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에 대한 부시 정부의 발표는 사실보다 과장된 것이다.”(49%) “아직까지 대량살상무기가 발견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이라크전은 충분히 치를 가치가 있었다.”(56%)
최근 미국 CBS 방송과 뉴욕타임스가 미국 내 성인 9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미국이 전쟁 명분으로 내세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부시 정부의 발표가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이라크전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승리는 미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선물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근 미군기지에 가장 높은 국기봉을 만들어주기 위한 40만 달러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5센트짜리 동전이나 1달러짜리 지폐를 내미는 평범한 손들, 하지만 그들의 손에서 미국 민족주의의 원초적 공격성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 무렵 사카이 나오키 코넬대 아시아 연구과 교수와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뉴욕 이타카(나오키 교수의 집)에서 ‘경계짓기로서의 근대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진행된 한-일 지식인 대담의 후기를 집필하고 있었다.
나오키 교수와 임지현 교수가 근대의 다섯 가지 장벽-민족, 인종, 국가, 성, 계급-을 설정하고 민족이라는 경계짓기,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짓기,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짓기를 비판하는 내용의 대담을 시작한 것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국적과 민족의 동일성에서 일탈할 수 있는 진정한 탈근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즉 서구적 근대가 전 지구적 근대로 확산되는 과정을 조망하며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돼왔는지 살펴보고 근대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후 22개월간 10회에 걸쳐 대담(녹취록만 200자 원고지 3200장 분량)이 진행됐다. 이 대담들을 담은 ‘오만과 편견’은 대담집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산만함이 눈에 띄지만 한-일 대표 지식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부여한다.
출판사측이 ‘차이가 낳은 우정의 커뮤니케이션’이라 이름 붙인 대담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할 무렵 시작돼 이라크전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 마무리됐다. 두 사람은 승리에 환호하는 미국사회에서 19세기 말 유럽 노동계급이 열광했던 사회제국주의의 흔적을 읽는다.
공동후기에서 두 사람은 이 21세기판 사회제국주의가 몰락하는 백인 중산층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조차 속할 수 없는 언더클래스 흑인과 유색인들, 경쟁에서 탈락한 백인들의 좌절과 분노, 절망을 효과적으로 마비시켰다고 썼다. 인디언, 흑인, 멕시코나 아시아의 이민자 혹은 비기독교인으로 미국사회에서 타자화됐던 사람들이 갑자기 미국인이라는 동일성 속에 포섭돼 성조기를 흔들어댄다. 대신 미국인과 비미국인이라는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9·11 테러와 이라크전은 민족 혹은 인종,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배타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경계 밖의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는 제국주의를 통해 비유럽 세계로 전파되고,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주변부 민족주의의 논리 역시 서양적 근대의 경계짓기 논리를 모방해왔다. 사카이 교수는 한국이나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은 미국의 헤게모니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국민주의는 미제국주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기관(器官)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임지현 교수도 ‘미국의 헤게모니에 기생하는 남한의 내셔널리즘-염치없는 내셔널리즘’을 비판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야만-반민족-소련제국주의-김일성-매국노’에 대항하는 ‘미국-자유민주주의-남한-문명-민족’의 내셔널리즘을 동원해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한편 임교수는 반미 민족주의야말로 우리 안에 미국을 세워보겠다는 미국화에 대한 욕망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때 우리도 진짜 미국과 같은 부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식민지 콤플렉스와 제국주의 욕망은 폭력과 배제, 차별과 편견을 잉태한다. 대담집 ‘오만과 편견’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논리가 결국 제국의 오만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경고 “그들은 오만으로 가득했고,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혔다.”
오만과 편견/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484쪽/ 1만8000원
최근 미국 CBS 방송과 뉴욕타임스가 미국 내 성인 910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미국이 전쟁 명분으로 내세운 이라크의 대량살상무기를 찾아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며 부시 정부의 발표가 과장됐다고 생각하지만, 이라크전에 대해서는 대체로 긍정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어쨌든 승리는 미국인들에게 자부심을 선물했다. 일부 지역에서는 인근 미군기지에 가장 높은 국기봉을 만들어주기 위한 40만 달러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25센트짜리 동전이나 1달러짜리 지폐를 내미는 평범한 손들, 하지만 그들의 손에서 미국 민족주의의 원초적 공격성을 발견하고 전율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그 무렵 사카이 나오키 코넬대 아시아 연구과 교수와 임지현 한양대 사학과 교수는 뉴욕 이타카(나오키 교수의 집)에서 ‘경계짓기로서의 근대를 넘어서’라는 주제로 진행된 한-일 지식인 대담의 후기를 집필하고 있었다.
나오키 교수와 임지현 교수가 근대의 다섯 가지 장벽-민족, 인종, 국가, 성, 계급-을 설정하고 민족이라는 경계짓기, 동양과 서양이라는 경계짓기, 남성과 여성이라는 경계짓기를 비판하는 내용의 대담을 시작한 것은 19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두 사람은 국적과 민족의 동일성에서 일탈할 수 있는 진정한 탈근대에 대해 이야기해보기로 했다. 즉 서구적 근대가 전 지구적 근대로 확산되는 과정을 조망하며 동아시아, 특히 한국과 일본에서 그것이 어떤 방식으로 재현돼왔는지 살펴보고 근대를 벗어나는 길을 모색해보자는 것이었다. 그 후 22개월간 10회에 걸쳐 대담(녹취록만 200자 원고지 3200장 분량)이 진행됐다. 이 대담들을 담은 ‘오만과 편견’은 대담집의 특성상 어쩔 수 없는 산만함이 눈에 띄지만 한-일 대표 지식인의 생생한 목소리를 가감 없이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읽는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부여한다.
출판사측이 ‘차이가 낳은 우정의 커뮤니케이션’이라 이름 붙인 대담은 9·11 테러 이후 미국이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할 무렵 시작돼 이라크전에서 미국의 승리가 확실해졌을 때 마무리됐다. 두 사람은 승리에 환호하는 미국사회에서 19세기 말 유럽 노동계급이 열광했던 사회제국주의의 흔적을 읽는다.
공동후기에서 두 사람은 이 21세기판 사회제국주의가 몰락하는 백인 중산층이나 프롤레타리아 계급에조차 속할 수 없는 언더클래스 흑인과 유색인들, 경쟁에서 탈락한 백인들의 좌절과 분노, 절망을 효과적으로 마비시켰다고 썼다. 인디언, 흑인, 멕시코나 아시아의 이민자 혹은 비기독교인으로 미국사회에서 타자화됐던 사람들이 갑자기 미국인이라는 동일성 속에 포섭돼 성조기를 흔들어댄다. 대신 미국인과 비미국인이라는 경계는 더욱 뚜렷해졌다. 9·11 테러와 이라크전은 민족 혹은 인종, 국민이라는 이름으로 만들어지는 배타적 정체성의 형성 과정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경계 밖의 사람들을 타자화하는 차별과 배제의 논리는 제국주의를 통해 비유럽 세계로 전파되고,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주변부 민족주의의 논리 역시 서양적 근대의 경계짓기 논리를 모방해왔다. 사카이 교수는 한국이나 일본에서의 내셔널리즘은 미국의 헤게모니 속에서만 가능하다고 말한다. 한국이나 일본의 국민주의는 미제국주의의 바깥에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바로 그 기관(器官)으로서 존재한다는 것이다.
임지현 교수도 ‘미국의 헤게모니에 기생하는 남한의 내셔널리즘-염치없는 내셔널리즘’을 비판한다. 대표적으로 이승만, 박정희 전 대통령은 ‘공산주의-야만-반민족-소련제국주의-김일성-매국노’에 대항하는 ‘미국-자유민주주의-남한-문명-민족’의 내셔널리즘을 동원해 장기집권에 성공했다. 한편 임교수는 반미 민족주의야말로 우리 안에 미국을 세워보겠다는 미국화에 대한 욕망의 다른 표현일 수도 있다고 경고한다. 아메리카의 헤게모니에서 벗어날 때 우리도 진짜 미국과 같은 부와 풍요를 누릴 수 있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있는 것은 아닐까.
민족과 국가를 앞세운 식민지 콤플렉스와 제국주의 욕망은 폭력과 배제, 차별과 편견을 잉태한다. 대담집 ‘오만과 편견’은 제국주의에 저항하는 민족주의 논리가 결국 제국의 오만을 모방하는 것에 지나지 않음을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경고 “그들은 오만으로 가득했고, 우리는 편견에 사로잡혔다.”
오만과 편견/ 임지현, 사카이 나오키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484쪽/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