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부터 236년 전인 1765년, 조선 북학파의 선구자인 담헌 홍대용이 연행(燕行: 청나라 시절 북경은 연경이었다)이라 불리는 북경 여행길에 올랐다.
당시 청나라는 건륭 황제 치하에서 야만스러운 여진족 이미지를 벗고 ‘건륭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영조 40년 치하에서 조선 고유의 문화를 창달하며 ‘진경시대’를 꽃피웠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는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배타적인 관계에 있었다.
홍대용이 북경으로 향하면서 “비록 더러운 오랑캐라 하더라도 중국에 웅거하여 1백여 년이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번 볼 만하지 않겠는가? 만일 ‘오랑캐의 땅은 군자가 밟을 바 아니요, 호복을 한 인물과는 함께 말을 못하리라’ 한다면 이것은 편협한 소견이며, 인자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고 한 데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청나라를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 실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양국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 무렵 조선은 해마다 두 차례 이상 북경에 연행사절을 파견했는데 매번 사절 규모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 연행은 조선이 외국과 지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조선시대 선비에게는 단기 해외연수나 다름없었다.
홍대용 역시 중국 여행을 동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30년 평생 소원이던 중국여행에 대비해 역관에게 한어를 배우고 그 나라 학문의 진보를 충실히 점검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홍대용은 6개월의 중국 여행에서 중국과 서양의 문물에 접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명의 친구(엄성, 육비, 반정균)를 얻었다. 그리고 한글로 2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행문 ‘을병연행록’을 남겼다.
이 여행기의 장점은 딱딱한 학술보고가 아닌,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심양의 한 부잣집에 들렀을 때 일화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학자적 호기심과 사대부의 체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까지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잠시 그 장면을 재현해 보자.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 청심환이 인기여서 부잣집 아낙도 홍대용에게 청심환을 청했다.
“청심환은 진짜를 하나 내주겠지만, 나 또한 청할 일이 있어도 불안해 못하겠구나.”
“무슨 일인지요? 말씀하세요.”
“그대 머리에 꽂은 수식과 상투의 제도를 보고 싶은데, 남녀가 다른 까닭에 감히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지 못하니 안타깝구나.”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아낙은 자식을 남편에게 맡기고 머리에서 여러 가지 비녀를 다 빼어 보이고, 두 손으로 앞을 짚고 머리를 앞으로 숙여 좌우로 돌리며 보여주었다. 홍대용이 아낙의 머리 모양을 어찌나 꼼꼼히 살폈던지 ‘을병연행록’에는 마치 사진을 보는 듯 묘사해 놓았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먼저 중국의 저잣거리와 여염집 등을 돌아보며 중국의 전통예법과 의식주, 건축양식 등 문화와 풍속을 관찰하고 기록한 부분과 북경의 천주당에서 서양문물에 접하는 부분이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서양건축과 화법을 관찰하고 본당에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의 동작 원리를 살펴보기도 했다. 여행기의 세 번째 부분은 청나라 선비들과의 교우에 할애했다. 그는 두 달이 못 되는 기간 이들과 일곱 번 만났을 뿐이지만 평생 동지를 얻었다. 이들의 만남은 자손 삼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을병연행록’은 18세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당대 지식인의 문명 체험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혼천의’를 만든 뛰어난 과학자이며 ‘의산문답’을 남긴 사상가이고, ‘주해수용’을 저술한 수학자, 당대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 등 백과전서적 실학자 홍대용의 생전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다. 홍대용은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홍대용 지음/ 김태준·박성순 옮김/ 돌베개 펴냄/ 504쪽/ 1만6000원
당시 청나라는 건륭 황제 치하에서 야만스러운 여진족 이미지를 벗고 ‘건륭문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었다. 조선 역시 영조 40년 치하에서 조선 고유의 문화를 창달하며 ‘진경시대’를 꽃피웠다. 그러나 조선과 청나라는 17세기 정묘호란과 병자호란 등 두 차례 전쟁을 치르면서 배타적인 관계에 있었다.
홍대용이 북경으로 향하면서 “비록 더러운 오랑캐라 하더라도 중국에 웅거하여 1백여 년이 태평을 누리니, 그 규모와 기상이 어찌 한번 볼 만하지 않겠는가? 만일 ‘오랑캐의 땅은 군자가 밟을 바 아니요, 호복을 한 인물과는 함께 말을 못하리라’ 한다면 이것은 편협한 소견이며, 인자한 사람의 마음이 아니다”고 한 데서 당시 조선 사대부들이 청나라를 어떻게 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18세기 중엽 실학자들에 의해 비로소 양국간 교류가 활발해졌다.
그 무렵 조선은 해마다 두 차례 이상 북경에 연행사절을 파견했는데 매번 사절 규모가 500여 명에 이르렀다. 연행은 조선이 외국과 지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으며, 조선시대 선비에게는 단기 해외연수나 다름없었다.
홍대용 역시 중국 여행을 동경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30년 평생 소원이던 중국여행에 대비해 역관에게 한어를 배우고 그 나라 학문의 진보를 충실히 점검하는 등 철저하게 준비했다. 홍대용은 6개월의 중국 여행에서 중국과 서양의 문물에 접하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세 명의 친구(엄성, 육비, 반정균)를 얻었다. 그리고 한글로 2600쪽에 이르는 방대한 기행문 ‘을병연행록’을 남겼다.
이 여행기의 장점은 딱딱한 학술보고가 아닌,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가 심양의 한 부잣집에 들렀을 때 일화는 사소한 것 하나라도 놓치지 않으려는 학자적 호기심과 사대부의 체면 사이에서 갈등하는 모습까지 솔직하게 그려져 있다. 잠시 그 장면을 재현해 보자. 당시 중국에서는 조선 청심환이 인기여서 부잣집 아낙도 홍대용에게 청심환을 청했다.
“청심환은 진짜를 하나 내주겠지만, 나 또한 청할 일이 있어도 불안해 못하겠구나.”
“무슨 일인지요? 말씀하세요.”
“그대 머리에 꽂은 수식과 상투의 제도를 보고 싶은데, 남녀가 다른 까닭에 감히 가까이 가서 자세히 보지 못하니 안타깝구나.”
“무엇이 어렵겠습니까?”
아낙은 자식을 남편에게 맡기고 머리에서 여러 가지 비녀를 다 빼어 보이고, 두 손으로 앞을 짚고 머리를 앞으로 숙여 좌우로 돌리며 보여주었다. 홍대용이 아낙의 머리 모양을 어찌나 꼼꼼히 살폈던지 ‘을병연행록’에는 마치 사진을 보는 듯 묘사해 놓았다.
이 책은 크게 3부로 나뉜다. 먼저 중국의 저잣거리와 여염집 등을 돌아보며 중국의 전통예법과 의식주, 건축양식 등 문화와 풍속을 관찰하고 기록한 부분과 북경의 천주당에서 서양문물에 접하는 부분이다. 홍대용은 천주당에서 서양건축과 화법을 관찰하고 본당에 설치한 파이프 오르간의 동작 원리를 살펴보기도 했다. 여행기의 세 번째 부분은 청나라 선비들과의 교우에 할애했다. 그는 두 달이 못 되는 기간 이들과 일곱 번 만났을 뿐이지만 평생 동지를 얻었다. 이들의 만남은 자손 삼대로 이어졌다고 한다.
‘을병연행록’은 18세기 우리 말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당대 지식인의 문명 체험을 살필 수 있는 중요한 자료다. ‘혼천의’를 만든 뛰어난 과학자이며 ‘의산문답’을 남긴 사상가이고, ‘주해수용’을 저술한 수학자, 당대 최고의 거문고 연주자 등 백과전서적 실학자 홍대용의 생전 모습이 마치 눈에 보이는 듯하다. 홍대용은 서양의 레오나르도 다 빈치만큼이나 흥미로운 인물이다.
◇ 산해관 잠긴 문을 한 손으로 밀치도다/ 홍대용 지음/ 김태준·박성순 옮김/ 돌베개 펴냄/ 504쪽/ 1만6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