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남성복에서 유행이란 깃 넓이 정도가 아니라 전체적인 실루엣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만큼 남성들의 눈이 섬세해졌다는 뜻이다.
장면2 : 디자이너 L이 제안하는 대표적인 가을 룩은 프레피 룩이다. 영국의 전통이 숨쉬는 명문 학교 재학생들이 즐겨 입은 프레피 룩은 이번 시즌 모던하게 재창조된다. 기존에 선보인 우븐 셔츠에 스프레드 칼라와 옆트임을 추가하는 등 ‘펑키’한 요소로 액센트를 준 뉴 아이템은 프레피 룩의 다른 버전을 제시한다.
장면3 : 신촌에서 작은 바를 운영하는 Y씨(37), 요즘 눈에 자주 ‘밟히는’ 메신저백이 ‘프라다’ 제품이란 걸 알아내자마자 청담동으로 달려갔다. 카탈로그를 보고 예약을 한 사람들이 많아 일찌감치 다 팔리고 마지막 한 개가 남았다는 말에 주저 없이 가방을 샀다.
이건 여자들 이야기가 아니다. 장면1은 서울 명동 밀리오레에서 남자 고등학생 둘이 빨간색 선캡을 고르며 나눈 대화고, 장면2는 세계적인 디자이너 L의 2003년 가을 남성패션 컨셉트다. 그리고 장면3은 ‘내일모레면 마흔’인 남성 Y씨의 쇼핑 스토리다. 그는 “62만원이나 주고 충동구매를 했지만 마음에 드는 것을 사서 너무 기쁘다”고 했다.
아직도 많은 남자들에게 쇼핑은 ‘여자 뒤를 따라다니며 짐이나 들어야 하는’ 고역이지만 어떤 남자들에게 쇼핑은 자신의 스타일링을 위한 즐거운 엔터테인먼트다. 그들은 잡지를 꼼꼼히 읽고 트렌드를 분석해 친구들과 의견을 나누며, 지난주 미니시리즈에서 탤런트 아무개가 입고 나온, 허리선이 깊이 패인 슈트가 어느 회사 제품인지 알아내고야 만다. 백화점에 가면 해외출장 때 본 옷의 디자인을 ‘카피’한 옷을 구별해내고, 화장품 코너에선 복부 지방을 분해하여 근육을 단단하게 해준다는 신제품을 구입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아무거나” 구매성향 많이 사라져
이들은 유달리 섬세한 게이도 아니고, 연예인 지망생도 아니다. 그저 사회와 가정에서 요구하는 남성의 역할을 평범하게, 혹은 매우 성공적으로 해나가는 남자들이다.
이들은 미국과 유럽에서 ‘메트로섹슈얼’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전형적인 메트로섹슈얼은 대형 쇼핑몰과 헬스클럽, 미용실이 밀집한 대도시에 사는 경제력을 갖춘 남성들로 성적 정체성 면에선 남성이지만 전통적으로 여성적이라고 분류되는 행동을 하는 데 거리낌이 없다.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메트로섹슈얼은 디자인, 패션, 방송 등의 업계에 종사하는 남성들의 직업적 특성을 의미하는 것처럼 보였으나 지금 이들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축구스타 베컴은 정성스럽게 손질한 헤어스타일과 매니큐어 칠한 손톱, 미식 취향 등으로 전형적인 메트로섹슈얼로 꼽힌다.
한 대형 쇼핑몰의 남성복 매장.
“우리나라에서 패셔너블하게 자신을 꾸미고, 직접 쇼핑하고 스타일링하는 남자들이 많아진 건 벤처기업 붐이 불면서예요. 젊은 나이에 돈이 아주 많아진 사람들이 갑자기 늘어났죠. 이들은 딱딱한 정장 차림보다 자유스럽고 고급스러운 스타일을 원했어요. 부와 자유로운 정신을 보여주는 데 옷처럼 효과적인 방법이 없으니까요. 벤처붐은 사그라들었어도 메트로섹슈얼한 라인은 정착이 된 거지요.”
내셔널 브랜드 중 최고가로 꼽히는 ‘타임 옴므’ 홍보팀 백세훈씨의 말이다. 2000년 런칭한 이후 폭발적 인기를 얻은 ‘타임 옴므’는 불경기 속에서도 매년 15% 이상 매출이 신장하고 있다.
갤러리아 백화점에서 남성브랜드 P를 판매하는 남현숙씨도 “한두 해 사이 남성복 매장이 무척 화려해졌다”면서 “막연히 뭔가를 사러 온 손님보다 원하는 것이 분명한 남성 고객이 많아졌다”고 말한다.
‘스타마케팅’이 쇼핑하는 남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남성복 스타일링과 홍보를 맡고 있는 ‘인트렌드’ 김기동 팀장은 “소수의 남성 패션 마니아들은 늘 있었지만, 전혀 패션을 몰랐던 사람들이 남자 연예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패션에 눈을 뜨게 된 것이 큰 변화를 주도한다”고 말한다. 탤런트 이병헌, 이정재 그리고 개그맨 홍록기가 한국의 메트로섹슈얼 마케팅에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대표적인 연예인들. 얼마 전 SBS 드라마 ‘올인’에서 이병헌이 입은 슈트는 고가임에도 협찬 직후 80벌이 팔려나가 관계자들을 놀라게 했다.
올가을엔 럭셔리하고 클래식한 디자인이 인기를 끌 것으로 보인다.
새로운 남성 쇼핑족들은 더 이상 무늬 없는 밋밋한 셔츠나 펑퍼짐한 정장에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대담한 프린트, 레이스와 러플이 달린 셔츠가 이들의 쇼핑 리스트에 오른다. 이를 증명하듯 샐러리맨들이 주요 고객인 기성복 양복 시장은 극심한 불경기에 빠진 반면, 개성 있는 캐릭터 남성 브랜드는 매출이 상승세를 이어가고 있다. 이처럼 불경기 속에서도 쇼핑하는 계층의 취향이 분명해지자 화장품 회사와 주얼리 회사들이 잇따라 남성 라인을 새로 내놓아 때 아닌 남성 브랜드 런칭붐이 불고 있다.
남성 패션이 전반적으로 클래식하고 복고적인 흐름을 타고 있어서 액세서리로는 커프스 버튼과 클래식한 시계가 절대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고 목걸이, 귀고리, 팔찌 등도 남성적인 터프함보다는 에스닉하고 섬세한 디자인을 선호하는 추세다.
“패션에 민감한 남자들은 유행을 빨리 따라가는 여자들보다 훨씬 대담하고 철저해요. 여자들은 유행하는 아이템 하나를 사는 경우가 많지만 남자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신경을 쓰니까요. 반바지 입을 때 왁싱하는 건 기본이고, 선탠에 발톱 손질까지 하는 사람이 적지 않아요.”(‘인트렌드’ 김기동)
남성 패션 브랜드의 패션쇼에 초청되는 사람들은 대개 20대 후반에서 30대로 디자인이나 예술, 방송 업계 종사자들이 한 축을 차지하고 젊은 CEO(최고경영자)와 CFO(재무책임자), 의사나 강남권의 자영업자, 유학생이나 건물임대업자들이 나머지 자리를 차지한다는 게 업체 담당자들의 말이다.
패션쇼에 자주 참석한다는 한 남성 프리랜서는 “외국에 나가면 세일하는 명품 부티크에서 벼룩시장까지 샅샅이 뒤진다”고 말한다. 그는 벼룩시장에서 샀다는 아르마니 은반지에 영원한 여성 아이템이라고 믿어온 핼무트 랭의 토트백(손목에 거는 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는 “친구들끼리 모이면 패션이 주요 토픽이다. 사람들이 내 옷차림이나 감각을 알아봐주는 게 기분 좋다”고 덧붙였다.
보수적인 직업군에서도 메트로섹슈얼족이 발견된다. 외국계 회사의 CFO인 이수현씨(38)는 “패션잡지도 많이 보지만 회사에 외국인들이 많아서 연예인보다는 그들의 옷이 쇼핑할 때 기준이 된다. 노골적이지 않을 정도로 멋을 내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한다.
스타일리스트 김성일씨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남성복에서 유행이란 양복의 깃과 바지 넓이가 넓어지고 좁아지는 것 정도를 의미했다. 그러나 지금 트렌드란 전체적인 실루엣의 변화를 말한다. 남자들의 눈과 감각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고 그만큼 예민해졌다는 뜻”이라고 분석한다.
이렇게 우리나라에서 쇼핑하는 남자들, 혹은 메트로섹슈얼이 늘어난 데 대한 해석은 여러 가지다. 벤처붐으로 경제력이 있는 젊은층이 형성됐다는 특수한 상황 덕분이라는 분석 외에도 뉴욕의 트렌드가 시차 없이 직수입되고 있다거나 마케팅 담당자들이 남성들의 쇼핑 욕구를 집중적으로 공략하고 있다거나 남성과 여성의 직업적 경계와 가족 안에서의 역할 구분이 모호해졌다는 분석 등이 나온다.
“한국 남자들이 비로소 가장으로서의 권위, 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 개인적 정체성을 찾기 시작했다는 의미죠. 자기 스타일을 갖는 것은 물론이고 거울을 보는 것조차 ‘남자라서’ 금기였잖아요. 단순히 남자들의 쇼핑 패턴이 변한 게 아니라 마음의 금기가 사라지고 있다는 거죠.”(이충걸, 남성잡지 GQ 편집장)
옷이 내면의 발현이라는 그의 말에 노타이 차림으로 국회에 처음 들어섰던 한 의원이 떠올랐다. 남성 스타일리스트는 그의 ‘파격적인 패션’에 대해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했다.
“그건 패션이 아니라 정치라서 관심 없어요. 그가 슬림한 바지에 허리 라인이 들어간 양복을 입었다면 좋았겠지만요.”
이 세상에는 아주 다를 뿐 아니라 거의 적대적인 두 종류의 남성이 살고 있는 것이다. 평행선 위에서 먹고, 쇼핑하고, 생각하는 그들의 존재가 이 포스트모던한 시대의 정확한 거울이란 점이 아쉽긴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