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강변에서 본 평양 전경. 한나라당 대북밀사설을 제기한 신동아 3월호 표지(아래).
‘한나라당 대북밀사설’은 ‘신동아’가 2003년 2월 중순 처음 보도한 뒤 북한측이 3월9, 14일 두 차례에 걸쳐 신동아 보도 내용과 유사한 내용을 발표하면서 관심을 끌었다.
신동아가 전한 밀사설에 따르면 한나라당 밀사는 2002년 9월 평양에 와서 “한나라당 정책을 ‘절대적 상호주의’에서 ‘전략적 상호주의’로 바꿔놓았다. 한나라당이 집권하면 DJ보다 화끈하게 도와줄 테니 고 이홍규 옹의 친일 전력 등 이회창 후보에 대한 비난을 중지해달라”고 북측에 요청했다는 것. 신동아에 따르면 이러한 내용은 북측 관계자가 남한 소식통에 전해줬고 이 소식통이 다시 신동아에 전해줘 보도하게 됐다.
신동아 보도 이후 북한의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는 3월9일 “한나라당이 지난해 우리측에 밀사를 보내 한나라당 대북정책이 ‘절대적 상호주의’에서 ‘신축적 상호주의’로 수정하는 과정에 있다고 통보했으며, 리회창이 당선되면 현 정부보다 더 적극적으로 통 큰 대북지원을 할 것을 담보했다”고 발표했다.
2002년 9월 방북 때 1~2일간 개인 일정
‘전략적 상호주의’가 비슷한 의미의 ‘신축적 상호주의’로, ‘화끈하게 도와주겠다’가 ‘통 큰 대북지원’으로 바뀌었을 뿐 신동아 기사와 북한측 발표 내용이 매우 흡사해 대북밀사설의 파장은 커졌다.
한나라당은 곧바로 “대북밀사설은 북한의 조작”이라며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자 북한의 아태는 3월14일 “우리가 실상을 상기시켜준 만큼 밀사 이름은 한나라당측이 밝히라”며 재차 이 문제를 쟁점화했다. ‘밀사가 누구냐’가 밀사설의 핵심사안으로 떠오르게 된 셈이다.
이와 관련, 밀사설을 가장 먼저 제기한 남한 소식통은 기자에게 “북한측은 내게 한나라당 밀사와의 접촉 과정을 자세히 얘기하면서 그 밀사가 ‘박재규’라고 분명하게 밝혔다”고 말했다.
이 소식통은 북측으로부터 한나라당 밀사 얘기를 듣게 된 과정도 공개했다. 다음은 이 소식통의 말이다. “얼마 전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한정부의 한 관리가 나를 수행하며 안내업무를 맡아서 했다. 내가 과거 수차례 평양에 갔을 때도 그가 나를 수행했기 때문에 나와는 사적으로 친분이 있었다. 함께 차를 타고 가며 남측 대통령선거 등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도중 그 관리는 ‘한나라당도 2002년 9월 박재규씨를 밀사로 보내 협력을 요청했다’면서 내가 신동아에 밝힌 내용을 얘기해주었다. 이 관리는 내가 ‘돌아가서 남측 언론에 얘기해주어도 되느냐’고 묻자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소식통에 따르면 이 북한 관리는 2002년 9월 박재규 전 장관이 평양에서 김용순 대남 비서, 전금진 내각책임참사, 리종혁 아태 부위원장 등 북측 고위 인사들을 만나는 자리에 자신도 함께 있었다면서 면담 정황도 얘기했다고 한다. 이 북한 관리가 남측 소식통에게 밝혀 신동아에 보도된 밀사설 내용과 이후 북한 아태의 공식발표 내용은 일치했다. 따라서 이 관리가 남측 소식통에게 밀사 관련 사실을 전할 당시부터 대북밀사의 실명을 밝혔다는 점은 주목을 끌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박 전 장관은 2002년 9월16일부터 22일까지 KBS 교향악단 평양방문단 고문 자격으로 방북했다. 그는 방북 기간중 1~2일 정도 일행과는 별도의 개인 일정으로 움직이면서 북측 고위 인사들을 만난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측은 2002년 5월 ‘로동신문’을 통해 고 이홍규 옹의 친일의혹을 처음 제기했으며 로동신문 기사 내용은 당시 ‘주간동아’의 단독보도로 남한측에도 자세히 알려졌다. 이후 북한은 KBS 방북단의 방북 3일 전인 2002년 9월13일 더 구체적인 고 이홍규 옹의 친일의혹 내용을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를 통해 제기했다.
이에 대해 박 전 장관은 한 측근을 통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2002년 9월 김용순 비서 등 북측 인사들을 만났을 때 북측이 이후보의 대북정책에 대해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듯한 말을 하기에 내가 ‘대선후보들은 남북화해협력 정책기조에선 같다. 다만 과정과 절차에서 약간의 차이점이 있다. 대선기간 과거처럼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이 발생하면 남북관계 발전에 도움이 안 된다. 대선후보 중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남북화해 노력 및 경제협력은 지속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또 북측이 ‘우리는 교류협력하자는데 남측이 신북풍 얘기를 한다’고 하기에, 나는 ‘논란은 그게 아니라 대선기간이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은 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라고 말했다.”
이회창 전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는 “대북밀사를 보낸 적 없다”고 했으나 북한은 최근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를 통해 “한나라당에서 밀사를 보냈다”고 주장했다.
박 전 장관의 해명에 따르면 박 전 장관과 북측 인사의 면담에서 이홍규 옹 부분이 명시적으로 거론되지는 않았지만 ‘신북풍’이라는 용어는 거론됐으며, 이 용어가 나오자 박 전 장관은 ‘대선기간이니 오해의 소지가 있는 일은 해선 안 된다’고 말한 것이 된다. 그에 앞서 박 전 장관은 ‘누가 대통령이 되든 경제협력은 지속될 것이다’라는 말도 한 것이 된다.
박 전 장관이 밝히는 대화 내용은 “한나라당의 밀사가 와서 ‘이홍규 옹 부분을 더 거론하지 않으면 대통령이 된 뒤 통 크게 지원해주겠다’고 요청했다”는 북한측 주장과 비교했을 때 연결되는 부분이 전혀 없지는 않다. 다만 북한은 주고받기식 뒷거래의 뉘앙스를 강하게 풍기는 명시적 표현이 오갔다고 주장하는 것이고, 박 전 장관은 원칙론적인 차원에서 한 얘기들일 뿐이라는 것이다.
이와 관련, 박 전 장관은 한나라당과의 사전 접촉설을 부인했다. “북한측이 대화 도중 신북풍이라는 용어를 썼지만 나는 그것을 이홍규 옹 관련 문제와 연결지어 생각하지 않았다”고 했다. 그는 “북한 인사들과 얘기한 사람들 중에 이런 식으로 하면 한나라당이 보낸 밀사로 몰릴 사람들이 한둘이겠느냐. 북한이 나를 밀사로 지목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고 반박했다. 북한측과 박 전 장관 사이에 ‘대선기간 신북풍은 안 된다’ ‘누가 대통령이 되든 남북 경제협력은 지속된다’ 등 미묘한 의미의 대화가 오간 것은 사실이지만 박 전 장관은 중립적 관점에서 언급한 ‘개인적 의견’을 북한측이 오해했거나 뒤늦게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것이라는 시각도 나온다.
아무튼 밀사론을 최초로 제기한 소식통은 “북한은 2002년 9월에 왔다는 한나라당의 밀사 얘기를 하면서 밀사로 박재규씨를 지목했다”고 증언했다. 이는 한나라당 밀사론의 성격을 ‘야당판 대북 뒷거래’ 또는 ‘단순 해프닝’ 중 하나로 규정짓는 전환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최근 한나라당에 실명을 밝히라고 요구했다. 이제 실명이 거론된 상황이므로 북한이 이를 공식 확인해줄지가 관심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