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작을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설렌다. 밀레와 로댕. 마치 화가와 조각가의 대명사처럼 여겨져 왔던 두 거장을 동시에 서울에서 만나게 된 것은 흔치 않은 행운이다. 매서운 겨울 바람마저 춥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그들을 찾아가는 길은 기뻤다.
언뜻 보면 거장의 작품도 여타 작가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첫눈에는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로댕의 조각을 처음 본 당신은 ‘애걔, 생각하는 사람이 겨우 이 정도야’ 하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서 이미 명작에 대한 기대가 커다랗게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거장의 솜씨에서는 깊은 향기가 우러난다. 범작들로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품이다. 이 맛을 어떻게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밀레의 여정
‘밀레의 여정’은 장 프랑수아 밀레(1814~1875)의 작품 80여점과 바르비종파, 밀레 전후 작가들의 작품 70여점이 함께 전시되는 대규모 기획전이다. 전시 순서는 밀레 이전의 회화 작품, 밀레의 초상화와 데생, 바르비종 시절의 농민미술, 그리고 밀레의 영향을 받은 작가들의 작품 순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 쉘부르, 파리, 바르비종 등 밀레가 살았던 프랑스 각처와 작품이 연결되어 있어 그림을 통해 그의 삶의 흔적을 쫓을 수 있다.
밀레의 작품들은 일견 평범해 보인다. 고전파의 꽉 짜여진 구성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세련된 구도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소박함 때문에 밀레의 그림은 아름답다.
이번 전시는 밀레가 분명 타고난 재능의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초창기에 그려진 초상화에서부터 그와 여타 작가들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다른 작가들이 고전주의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반면, 밀레의 인물들은 풍부한 표정과 자연스런 몸가짐, 정확하고 힘찬 데생으로 이미 독자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손과 무릎의 움직임 등을 꾸준히 연구한 데생 습작들을 통해 밀레의 인물들이 완성된 배경을 추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은 바르비종에서 태어난 작품들이다. 밀레는 파리를 ‘음산하고 무미건조한 곳’이라고 표현할 만큼 도시의 삭막함을 싫어했다. 그는 35세부터 타계하던 해인 61세까지 파리 근교 마을 바르비종에 머물며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을 그렸다. 투명하게 표현된 대기와 햇살, 고요히 다가오는 황혼의 순간, 항아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의 몸놀림, 넉넉하고 온화한 표정의 농부들.
밀레는 농민들을 동정하거나 감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엄격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농촌의 모습을 꾸밈없이 재현했다. 아기에게 밥을 먹이거나 오줌을 누이는 젊은 엄마의 모습에서는 그 사실성 때문에 절로 웃음이 난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바르비종 사람들의 삶의 순간순간이 거장의 애정 어린 붓끝에서 영원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났다.
비록 복사본을 통해서지만 밀레에게 큰 영향을 받았던 고흐의 작품과 밀레의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 유명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실은 밀레의 그림을 거의 모사한 작품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 밀레 이후의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는 로트레크나 시냐크 등의 소품을 만나는 재미가 각별하다.
밀레 작품의 대명사 같은 ‘만종’이나 ‘이삭 줍기’ 등이 전시되지 않은 아쉬움은 있지만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밀레라는 대화가의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은 바로 삶에 대한 정직과 진실이다(2003년 3월3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로댕 작품에 대해서는 이런 물음이 먼저 나올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로댕의 작품은 몇 개야? 전부 다 진짜야?”라고 말이다. 정답은 ‘작품당 12개까지 진짜다.’ 로댕은 죽기 전 자신의 모든 작품을 주조할 수 있는 권리를 프랑스 정부에 이양했다. 그리고 프랑스 정부는 작품당 12점까지 주조할 수 있다는 법률을 제정했다. 그 때문에 이번 ‘오귀스트 로댕: 위대한 손’에 등장하는 로댕의 작품 74점도, 그리고 서울의 로댕 갤러리에 있는 ‘지옥문’이나 ‘칼레의 시민’도 모두 진품으로 간주된다.
‘생각하는 사람’이나 ‘지옥문’의 경우, 이미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작품을 대하는 감흥이 덜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로댕전의 백미는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완성품보다는 로댕이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거쳤던 경로를 추적하는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칼레의 시민’을 위해 제작한 별도 작품 15점과 ‘칼레의 시민’이 함께 전시된다. 이처럼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로댕은 적잖은 공과 수고를 들였다. 때로는 그 수고가 지나쳐서 오히려 의뢰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881년 프랑스 문필가협회에서 발자크의 초상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로댕은 발자크의 정신세계를 느끼기 위해 다양한 습작을 제작하는가 하면, 발자크가 즐겨 입던 외투를 특별하게 제작해서 입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필가협회는 로댕이 이처럼 심혈을 기울인 발자크 상을 인수하기를 거부했다. 조각상에서 발자크의 예술세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오로지 문필가협회장인 에밀 졸라만이 로댕을 지지했다고 한다.
사실 서울 전시에 등장한 발자크 상을 보면 문필가협회원들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 위대한 작가 대신 로댕은 수도사의 외투 같은 옷을 걸친 살찐 노인을 거친 표면으로 재현해 놓았다. 로댕이 창조한 발자크는 영웅이 아닌 초라한 인간이다. 그것은 1876년에 제작한 ‘청동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고전조각에서 흔히 보는 멋들어진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이 청동상은 힘차고 완벽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 빼빼 말라 볼품없는 인간일 뿐이다. ‘청동시대’는 브뤼셀 살롱과 파리 살롱 모두에서 혹평을 받았다.
결국 로댕이 추구한 바는 명확하다. 그리스 조각이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신이 아닌, 욕망과 고뇌에 찬 나약한 인간. 그의 작품들에서 저절로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신의 숨결처럼 인간을 빚어낸 거장의 위대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2003년 2월2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언뜻 보면 거장의 작품도 여타 작가들과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첫눈에는 좀 실망스럽기도 하다. 로댕의 조각을 처음 본 당신은 ‘애걔, 생각하는 사람이 겨우 이 정도야’ 하고 중얼거릴지도 모른다. 마음속에서 이미 명작에 대한 기대가 커다랗게 부풀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면 볼수록 거장의 솜씨에서는 깊은 향기가 우러난다. 범작들로서는 감히 범접하지 못할 기품이다. 이 맛을 어떻게 몇 마디 말로 설명할 수 있으랴.
밀레의 여정
‘어머니와 아들’ ,패널에 유채, 1857년(왼쪽).‘털모자를 쓴 자화상’ ,갈색 종이에 목탄, 1847~48년.
밀레의 작품들은 일견 평범해 보인다. 고전파의 꽉 짜여진 구성도, 인상주의 화가들의 세련된 구도도 찾을 길이 없다. 그러나 그 소박함 때문에 밀레의 그림은 아름답다.
이번 전시는 밀레가 분명 타고난 재능의 화가였음을 보여준다. 초창기에 그려진 초상화에서부터 그와 여타 작가들의 차이는 확연히 드러난다. 다른 작가들이 고전주의의 늪에서 허우적대고 있는 반면, 밀레의 인물들은 풍부한 표정과 자연스런 몸가짐, 정확하고 힘찬 데생으로 이미 독자적인 경향을 보이기 시작한다. 손과 무릎의 움직임 등을 꾸준히 연구한 데생 습작들을 통해 밀레의 인물들이 완성된 배경을 추적하는 것도 흥미롭다.
물론 가장 인상적인 작품들은 바르비종에서 태어난 작품들이다. 밀레는 파리를 ‘음산하고 무미건조한 곳’이라고 표현할 만큼 도시의 삭막함을 싫어했다. 그는 35세부터 타계하던 해인 61세까지 파리 근교 마을 바르비종에 머물며 농촌의 풍경과 농민들을 그렸다. 투명하게 표현된 대기와 햇살, 고요히 다가오는 황혼의 순간, 항아리를 머리에 인 아낙네의 몸놀림, 넉넉하고 온화한 표정의 농부들.
밀레는 농민들을 동정하거나 감상적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엄격하다’는 말이 어울릴 만큼 농촌의 모습을 꾸밈없이 재현했다. 아기에게 밥을 먹이거나 오줌을 누이는 젊은 엄마의 모습에서는 그 사실성 때문에 절로 웃음이 난다. 지극히 평범한 인생을 살았을 바르비종 사람들의 삶의 순간순간이 거장의 애정 어린 붓끝에서 영원하게, 그리고 생생하게 살아났다.
비록 복사본을 통해서지만 밀레에게 큰 영향을 받았던 고흐의 작품과 밀레의 작품을 비교해보는 것도 흥미롭다. 그 유명한 고흐의 ‘별이 빛나는 밤에’가 실은 밀레의 그림을 거의 모사한 작품이라는 사실도 알 수 있다. 또 밀레 이후의 작가들의 작품 중에서는 로트레크나 시냐크 등의 소품을 만나는 재미가 각별하다.
밀레 작품의 대명사 같은 ‘만종’이나 ‘이삭 줍기’ 등이 전시되지 않은 아쉬움은 있지만 다른 작품들을 통해서도 충분히 밀레라는 대화가의 매력이 느껴진다. 그 매력은 바로 삶에 대한 정직과 진실이다(2003년 3월30일까지. 서울시립미술관).
‘도미니크 수도복을 입은 발자크’ 브론즈(왼쪽). ‘청동시대’ 브론즈.
‘생각하는 사람’이나 ‘지옥문’의 경우, 이미 국내에 많이 소개되었기 때문에 작품을 대하는 감흥이 덜할지도 모르겠다. 이번 로댕전의 백미는 ‘생각하는 사람’과 같은 완성품보다는 로댕이 한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거쳤던 경로를 추적하는 데에 있다. 예를 들면, ‘칼레의 시민’을 위해 제작한 별도 작품 15점과 ‘칼레의 시민’이 함께 전시된다. 이처럼 한 작품을 완성할 때마다 로댕은 적잖은 공과 수고를 들였다. 때로는 그 수고가 지나쳐서 오히려 의뢰인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1881년 프랑스 문필가협회에서 발자크의 초상 제작을 의뢰받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로댕은 발자크의 정신세계를 느끼기 위해 다양한 습작을 제작하는가 하면, 발자크가 즐겨 입던 외투를 특별하게 제작해서 입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문필가협회는 로댕이 이처럼 심혈을 기울인 발자크 상을 인수하기를 거부했다. 조각상에서 발자크의 예술세계가 느껴지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오로지 문필가협회장인 에밀 졸라만이 로댕을 지지했다고 한다.
사실 서울 전시에 등장한 발자크 상을 보면 문필가협회원들의 반응이 이해가 된다. 위대한 작가 대신 로댕은 수도사의 외투 같은 옷을 걸친 살찐 노인을 거친 표면으로 재현해 놓았다. 로댕이 창조한 발자크는 영웅이 아닌 초라한 인간이다. 그것은 1876년에 제작한 ‘청동시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리스 고전조각에서 흔히 보는 멋들어진 자세를 취하고 있으나 이 청동상은 힘차고 완벽한 신의 모습이 아니라 빼빼 말라 볼품없는 인간일 뿐이다. ‘청동시대’는 브뤼셀 살롱과 파리 살롱 모두에서 혹평을 받았다.
결국 로댕이 추구한 바는 명확하다. 그리스 조각이 보여주는 완전무결한 신이 아닌, 욕망과 고뇌에 찬 나약한 인간. 그의 작품들에서 저절로 내 자신의 모습이 떠오른다. 마치 신의 숨결처럼 인간을 빚어낸 거장의 위대함에 절로 머리가 숙여진다(2003년 2월26일까지.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