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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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上 무대로 떠난 天下 제일 소리꾼이여”

타계한 박동진 명창의 발자취 … 피나는 훈련으로 득음의 경지, ‘완창 판소리’ 신개념 정착시켜

  • 송혜진/ 숙명여대 교수·국악FM방송 편성제작팀장 hjsong@sookmyung.ac.kr

    입력2003-07-18 11: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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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上 무대로 떠난 天下 제일 소리꾼이여”

    7월8일 87세를 일기로 타계한 고 박동진 명창의 최근 모습.

    7월10일 오전 9시50분. 국악 FM방송(FM 99.1MHz)은 “제비 몰러 나간다 제비 후리러 나간다…”라는 판소리 한 대목을 시그널 뮤직으로 박동진 명창의 장례식을 생중계했다. 서울 서초동 우면산 자락을 배경으로 한 국립국악원 야외무대 별맞이터에 모인 수백명의 조문객들은 8일 87세로 타계한 박동진 명창의 육성과 소리를 들으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한명희 교수가 쓰고 신영희 명창이 목메어 노래한 조시(弔詩) 속에서 20세기 후반의 판소리계를 대표한 명창과 영별(永別)하는 자리였다.

    이례적인 ‘장례식 생방송’을 급작스레 준비하는 와중에 국악방송 내에서는 방송 시그널 뮤직을 결정하기 위해 제작진이 모였다. “박동진 명창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받은 소리가 적벽가니 적벽가의 하이라이트인 ‘적벽대전 대목’을 쓰는 것이 어떠냐.” “장례식에 적벽대전은 좀 그렇다. 유명한 ‘새타령’ 대목이 더 낫다.” “박동진 명창은 적벽가뿐만 아니라 모든 판소리를 다 부른 분이다. 그러니 특히 장례식의 슬픈 분위기와 어울리는 심청가 중에 심봉사가 곽씨 부인의 장례식에서 통곡하는 대목을 써야 한다.” “뭐니뭐니해도 박동진 명창이 많이 부른 소리는 흥보가다.” “그럼 흥보가 중에 어떤 대목이 좋으냐.”

    180여 시간의 판소리 머릿속에 담아

    설왕설래 끝에 국민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진 소리인 흥보가 중 ‘제비 몰러 나간다…’로 시작하는 대목으로 결정됐다. 필자는 이 짧은 논의를 지켜보면서 박동진 명창 생애의 많은 단면들을 보았다.

    하루라도 연습을 게을리 하면 머릿속에 든 판소리를 잊을까봐 매일 새벽 반드시 2시간씩 연습했다던 박동진 명창. 박명창이 머릿속에 담은 판소리는 완창(完唱)한다면 180여 시간이 걸리는 방대한 분량이라고 한다. 이 속에는 현존하는 판소리 다섯 마당 외에도 가사만 남고 소리가 전승되지 않은 일곱 마당을 새로 짜서 완성한 판소리 열두 마당, 그리고 ‘성웅 이순신’ ‘판소리 예수전’ ‘팔려간 요셉’ ‘치악산’ ‘윤봉길전’ ‘안중근전’ ‘논개전’ 같은 창작 판소리 등이 포함돼 있다. 더 놀라운 것은 이 모든 소리가 누구의 것을 배워 재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리로 완전히 탈바꿈시킨 것이라는 점이다. 박명창은 180여 시간 분량의 ‘작품’을 남긴 셈이다. 이 때문에 박명창은 ‘걸어다니는 판소리 백과사전’이라 불리기도 했다.



    “天上 무대로 떠난 天下 제일 소리꾼이여”

    서울 아산병원에 차려진 박명창의 빈소에서 국악인 신영희씨가 조문하고 있다.



    박동진은 1916년 판소리의 고장 전라도가 아닌 충남 대덕에서 출생했다.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리꾼의 길에 들어섰지만 스승 운이 좋지 않았고 가난했으며, 한때는 소리꾼에게는 죽음과 다름없는 ‘목이 꺾이는’ 절망을 겪기도 했다. ‘목이 꺾인다’는 것은 말을 할 수는 있지만 음의 높낮이와 강약을 조절해 소리를 할 수는 없는 증상. 그러나 박동진은 자학에 가까울 만큼 무서운 독공(篤工) 기간을 거쳐 목을 되찾았다. 이때 영양실조와 극심한 소리 훈련으로 생긴 부증(浮症)을 달래느라 ‘인분 삭인 물’을 마신 일화는 특히 유명하다.

    그러나 이토록 외로운 자기와의 싸움 끝에도 그에게 제대로 된 판소리 무대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한동안 허드렛일이나 마찬가지인 공연들로 연명하는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 우연히 ‘국립국악원에 가면 공부하면서 돈을 벌 수 있다’는 말을 듣고 이에 미래를 걸었다. 판소리꾼에게는 국립창극단이 어울리는 직장이지만 박동진은 궁중음악 전승기관인 국립국악원을 택한 것이다.

    “天上 무대로 떠난 天下 제일 소리꾼이여”

    박동진 명창은 현존 판소리 다섯 마당을 완창한 최초의 국악인이다. 1969년 자신이 복원한 판소리 ‘숙영낭자전’을 고수 김두수씨와 함께 녹음하고 있는 박명창(가운데 사진 왼쪽).

    박동진은 1962년 국립국악원에 평단원으로 입단하자마자 새벽 출근을 시작해 연습했다. 그리고 하루도 빠짐없이 7, 8시간씩 소리 연습을 한 지 7년째 되던 1968년 9월30일. 국립국악원 대연주실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5시간 반의 마라톤 판소리 신기록’을 세웠다. 박동진은 북을 치며 소리에 장단을 맞추는 고수가 세 번 교체되는 5시간30분 동안 쉼 없이 흥보가를 불렀는데, 처음에 ‘어떻게 사람이 다섯 시간 반 동안 먹지도 않고 화장실에도 안 가고 소리를 할 수 있느냐’는 호기심에 관심을 보이던 청중들은 차츰 시간이 흐를수록 박동진의 소리에 감동했다. 이어 박동진은 최종민 교수가 ‘마치 준비된 폭탄을 터뜨리듯’이라고 표현한 것처럼 1969년 5월 8시간20분에 걸친 ‘춘향가’ 공연을 시작으로 4년 동안 무려 29시간40분의 판소리를 불렀다. 이 박동진의 ‘신화’는 지금까지 누구도 깨지 못했다.

    마침내 박동진은 판소리계에 ‘완창 판소리’라는 신개념을 정착시켰다. 판소리 한 가지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부르는 공연은 판소리꾼들에게 새로운 도전이었다. 어지간히 공력을 기울이지 않고서는 완창무대에 설 수 없고, 또 이 무대를 거치지 않고서는 전문 소리꾼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박동진 명창의 완창 판소리는 명창이 되려는 이들에게 ‘소리 몇 대목 배워 무대에 설 생각 말고 좀더 공부하라’는 따끔한 충고가 된 것이다.

    음악 귀족 거부한 서민적 삶

    무서운 공부 끝에 50대 중반에 이른 박동진은 최고의 명창이 되었다. 적벽가로 판소리 중요무형문화재가 되었고 청중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하는 소리꾼으로 인정받았다. 2001년에는 ‘음악계의 브리태니커 사전’으로 통하는 영국 ‘그로브 음악대사전’에 한국 음악인 29명 중의 한 사람으로 실렸다.

    그러나 최고가 되었어도 그는 음악 귀족으로 행세하는 대신 ‘조선의 광대’처럼 청중을 만났다. 옛 문헌에 나오는 판소리 광대 복장에 따라 갓을 쓰고, 행전을 친 바지저고리를 입고, 두루마기의 양옆을 트고 소매를 조붓하게 재단한 창옷을 입었다. 그리고 공연장에서는 ‘사진처럼 판에 박힌 소리가 아닌’ 즉흥적인 소리로 청중들을 울리고 웃겼다. 또 세상살이에 지친 청중들의 마음을 대변하기라도 하듯 판소리에 거침없는 욕을 섞어 불러 청중들의 답답한 마음을 후련하게 씻어주었다. 그는 이런 것들이야말로 ‘광대의 중요한 소임’이라고 생각했다.

    많은 이들이 ‘CF에 나온 그 영감’이라고 기억하는 박동진 명창은 이렇게 우리 곁에 머물렀다. 그는 최고의 소리꾼, 끊임없이 노력하는 무서운 광대정신의 소유자, 소리로 서민들의 아픈 속을 어루만져주는 음악가, 판소리 하는 이들에게는 ‘좀더 공부하시오’라고 꾸짖는 스승, 국민들에게는 ‘우리 것은 소중한 것이여’라고 일갈한 어른이다.

    언론인 오효진은 15년 전 한 공연의 팸플릿에서 박동진을 ‘소리를 하기 위해서 태어난 사람이고, 소리에 미친 사람이고, 소리를 하다 절망한 사람이고, 그러나 마침내 소리에 귀신이 된 사람이고, 이 다음에 죽으면 귀신처럼 소리만 남을 사람이다’라고 소개했는데, 이제 명창은 가고 소리만 남게 되었다.

    박동진 명창 별세를 다룬 몇몇 언론보도는 그를 ‘이 시대 마지막 광대’라고 표현했지만 필자의 의견은 다르다. 1968년 판소리 흥보가 무대에서 쉰셋의 중년 명창이 누구도 생각지 못한 새로운 방식의 소리로 우리 곁에 다가온 것처럼, 또 누군가가 새롭고 훌륭한 소리를 만들어 우리 곁에 다가올 것이라고 믿고 싶다. 박동진 명창의 소리정신을 가슴에 품은 이가 있다면 가능한 일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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