고 크레인의 바퀴에는 스토퍼(stopper)라고 하는 쐐기를 끼워 놓아야 한다. 이렇게 해놓았는데도 크레인이 레일 위로 흘렀다면, 돌지 않는 바퀴가 레일과 마찰해 레일을 깎고, 스토퍼는 바닥과의 마찰로 긴 스키드(skid) 마크를 남긴다. 그러나 신감만부두 크레인에서는 이러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김이사의 주장이 사실일 경우 동부터미널의 크레인 붕괴는 천재에 인재(人災)를 보탠 사건으로 귀결될 수 있다. 이렇게 되면 보험금 수령 등 여러 분야에서 문제가 복잡해진다.
홍콩은 한국보다 훨씬 더 태풍이 잦은 곳이고, 일본은 지진이 많은 곳이라 초속 75m를 견딜 수 있는 크레인을 요구한다. ‘매미’를 겪은 한국의 부두회사들은 앞으로 초속 70m의 바람에 견디는 크레인을 요구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크레인을 설치하는 것이 그리 간단치 않아 보인다.
4000TEU급 초대형 컨테이너 모선이 정박하는 컨테이너 부두는 ‘바다를 복개(覆蓋)해놓은 시설’이다. 초대형 컨테이너선이 정박하려면 15m 이상의 수심이 필요한데 이렇게 깊은 바다를 매립해 부두를 만드는 것은 비경제적이므로 바다 밑 땅 속으로 대형 파일을 촘촘히 박은 후 그 위에 50cm 정도 두께로 콘크리트를 씌워 부두를 만든다.
두께 50cm의 콘크리트는 매우 무거워 평상시에는 이것이 파일과 분리된다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러나 ‘매미’와 같은 초대형 태풍이 불어온다면 사정이 달라진다. ‘매미’는 만조로 인해 해수면이 2m 높아진 상태에서 11m 높이의 해일을 몰고 왔다. 이렇게 높아진 파도가 부두 바닥을 때리면 50cm 두께의 콘크리트 바닥도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해일의 충격으로 부두 전체가 흔들리면 고박장치와 핀이 풀리거나 뽑혀 나올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현지를 둘러본 한 전문가는 “육안으로 둘러본 결과 부두 바닥과 파일이 분리된 징후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아무튼 초속 70m의 바람에 견디는 크레인과 고박장치는 매우 무거우므로 현재의 부두가 늘어나는 하중을 견딜 수 있는지부터 조사해야 한다.
‘매미’로 인한 동부터미널의 피해에 대해 한 인사는 “기상청은 지상 3층 높이에서 바람을 측정하지만 크레인은 15층 높이에서 바람을 받기 때문에 기상청에서 발표한 공식기록보다 훨씬 더 강한 바람을 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과거에는 이렇게 센 바람이 분 적이 거의 없었는데 왜 국가적으로 어려운 이때에 이런 바람이 불었는지 모르겠다. 우리의 국운이 다한 느낌이 든다”라고 말했다.
1995년 간사이 지진으로 일본의 고베항이 무너진 후 부산항은 세계 5대항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최근 무섭게 추격해온 중국 상하이항이 부산항을 앞지른 데 이어 고베항 또한 태풍 ‘매미’에 강타당한 부산항을 따라잡을 기회를 잡았다. 한국은 소 잃고 외양간을 ‘튼튼히’ 고치게 생겼다. 자연재해에 대한 준비를 보다 철저히 해두었더라면 이러한 분루(忿淚)는 흘리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