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궁진 문화관광부 장관에게 김대중 대통령은 ‘황소’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별명대로 남궁장관은 말없이 우직하게 맡은 일을 해내는 스타일이다. 그의 동교동 입문은 빠른 편은 아니다. 1985년 김대통령이 미국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귀국하면서 동교동 비서 생활을 시작했다. 남궁장관에게는 첫번째 정치 입문이었다.
뒤늦은 출발. 그것은 고등학교(중앙고) 때 4·19 시위를 주도한 열혈 청년이었으며,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인 남궁장관이 현실 정치에서 줄곧 후배보다 뒤지면서 ‘느리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였다. 남궁장관은 평민당 시절 국회의원들을 뒷바라지하는 당료생활을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4대 총선 때는 김대통령을 비난하며 탈당 소동을 빚은 이해찬 현 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관악에 공천통보까지 받았으나, 공천 발표 순간 당지도부가 돌연 이해찬 의원을 재공천하기로 방침을 선회함에 따라 낙마하고 겨우 전국구 예비후보 순번을 얻었다. 15대 때 경기 광명을 공천 받아 무난히 당선했으나, 99년 옷로비 사건 여파로 흐트러진 여권의 내부 전열 정비과정에서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2000년 16대 총선 출마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남궁장관보다 연배가 10년이나 아래인 이해찬 의원은 어느새 4선 중진의원으로 성장하는 등 많은 후배들이 남궁장관을 추월해 갔다. 그러나 남궁장관은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남궁장관이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 시절 밑에서 근무한 청와대 비서관 A씨는 “아무리 큰 말썽을 일으킨 사람에 대해서도 남궁장관은 절대 화내는 법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인사부터 건네는 것이 남궁장관의 스타일이다”고 말한다. 한 측근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하기보다는 큰 줄기를 잡고 유장하게 가는 스타일이어서 하는 일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손해를 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정치권에선 남궁장관의 그런 인간성과 고생담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의 문화부 장관 기용이 97년 당시 동교동 가신의 임명직 취임 배제 선언을 위반하는 것인데도, 야당이 이를 문제삼지 않고 넘어간 것은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남궁장관의 업무 스타일은 때로 소극적 무사안일로 비치기도 한다. 대통령 정무수석 시절 남궁장관은 당시 한광옥 비서실장과 박지원 정책기획수석비서관에게 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치인은 결국 대중적 이미지로 사는 존재라는 점에서 남궁장관이 향후 독자적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비판론을 극복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일각에선 줄곧 정치에만 몸담아 온 남궁장관을 문화관광부 장관에 기용한 것은 적절치 못한 인사라는 얘기도 나왔다. 문화적으로 보일 만한 경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궁장관과 사적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지적·문화적 소양이 보통 수준을 넘는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지금도 틈나는 대로 신앙간증을 다닐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언제 그렇게 유교·불교 등 타 종교를 망라하는 해박한 지식을 섭렵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언제 그렇게 정통하게 연구했는지 한번쯤은 놀라게 마련이다.
당내 궂은 일 도맡아 … 일각에선 ‘문화 문외한’ 우려도
남궁장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개봉감리교회 집사로, 올 봄에는 ‘성경에서 배우는 하느님의 정치’라는 책을 펴냈는데 책 내용에 성경 구절은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 유교의 덕목 등을 풍부하게 인용했다고 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와대 A비서관은 사족(蛇足) 하나를 덧붙였다. “민주당 출신 인사, 그 중에서도 본류라 할 수 있는 동교동계 사람 중에는 그 사람을 공직에 기용했을 때 국가에 손해가 될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 여권의 솔직한 현실이지만 남궁장관은 공직에 나서면 백 번이라도 국가에 도움이 될 분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
뒤늦은 출발. 그것은 고등학교(중앙고) 때 4·19 시위를 주도한 열혈 청년이었으며, 고려대 법대를 졸업한 ‘엘리트’인 남궁장관이 현실 정치에서 줄곧 후배보다 뒤지면서 ‘느리게’ 살 수밖에 없는 이유기도 하였다. 남궁장관은 평민당 시절 국회의원들을 뒷바라지하는 당료생활을 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14대 총선 때는 김대통령을 비난하며 탈당 소동을 빚은 이해찬 현 민주당 의원의 지역구인 서울 관악에 공천통보까지 받았으나, 공천 발표 순간 당지도부가 돌연 이해찬 의원을 재공천하기로 방침을 선회함에 따라 낙마하고 겨우 전국구 예비후보 순번을 얻었다. 15대 때 경기 광명을 공천 받아 무난히 당선했으나, 99년 옷로비 사건 여파로 흐트러진 여권의 내부 전열 정비과정에서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으로 차출되는 바람에 2000년 16대 총선 출마는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남궁장관보다 연배가 10년이나 아래인 이해찬 의원은 어느새 4선 중진의원으로 성장하는 등 많은 후배들이 남궁장관을 추월해 갔다. 그러나 남궁장관은 전혀 싫은 내색을 하지 않는다.
남궁장관이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 시절 밑에서 근무한 청와대 비서관 A씨는 “아무리 큰 말썽을 일으킨 사람에 대해서도 남궁장관은 절대 화내는 법이 없다. 그러기는커녕 ‘얼마나 고생이 많으냐’며 인사부터 건네는 것이 남궁장관의 스타일이다”고 말한다. 한 측근은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승부하기보다는 큰 줄기를 잡고 유장하게 가는 스타일이어서 하는 일이 잘 눈에 띄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로 인해 손해를 보기도 한다”고 설명한다.
정치권에선 남궁장관의 그런 인간성과 고생담을 대체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그의 문화부 장관 기용이 97년 당시 동교동 가신의 임명직 취임 배제 선언을 위반하는 것인데도, 야당이 이를 문제삼지 않고 넘어간 것은 그런 배경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남궁장관의 업무 스타일은 때로 소극적 무사안일로 비치기도 한다. 대통령 정무수석 시절 남궁장관은 당시 한광옥 비서실장과 박지원 정책기획수석비서관에게 밀려 제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정치인은 결국 대중적 이미지로 사는 존재라는 점에서 남궁장관이 향후 독자적 대중 정치인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이 같은 비판론을 극복하지 않으면 곤란하다는 지적도 적지 않다.
일각에선 줄곧 정치에만 몸담아 온 남궁장관을 문화관광부 장관에 기용한 것은 적절치 못한 인사라는 얘기도 나왔다. 문화적으로 보일 만한 경력이 없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남궁장관과 사적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그의 지적·문화적 소양이 보통 수준을 넘는다는 사실을 금방 눈치챌 수 있다. 지금도 틈나는 대로 신앙간증을 다닐 정도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가 언제 그렇게 유교·불교 등 타 종교를 망라하는 해박한 지식을 섭렵했으며,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해 언제 그렇게 정통하게 연구했는지 한번쯤은 놀라게 마련이다.
당내 궂은 일 도맡아 … 일각에선 ‘문화 문외한’ 우려도
남궁장관은 현재 경기도 광명시에 있는 개봉감리교회 집사로, 올 봄에는 ‘성경에서 배우는 하느님의 정치’라는 책을 펴냈는데 책 내용에 성경 구절은 물론 부처님의 가르침, 유교의 덕목 등을 풍부하게 인용했다고 해 한동안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청와대 A비서관은 사족(蛇足) 하나를 덧붙였다. “민주당 출신 인사, 그 중에서도 본류라 할 수 있는 동교동계 사람 중에는 그 사람을 공직에 기용했을 때 국가에 손해가 될 사람도 적지 않은 것이 여권의 솔직한 현실이지만 남궁장관은 공직에 나서면 백 번이라도 국가에 도움이 될 분이라는 점만은 확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