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여름 최고의 트렌드는 ‘공포’다. 공포를 테마로 한 영화, 레포츠, 액세서리와 체험 프로그램 등이 광범위한 인기를 끌고 있다.
“아악~!” 비명이 터져 나온다. 어두운 밤, 인적 드문 산길, 토막난 사람의 팔. 공포는 서늘한 바람이 되어 등 뒤로 다가오고 찌는 듯한 더위는 어느새 잊혀진다.
누구에게나 깊은 여름밤 흐릿한 손전등 불빛만 밝혀둔 채 둘러앉아 오들오들 떨며 무서운 이야기를 듣던 추억이 있을 것이다. 나직한 속삭임을 통해 전해지던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은 열대야에 시달리는 긴긴 여름밤을 이겨 나갈 수 있게 하는 힘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공포는 더 이상 어두운 공간에서 은밀하게 이야기되지 않는다. 넓은 광장이 온통 그들의 차지가 됐기 때문이다. 네거리 극장 앞에는 피 묻은 옷을 입은 채 공포에 질린 눈을 한 여인들의 그림이 걸려 있고, 악마의 형상은 청소년들의 휴대전화 고리에서 달랑거린다. 어느새 공포는 피해야 할 두려운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찾아 나서 즐기는 오락의 하나가 된 것이다. 영화와 레포츠, 공포를 모티브로 한 갖가지 산업은 여름을 ‘서늘한 계절’로 바꿔놓고 있다.
극한의 두려움 모든 사고 마비 그래서 인기
공포영화를 상영하는 극장 앞에서 표를 사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
이 영화들의 특징은 저마다 ‘최대한의 공포’를 내세우고 있다는 것. 지나치게 잔혹한 영상으로 미국에서조차 예고편 심의가 21차례나 반려됐다는 한 영화는 ‘심장까지 얼려버릴 정도의 오싹함. 공포 영화광이라 해도 이 영화의 기습적 도끼 공격 앞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이라고 광고하며 극단의 공포를 부추기고 있다.
한국적 한을 통해 ‘권선징악’의 메시지를 전하던 ‘월하의 공동묘지’ 류의 영화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다. 요즘 영화들은 잔인한 살인마의 무차별적 공격이나 평화로운 가정에 찾아오는 이유 없는 위기 같은 거대하고 알 수 없는 공포로 관객의 심장을 ‘얼려버리는’ 것이다.
더 큰 스릴을 즐기려는 이들을 위해 새로 등장한 수상레포츠 기구 ‘플라잉 피시’. 이 기구에 탄 사람은 보트 뒤에 매달려 연처럼 날아가는 듯한 역동적 쾌감을 느낀다.
영화뿐만이 아니다. 올여름 공포산업의 특징은 수요자를 두려움의 극한으로까지 몰고 감으로써 모든 사고를 마비시키는 것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점이다.
일반인들이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공포는 온몸으로 느끼는 스릴. 수상레포츠나 놀이기구를 즐기는 사람들은 ‘심장이 떨어질 듯한’ 공포에 재미를 느끼며 보다 강도 높은 자극을 찾아 나선다고 한다. 이들의 요구에 부응해 이번 여름 등장한 것이 ‘플라잉 피시’다. 바나나보트가 3개 연결된 모양의 ‘플라잉 피시’는 보트 뒤에 연처럼 묶어 수면 위를 가르도록 만든 수상레포츠 기구. 기존의 바나나보트가 수면 위를 떠가는 데 불과했다면 ‘플라잉 피시’는 공중에 매달리는 느낌을 줘 사람들에게 보다 역동적인 쾌감을 느끼게 한다.
경기 가평군 ‘카페리 수상레저타운’의 장석운 실장은 “클럽을 방문한 손님 중 절반 이상이 ‘플라잉 피시’를 선택하고 있다”며 “기존의 보트보다 더 강력하고 색다른 공포를 맛볼 수 있게 해주는 점이 인기의 비결”이라고 전했다. 매년 여름이면 수상스키를 즐긴다는 신상우씨(42)는 “고난도 기술을 습득할수록 더 높은 강도의 스릴을 찾게 된다”면서 “극단의 공포를 느끼는 순간 일상의 스트레스를 모두 잊게 되면서 얻는 쾌감이야말로 수상레포츠의 진정한 매력”이라고 말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흉가나 공동묘지를 방문하며 극단의 공포를 체험하고자 하는 이들도 늘어나고 있다. 옛날부터 전해져 온 전설 속의 신비한 현상들을 직접 체험하자는 취지로 만들어진 인터넷 동호회 ‘귀사모’(cafe.daum.net/ gostloveme)의 회원수는 현재 9만여명에 이르지만 계속 늘어나고 있다. 이 동호회를 운영하는 ‘아리수’씨는 “계절적인 요인 때문인지 요즘 들어 하루에 1000여명씩 새로 가입하고 있다”고 말했다.
‘공포’가 인기를 끌면서 괴기한 이야기를 소개하거나 흉가 등 괴담의 현장을 함께 체험하는 인터넷 모임이 늘고 있다.
지난해 4월 만들어진 동호회 ‘흉가체험’(cafe.daum.net/ hyunggabest)도 1년 만에 회원수가 3만여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자신들이 느낀 공포를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기 위해 직접 찍은 흉가나 공동묘지 사진, 디지털 기술로 유령의 형상을 만들어낸 합성사진 등을 게시판에 올려두고 서로의 감상을 교환한다.
창백한 얼굴, 매서운 눈동자에서 흘러내리는 피눈물, 매혹적인 검은 드레스를 입은, 음산한 ‘리빙데드돌’(living dead dolls)에 열광하는 사람들의 모임도 있다. ‘시체’나 ‘귀신’을 연상케 할 정도로 섬뜩한 모습의 이 인형을 사랑하는 이들은 ‘리빙데드돌카페’(cafe.daum.net/lidedo)에 모여 자신들만의 심미적 쾌감을 나눈다. ‘리빙데드돌’을 4개 갖고 있다는 김다영씨(18)는 “그저 예쁘기만 한 인형보다는 아름다움과 공포를 동시에 느끼게 하는 ‘시체 인형’이 더 매력적”이라며 “공포심을 가장 자극하는 ‘시각’을 통해 무의식 속의 잔혹함을 느끼는 듯한 묘한 쾌락을 얻는다”고 말했다.
이처럼 ‘공포’가 인기를 끌자 이에 대한 전문적인 관심을 기초로 만들어진 사이버상의 모임도 등장했다. 지난해 12월 탄생한 ‘공포카페’(www.horrorcafe.co.kr)는 “‘공포’의 가치를 문화와 예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싶다”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 8명의 운영자가 ‘공포영화’ ‘주술·마법’ ‘리빙데드돌’ ‘공포만화’ ‘미스터리한 사건·사고’ 등 공포와 관련한 세분화된 콘텐츠를 제공하는 이곳은 개설된 지 6개월 만에 3000명에 육박하는 회원수를 기록하며 공포 마니아들의 ‘놀이터’로 자리잡았다. ‘주술·마법’ 분야의 게시판을 운영하고 있는 천혁수씨(25)는 “공포카페가 인기를 끄는 것은 물질만능 풍조가 사회에 강하게 퍼지면서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영적이고 신비로운 분야에 대한 관심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이렇듯 ‘공포’가 인기를 끌자 업계에서는 발 빠르게 ‘공포 마케팅’에 나서고 있다. 휴대전화 초기화면에 깔 수 있는 빨간 눈동자 그림, 전화 건 사람의 간담을 서늘케 하는 ‘저주의 통화연결음’, 한밤중 전화기에서 여자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지도록 하는 기능 등이 인기상품들. 휴대전화 서비스를 제공하는 50여개의 업체들은 앞다투어 공포를 테마로 한 서비스를 내놓고 있다. SK텔레콤의 무선 인터넷 ‘네이트’가 제공하는 공포 콘텐츠만 65개에 달할 정도다. SK텔레콤은 멀티미디어 서비스 ‘준(June)’을 통해 ‘장화, 홍련’과 ‘주온’, ‘4인용 식탁’ ‘거울 속으로’ 등 공포영화의 하이라이트 동영상도 제공하고 있다. SK텔레콤에 따르면 준을 통해 ‘장화, 홍련’의 미공개 콘텐츠와 하이라이트 동영상을 다운로드 받는 사람들은 하루 평균 1000여명으로 다른 영화 콘텐츠의 50배에 달한다.
대형포털 MSN도 7월15일부터 ‘오싹오싹 공포전’을 열어 ‘처녀귀신’ ‘심령사진’ 등 소름이 돋게 하는 공포 아이템을 전시하며 최근 불고 있는 ‘공포 열풍’에 한몫했다.
수상레포츠나 번지점프, 롤러코스터 등은 사람들에게 ‘심장이 떨어지는 듯한’ 자극을 준다. 공포 마니아들은 바로 이 느낌을 즐기며 더 강한 자극을 찾아다닌다.
이 같은 공포 열풍에 대해 연세대 사회학과 김호기 교수는 “최근 우리나라에서 일고 있는 ‘공포’에 대한 관심은 여름철마다 돌아오는 유행이라고 보기에는 특별한 면이 있다”면서 “각박한 현실을 벗어나고자 하는 욕망과 엽기적 취미를 숭상하는 하위문화의 발달 등이 복합적으로 만들어낸 사회현상”이라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