앎과 실천이 하나였던 이오덕 선생의 생전 모습.
교육자이자 우리말과 우리글 살리는 데 한평생을 바친 이오덕 선생이 8월25일 충북 충주시 신니면 자택에서 타계하기 직전에 남긴 말이다. 앎과 글, 실천이 하나였던 선생은 그만큼 일생을 정직하고 청빈하게 살다 간 우리의 큰스승이다.
말년에 암으로 고생한 선생은 병마를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차분하게 생을 정리해 남은 이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다. 미리 준비해둔 유언장에는 “죽음을 밖에 알리지 말고 간소하게 장례를 치러달라”고 적혀 있었고, 임종 직전에는 가족들에게 “장례를 끝내놓고 ‘즐겁게 갔다’고 사람들에게 알리라”고 당부했다. 유족들은 선생의 뜻에 따라 화환도 일절 받지 않아 자택에 차려진 빈소는 소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선생은 교육을 통해 무엇보다 ‘일하는 아이들’의 중요성을 널리 알렸다. 학원에 다니네 과외를 받네 하며 온갖 지식만 머릿속에 집어넣으며 허약한 헛똑똑이가 돼가는 요즘 아이들의 ‘건강치 못함’을 지적하며 놀이 공작 등 신체활동을 통해 자기 삶을 사랑하고 가꾸어 나가는, 자기 삶의 주체가 되는 ‘일하는 아이들’로 키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선생은 무엇보다 삶에 토대를 둔 살아 있는 말, 본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살아 있는 말을 쓰는 ‘글쓰기’를 역설했다. 그래서 문어체 글이 아니라 말하듯이 쓰는 ‘말글’을 다듬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차분한 마지막길 주위사람들 숙연
1925년 경북 청송에서 농사꾼의 아들로 태어난 고인은 1944년 교직에 투신한 이후 42년 동안 초등학교 교사와 교감, 교장을 지냈다. 그러나 5공화국 말기 잘못된 교육행정을 지적하는 글을 쓰면서 ‘교육당국의 눈총을 견디다 못해’ 1986년 정년을 3년 앞두고 사표를 냈다.
선생은 1965년 글쓰기 교육이론서 ‘글짓기 교육의 이론과 실제’를 시작으로 최근까지 동화·동시집, 수필, 평론 등 여러 장르에 걸쳐 50여종의 책을 펴냈다. 특히 선생이 1989년에 출간한 ‘우리말 바로 쓰기’는 한자·일본어·영어식 외국말법에 자기도 모르게 오염돼 있던 지식인들에게 본디 우리말법을 알게 하는 전범이 되기도 했다. 많은 이들은 이 책을 “번쩍 정신이 들 만큼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재발견하게 한 역작”이라고 평가한다.
고인은 “말과 글이 하나여야 하듯 앎과 실천이 하나여야 한다”고 주장하며 자신의 뜻을 실천하는 데 앞장섰다. 1983년 ‘한국글쓰기연구회’를 창립해 바른 글쓰기 운동을 시작한 뒤 1988년엔 ‘우리말 살리는 겨레 모임’을 만들어 공동대표를 맡기도 했다. 1989년엔 ‘한국어린이문학협의회’를 만들어 아동문학이 나아갈 길을 찾고 후배 발굴에 힘썼다.
선생은 돌아가시기 직전까지도 ‘신동아’에 글을 연재하는 등 부지런히 글을 썼으며, ‘붉은 악마’에 대한 글을 700매나 남기는 등 사회현상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다. 또한 ‘우리글 바로 쓰기’ 4권과 ‘이오덕의 교육일기’ 3·4권, 특히 애착을 보였던 자서전 집필도 준비했으나 마무리하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다.
고인은 우리말 우리글 바로 쓰기 운동에 평생을 바친 공을 인정받아 1988년 제3회 단재상을, 지난해엔 정부로부터 문화훈장 은관장을 받았다. 장남 정우씨 등 고인이 남긴 2남1녀는 고인을 거처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묻었다. 평소 생명 존중과 자연사랑을 직접 실천했던 고인은 78세의 나이로 다시 자연의 품으로 돌아갔다.
20년 동안 선생을 가까이서 모셨던 김언호 한길사 사장은 “선생님은 대문장가였으며 넓은 의미의 큰스승이었다”며 “선생님의 말씀은 늘 나 자신을 깨어 있게 했으며, 그분을 모시고 그분의 책을 만들 수 있어 너무나 행복했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