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에 메이저리그와 마이너리그가 있는 것처럼 책에도 대중(大衆)독자를 거느린 메이저 분야가 있는가 하면 소수의 독자에게 아낌 없는 사랑을 받는 마이너 분야가 있게 마련이다. 스포츠에서는 메이저와 마이너를 가르는 잣대가 어디까지나 실력 차이겠지만, 책에서는 독자의 수와 텍스트의 질이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반대인 경우가 많다. 자신의 문화적 안목이 시시하지 않음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라도 베스트셀러를 읽지 않는 사람이 생기는 이유기도 하다.
그러나 사실 베스트셀러야말로 소수의 선택 받은 책들이다. 1년에 2∼3만 종씩 쏟아지는 신간 중 베스트셀러는 손에 꼽을 정도고 대부분의 책들이 애초부터 마이너리그의 운명을 타고 난다. 책이 태생부터 마이너리그적 운명을 지녔다고는 해도 아까운 책들이 너무 많다. 눈 밝은 독자에게 호응을 얻지도 못했고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상찬도 못 들어보고 당연히 판매성적도 시원치 않지만 눈여겨볼 만한 책이 분명 있다. 책을 만든 사람이야 그런 숨어 있는 책을 대하는 일이 고통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새로운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런 보물을 내가 알아 봤다 싶기 때문이고 나의 문화적 안목에 대한 자기만족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이자 ‘마니아‘들을 위한 책
한 권의 책이 조명 받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부분 비주류적 관심을 담은 책이 그렇다.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당연히 자본의 논리로 더 빨리 변화해 내 몸값을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주류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가 그런 책들이다. 한 평론가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한 적이 있다. “개인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책’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같은 저자가 쓴 ‘1분 혁명’(동아일보사)이 훨씬 좋은 책이라는 말과 함께.
만약 당신이 세상에 발맞춰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의 속내를 알고 싶고 조롱하고 싶다면 당연히 비주류에 속한다. 비주류의 입맛에 딱 맞는 책이 있다. 우디 앨런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황금가지)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수다스러운 유대계 뉴욕인이 풀어낸 시니컬한 유머와 풍자정신으로 가득하다. 뉴욕이라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소란스런 소동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책과 가장 어울리는 독자는 사는 게 지루한 사람, 회사 가기 싫은 사람, 일하기 싫은 사람이다. 그들에게만 포복절도할 웃음을 선사한다.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의 모델에 대한 절대적 추종이 대세인 지금 미국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 또한 ‘좌파적’이다. 이진의 ‘나는 미국이 딱 절반만 좋다’(북앤월드)는 경쾌한 분석과 사례를 통해 미국 사회를 양분하는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지배세력과 그들이 낳은 문화적·사회적 전통을 파헤친다.
팬터지 소설이야 이제 문학의 주류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얼음과 불의 노래’(조지 R.R.마틴, 은행나무)는 팬터지 소설의 마이너다. 국내에서 인기 높은 팬터지 소설들이 대체로 무협 팬터지 계열이어서 영국 특유의 느린 진행과 고풍스러운 문체로 진행하며 서사적 스토리텔링과 무게감을 간직한 이 소설은 당연히 일부 마니아들의 몫이다.
올 여름 어디도 가지 않고 꼭 처박혀 책을 읽겠다는 사람에게 조지프 어메이토의 ‘먼지’(이소)가 딱 맞을 것이다. 문화사 연구자인 저자는 먼지를 통해 ‘작은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역사’를 더듬는다. 솔직히 심심풀이로 보기에는 어렵고, 정색하고 보기엔 흥미로운 책이지만 철학·문학·역사를 넘나드는 지적 자극이 충분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지배이념 때문에 독자에게 낯선 책도 있다. 죽음이나 시한부 인생을 다룬 책이 대표적이다. 성공이 최대 목표인 대부분의 국내 독자에게 죽음이나 병마를 떠올린다는 것은 이미 실패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낸 사람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당신은 가고 나는 남았다’(얼 그롤언, 마음산책)는 텍스트의 질을 떠나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독자의 관심권 밖에 머물겠지만 차분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남성 독자에게 외면당할 각오를 하고 고른 책이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이프)다. 독일의 평범한 여성들이 털어놓는 삶과 섹스 이야기에 “바로 내 이야기야”라며 무릎을 쳤다는 책이다. 여성들만 보기에는 아깝다.
1970∼80년대를 풍미한 문사철 계열의 책들도 이제는 소수의 독자만 찾는 분야가 되었다. 도올의 인기에 힘입어 주목 받은 몇몇 동양철학 관련서를 빼놓고는 도무지 출판시장에서 볼 낯이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독재정권하에서는 역사를 안다는 것,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대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사라지며 불합리한 사회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수단으로서의 시나 인문서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허망함을 드러낸 유하의 ‘천일馬화’(문학과지성사)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독자에게 받았던 열광적 지지와 관심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소리소문 없이 잊혔다. 그러나 침묵과 수다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그래서 말놀이와 삶에 대한 깊은 서정적 침묵을 동시에 만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만족할 것이다.
만약 휴가지에서 읽을 한 권의 시집을 꼽으라면 장석남의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이 떠오른다. 30대 독자라면 20대에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집’을 읽으며 경험한 통증을 떠올릴 것이다.
사재기 열풍이 지나간 출판시장에서는 거품이 빠지면서 순위 변동이 많았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황석영의 장편 ‘손님’이 송인서적 베스트셀러 1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오랜 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가장 황석영다운 작품이라는 평가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들이 ‘손님’과 같은 행운을 얻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한창훈의 소설집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문학동네)이라든가, 박범신의 ‘외등’(이룸), 한승원의 ‘멍텅구리배’(문이당), 복거일의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문학과지성사) 등 올여름 독파해야 할 소설목록은 충분하다.
품격있는 실용서를 찾아서
독자의 관심이 이렇듯 문사철 중심의 교양서에서 이탈하였지만 실용서의 경우는 본격 비평과 소개가 드물어 옥석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무질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독특한 관점을 지닌 실용서가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경우도 많다.
DIY 문화는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가족 구성원과 함께 내 집을 고치고 만드는 DIY 문화를 정착하려면 무엇보다 아버지들이 가정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뚝딱뚝딱DIY’(최정현·하영권, 미래M&B)는 너무 일찍 나온 책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가족 사이의 애정을 돈독하게 하는 새로운 문화적 제안이지만 아직 우리의 문화적 토대가 형성되지 못해 묻힌 책이 되고 말았다. 무조건 내 아이에게 영어공부를 시키기보다는 놀이처럼 영어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꼬마영어 그림책’(전2세트 6권, 서남희, 한울림)은 부모들이 더 좋아할 만한 영어교육서다.
그 밖에 임인학이 직접 쓰고 찍은 ‘한국의 사계여행’(전4권,창해)은 단지 실용서로 넣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저자가 꼭 10년 동안 전국을 쏘다니며 모은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한 곳을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씩 들러 그는 놓친 것들을 또 찍고 기록했다. 이 책은 적어도 올 여름 어디로 갈까 헤매지 않게 해준다. 읽다 보면 어느새 올 가을과 겨울 여행지가 떠오를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록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은 직접 자신만의 숨어 있는 책 목록을 만들어 보기 바란다.
그러나 사실 베스트셀러야말로 소수의 선택 받은 책들이다. 1년에 2∼3만 종씩 쏟아지는 신간 중 베스트셀러는 손에 꼽을 정도고 대부분의 책들이 애초부터 마이너리그의 운명을 타고 난다. 책이 태생부터 마이너리그적 운명을 지녔다고는 해도 아까운 책들이 너무 많다. 눈 밝은 독자에게 호응을 얻지도 못했고 오피니언 리더들에게 좋은 책이라는 상찬도 못 들어보고 당연히 판매성적도 시원치 않지만 눈여겨볼 만한 책이 분명 있다. 책을 만든 사람이야 그런 숨어 있는 책을 대하는 일이 고통이겠지만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새로운 독서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런 보물을 내가 알아 봤다 싶기 때문이고 나의 문화적 안목에 대한 자기만족을 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마이너‘이자 ‘마니아‘들을 위한 책
한 권의 책이 조명 받지 못한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대부분 비주류적 관심을 담은 책이 그렇다.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당연히 자본의 논리로 더 빨리 변화해 내 몸값을 올리는 데 도움을 주는 책들이 주류다. ‘부자 아빠 가난한 아빠’(로버트 기요사키 외)나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스펜서 존슨)가 그런 책들이다. 한 평론가가 ‘누가 내 치즈를 옮겼을까’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한 적이 있다. “개인에게만 변화를 요구하는 철저히 자본주의적인 책’이라는 것이다. 차라리 널리 알려지진 않았지만 같은 저자가 쓴 ‘1분 혁명’(동아일보사)이 훨씬 좋은 책이라는 말과 함께.
만약 당신이 세상에 발맞춰 변할 생각은 하지 않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의 속내를 알고 싶고 조롱하고 싶다면 당연히 비주류에 속한다. 비주류의 입맛에 딱 맞는 책이 있다. 우디 앨런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쓰레기 같은 세상’(황금가지)이 바로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수다스러운 유대계 뉴욕인이 풀어낸 시니컬한 유머와 풍자정신으로 가득하다. 뉴욕이라는 문화적 차이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저 소란스런 소동으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책과 가장 어울리는 독자는 사는 게 지루한 사람, 회사 가기 싫은 사람, 일하기 싫은 사람이다. 그들에게만 포복절도할 웃음을 선사한다.
미국식 세계 자본주의의 모델에 대한 절대적 추종이 대세인 지금 미국의 속내를 들여다보고 싶다는 생각 또한 ‘좌파적’이다. 이진의 ‘나는 미국이 딱 절반만 좋다’(북앤월드)는 경쾌한 분석과 사례를 통해 미국 사회를 양분하는 공화당과 민주당이라는 두 개의 지배세력과 그들이 낳은 문화적·사회적 전통을 파헤친다.
팬터지 소설이야 이제 문학의 주류가 아니냐고 하겠지만 ‘얼음과 불의 노래’(조지 R.R.마틴, 은행나무)는 팬터지 소설의 마이너다. 국내에서 인기 높은 팬터지 소설들이 대체로 무협 팬터지 계열이어서 영국 특유의 느린 진행과 고풍스러운 문체로 진행하며 서사적 스토리텔링과 무게감을 간직한 이 소설은 당연히 일부 마니아들의 몫이다.
올 여름 어디도 가지 않고 꼭 처박혀 책을 읽겠다는 사람에게 조지프 어메이토의 ‘먼지’(이소)가 딱 맞을 것이다. 문화사 연구자인 저자는 먼지를 통해 ‘작은 것 그리고 보이지 않는 것의 역사’를 더듬는다. 솔직히 심심풀이로 보기에는 어렵고, 정색하고 보기엔 흥미로운 책이지만 철학·문학·역사를 넘나드는 지적 자극이 충분하다.
사회를 지배하는 문화적 지배이념 때문에 독자에게 낯선 책도 있다. 죽음이나 시한부 인생을 다룬 책이 대표적이다. 성공이 최대 목표인 대부분의 국내 독자에게 죽음이나 병마를 떠올린다는 것은 이미 실패를 의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을 저세상으로 보낸 사람의 아픈 마음을 어루만지는 ‘당신은 가고 나는 남았다’(얼 그롤언, 마음산책)는 텍스트의 질을 떠나 심리적 거부감 때문에 독자의 관심권 밖에 머물겠지만 차분한 감동을 맛볼 수 있다.
남성 독자에게 외면당할 각오를 하고 고른 책이 알리스 슈바르처의 ‘아주 작은 차이’(이프)다. 독일의 평범한 여성들이 털어놓는 삶과 섹스 이야기에 “바로 내 이야기야”라며 무릎을 쳤다는 책이다. 여성들만 보기에는 아깝다.
1970∼80년대를 풍미한 문사철 계열의 책들도 이제는 소수의 독자만 찾는 분야가 되었다. 도올의 인기에 힘입어 주목 받은 몇몇 동양철학 관련서를 빼놓고는 도무지 출판시장에서 볼 낯이 없는 책들이 대부분이다. 독재정권하에서는 역사를 안다는 것, 시를 읽는다는 것은 시대의 부조리를 인식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데올로기의 대립이 사라지며 불합리한 사회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수단으로서의 시나 인문서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자본주의적 욕망의 허망함을 드러낸 유하의 ‘천일馬화’(문학과지성사)는 ‘바람 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가 독자에게 받았던 열광적 지지와 관심을 생각할 때 격세지감이 들 정도로 소리소문 없이 잊혔다. 그러나 침묵과 수다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할 줄 아는, 그래서 말놀이와 삶에 대한 깊은 서정적 침묵을 동시에 만나고 싶은 독자가 있다면 만족할 것이다.
만약 휴가지에서 읽을 한 권의 시집을 꼽으라면 장석남의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창작과비평사)이 떠오른다. 30대 독자라면 20대에 허수경의 ‘혼자 가는 먼집’을 읽으며 경험한 통증을 떠올릴 것이다.
사재기 열풍이 지나간 출판시장에서는 거품이 빠지면서 순위 변동이 많았다. 그 중 눈에 띄는 것이 황석영의 장편 ‘손님’이 송인서적 베스트셀러 1위로 뛰어오른 것이다. 오랜 만에 소설다운 소설을 만났다는 반가움과 가장 황석영다운 작품이라는 평가가 일치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많은 소설들이 ‘손님’과 같은 행운을 얻지 못하고 묻혀버렸다. 한창훈의 소설집 ‘세상의 끝으로 간 사람’(문학동네)이라든가, 박범신의 ‘외등’(이룸), 한승원의 ‘멍텅구리배’(문이당), 복거일의 ‘마법성의 수호자, 나의 끼끗한 들깨’(문학과지성사) 등 올여름 독파해야 할 소설목록은 충분하다.
품격있는 실용서를 찾아서
독자의 관심이 이렇듯 문사철 중심의 교양서에서 이탈하였지만 실용서의 경우는 본격 비평과 소개가 드물어 옥석을 가리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 무질서한 정보의 나열이 아닌 독특한 관점을 지닌 실용서가 널리 알려지지 못한 경우도 많다.
DIY 문화는 아직 우리에게 낯설다. 가족 구성원과 함께 내 집을 고치고 만드는 DIY 문화를 정착하려면 무엇보다 아버지들이 가정으로 돌아와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뚝딱뚝딱DIY’(최정현·하영권, 미래M&B)는 너무 일찍 나온 책인지도 모른다. 이 책은 가족 사이의 애정을 돈독하게 하는 새로운 문화적 제안이지만 아직 우리의 문화적 토대가 형성되지 못해 묻힌 책이 되고 말았다. 무조건 내 아이에게 영어공부를 시키기보다는 놀이처럼 영어와 친해질 수 있도록 돕는 ‘꼬마영어 그림책’(전2세트 6권, 서남희, 한울림)은 부모들이 더 좋아할 만한 영어교육서다.
그 밖에 임인학이 직접 쓰고 찍은 ‘한국의 사계여행’(전4권,창해)은 단지 실용서로 넣기에는 아쉬움이 있다. 저자가 꼭 10년 동안 전국을 쏘다니며 모은 기록들이기 때문이다. 한 곳을 두세 번, 많게는 대여섯 번씩 들러 그는 놓친 것들을 또 찍고 기록했다. 이 책은 적어도 올 여름 어디로 갈까 헤매지 않게 해준다. 읽다 보면 어느새 올 가을과 겨울 여행지가 떠오를 것이다.
지금까지의 목록이 전혀 마음에 들지 않는 분들은 직접 자신만의 숨어 있는 책 목록을 만들어 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