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5월26일 모교인 부산상업고등학교에서 열린 동창회 가족 한마음 체육대회에 참가해 후배 야구선수들과 환담을 나누고 있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지난 대선 때 노사모 홈페이지에 올라 폭발적반향을 몰고 온 ‘나 지금 흐느끼고 있어…’라는 글의 일부다. 이 글은 쇠락하던 노풍(盧風)을 되살리는 데 일조했다. ‘고아라’라는 ID로 인터넷에 이 글을 올린 주인공은 노무현 당선자의 부산상고 단짝인 L씨. 고교 졸업 후 노당선자와 상해공업이라는 어망회사에 들어가 첫 월급 2700원을 같이 탄 바로 그 사람이다. ‘얼굴’ 없이 등장, 노풍을 되살린 그는 많은 네티즌들의 궁금증을 뒤로하고 대선이 끝난 뒤 조용히 현업(금융업 중견간부)에 복귀했다. 그러나 권력의 흐름에 민감한 ‘세상’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노무현 당선자와 직·간접 라인 구축에 신경을 쓰고 있는 정·재계 안테나에 그의 ‘존재’가 잡혔고 그를 통해 노무현 권력에 편승하려는 얄팍한 수단들이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하나둘씩 가시화하고 있는 것이다. 어렵게 전화통화에 응한 그는 “나는 할 말도 없고, 말할 위치에 있지도 않다”며 끝까지 입을 열지 않았지만 노당선자의 고교친구라는 ‘특수신분’이 가져다준 세상의 관심이 주는 부담감을 떨치지 못한 눈치였다. 그는 “술을 사달라면 술 마실 줄 모른다고 하고, 만나자면 시간이 없다고 한다”며 세상과 담을 쌓고 살아가는 현재의 상황을 설명했다.
‘술 사라’부터 ‘승진 청탁’까지 골고루
L씨의 경우는 뜨는 ‘부산상고’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L씨처럼 노당선자와 직·간접 접촉이 가능한 인사들 주변에는 정·재계의 관심과 접촉을 시도하려는 움직임이 끊이지 않는다. 노당선자(53회)의 등장 이후 부상(釜商) 또는 부상 동문들은 노무현 권력에의 진입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부상 동창회 한 관계자는 “마치 권력의 성골로 편입한 것 같은 착각이 든다”고 했다. 지나친 관심들이 부담스럽다는 투다. 학연, 지연, 혈연 등을 매개로 하는 한국의 후진적 인맥 및 로비 문화가 빚은 촌극이지만 작은 투자로 큰 효과를 거두려는 재계의 움직임은 멈출 줄을 모른다. 이미 재계 일각에서는 “학교는 부산상고, 기업은 LG가 뜰 것”이란 우스갯소리가 나온 지 오래다. LG그룹은 노당선자의 부인인 권양숙 여사가 처녀시절 일하던 곳이자 아들 건호씨가 다니는 회사.
대통령 선거 당일 노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되자 부산상고 동창들이 운동장으로 나와 ‘노무현’을 연호하며 환호하고 있다. 부산상고 홈페이지에 접속하면 노당선자를 축하하는 팝업창이 뜬다.
부상 출신 한 정치인은 연초, 지역 중견 건설업체 관계자로부터 “임원으로 모실 인사를 추천해달라”는 청탁을 받았다. 부상 인맥을 확보하려는 것으로 해석한 이 정치인은 “추천할 만한 사람이 없다”며 제의를 거절했지만 달라진 부상의 위상에 한껏 고무된 표정이다.
1월3일 노당선자의 부산상고 1년 선배인 김문환 본청 조사2과장(56)을 총무과장으로 인사 발령한 국세청은 부상하는 ‘부상’의 존재로 한동안 홍역을 치렀다. 국세청의 살림살이를 도맡아 관리하는 자리에 비고시 출신이 입성하자 “혹시 부산상고 출신이라는 점이 고려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 것. 특히 언론이 그의 발탁을 대서특필하면서 문제는 더 꼬였다. 국세청측이 “인사계장을 3년이나 맡았던 적임자여서 선발한 것”이라며 노당선자를 의식한 인사가 아님을 강조해 해프닝은 일단락됐다. 그러나 과장 인사 하나에 언론이 이처럼 호들갑을 떤 후유증은 지금도 국세청을 감싸고 있다. 부상 동창회 한 간부는 이 문제를 ‘역차별’의 전조로 생각한다. 능력에 따른 발탁, 승진도 ‘노당선자의 후광’이란 꼬리가 따라붙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동창회 한 인사는 “금융기관 정기 승진을 앞둔 동창 후배가 ‘제발 부상 인맥 운운하는 기사가 안 나오게 신경 좀 써달라’고 읍소하더라”며 부상 동문들 사이에 팽배해 있는 역차별 위기의식을 설명했다.
부산상고 전경
1월 초 인수위에서 재벌그룹의 구조조정본부 폐지 발언이 터져나오자 재계와 언론은 곧바로 삼성그룹 이학수 사장을 주시했다. 삼성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을 맡은 점도 눈에 띄었지만 그가 노당선자의 부상 1년 선배(52회)로, 평소 밀접한 관계를 유지해왔다는 점이 관심을 불러일으킨 것. 재벌개혁에 나서려는 노당선자에 맞서 한국의 대표적인 그룹을 지켜야 하는 이사장의 서로 다른 입장은 아직도 재계와 언론의 관심사다.
지난 대선 때 드러내놓고 노무현 선거운동에 나섰던 재경 부산상고 동창회 이양한 회장. 동창회 업무와 관련 노당선자의 ‘채널’ 역을 맡고 있는 그는 주변인사들에게 ‘노당선자와 줄이 통하는 인물’로 잘못 알려져 이런저런 전화를 많이 받는다. “술을 사라”는 전화는 물론 기억에 없는 사람들이 전화를 걸어와 아는 체할 때도 있다. 그를 찾는 인사들은 민원 및 인사 등과 관련된 청탁 보따리를 풀어놓기 일쑤다. 공직사회에 있는 일부 동창들이 승진인사를 부탁하기도 한다고 한다. 그럴 경우 이회장이 이들에게 해주는 말은 한마디다.
“지난해 연말 노당선자를 만났다. 그때 노당선자가 이렇게 말하더라. 동문들이 고생한 줄은 안다. 그러나 동문이라고 중용하면 말썽이 생긴다. 익스큐즈(양해)해달라. 1년 정도면 자리를 잡을 수 있다. 그 후에 보자.”
노당선자의 캐릭터를 잘 알고 있는 부상 동창들은 이회장의 이런 설명에 수긍하는 편이다. 부상 동창회 홍경태 사무국장은 “원칙을 중시하는 노당선자의 캐릭터를 알고 있기 때문에 무리한 부탁을 하거나 민원을 제기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대선 후 부상 출신 몇몇 재계 인사들이 모여 “재계 인맥이 약한 노당선자의 어려움을 우리가 나서 풀어야 한다”는 입장을 조심스럽게 개진했다고 한다. 그 며칠 뒤인 2002년 12월26일 노당선자는 “인사 이권 청탁을 하다 걸리면 패가망신한다는 것을 보여주겠다”며 청탁문화와 연고, 정실주의 문화 근절을 천명했다. 그 후 부상 출신 인사들의 역할론은 자취를 감추었다고 한다.
부상하는 ‘부상’의 역동성은 정치권도 예외는 아니다. 정치권 부상의 대부는 신상우 전 국회의장(43회). 현재 부상 총동창회장직을 맡고 있는 그의 주변에는 부상 출신 정치지망생들이 대거 몰려들고 있다. 신 전 부의장은 “우리가 전면에 나서면 노당선자에게 부담을 준다”며 이들을 달랜다. 그러나 “내년 총선 때 부상 출신들이 발탁될 수도 있다”는 말도 잊지 않는다. 그는 국가정보원장 후보 물망에 올라 ‘부상시대의 개척자’란 얘기를 듣고 있다. 잊혀져가던 이기택 전 의원도 대선 막판 고교 후배인 노당선자에게 힘을 보태면서 재기의 발판을 마련했다는 평이다. 과거 이 전 의원 측근으로 인수위에서 활동중인 한 인사는 “내년 총선 때 어떤 방법으로든 재기하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부상 출신들은 노당선자가 내년 총선에서 대대적인 부산상륙작전을 감행할 것으로 보고 있다. 동창회 한 인사는 “이 작전의 주역을 동창회가 맡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부상의 현재 정치 인맥은 초라하기 짝이 없다. 부산시 17개 지역구 중 대다수가 경남고와 부산고 출신인 반면 부산상고 출신은 권태망 의원(59회) 한 사람뿐이다. 부상 출신 인사들은 2004년을 기점으로 부상을 부산 정치의 명가로 재탄생시킬 계획이다. 권의원의 한 측근은 “표면적인 움직임은 없지만 부상 동창회 등으로부터 권의원이 이런저런 얘기를 듣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정치 명가를 향한 부상의 움직임을 읽을 수 있는 단초라고 동창회 관계자는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