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 강남구 A약국 약사 김모씨(47)는 요즘 밤잠을 설치는 속앓이를 하고 있다. 약국 안에 진열된 2000여 품목의 약품들 중 800여 품목이 아예 봉지를 뜯지도 못한 채 수개월째 자리만 차지하고 있기 때문. 지난해 상반기 의약분업에 대비해 품목을 3배 가량 늘리고, 의사들의 처방전을 기다렸지만 유독 특정 약품들에만 처방이 몰린 까닭이다.
한두 알 나가고 판매가 뚝 끊어져 버린 약품들까지 합하면 거의 절반 가량의 약품이 ‘사장(死藏) 의약품’이 되어 버린 것. 김씨는 반품을 받아주지 않는 제약업체와 언성을 높여보기도 했지만 ‘특단’의 돌파구가 없다면 수천만원의 약품 구입비용만 날릴 판이다.
준비 안 된 의약분업은 이렇게 의약품의 낭비를 부추기고, 건강보험의 재정을 갉아먹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의약분업 시작 9개월이 지난 지금, 약국에는 의사들에게 버림받은 의약품들이 먼지를 덮어쓴 채 쌓여가고 있다. 많게는 진열 의약품의 40%, 적게는 20~30%가 사장 의약품들이다.
정부와 약사들은 의약분업 이후 의사들이 진품 고가약 처방에 너도나도 나서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저가 카피약은 약효가 ‘동등’하지만 특별한 로비(?)가 있어 보이는 특정 약품들만이 팔려 나갈 뿐 나머지는 몇 달이 지나가도 처방전에 오르는 일이 없다는 것. 의약분업 이전 약값의 마진이 크고, 약품 리베이트의 대상이 되는 관계로 카피약이 의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난 2월 통사정을 해 꽤 많은 의약품을 반품했지만 아직도 900여 품목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시 성북구에서 대형 동네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문모씨(50)는 사장 의약품의 확산은 곧 의약분업 체제의 붕괴를 뜻한다고 경고한다. 그는 “의사들의 처방약이 일관성 없이 달마다 바뀌는 것을 그대로 놔둘 경우 대부분의 약국이 (병원이나 의사들과의) 담합약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처방전은 적게 오고, 의약품은 내버려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감내할 약사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현상은 ‘재고 의약품 0%’의 담합약국을 제외한 동네약국 전반의 문제. 정부나 대한약사회 전체 차원의 조사는 없었지만 전국적으로 수천억원이 넘는 의약품이 사장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대구시 약사회가 지난 3월 대구지역 227개 약국들이 반송 의뢰한 약품들을 조사한 결과, 20억원이 훨씬 넘는 금액의 약품들이 교환이나 반품대상으로 올라왔다. 대구시 약사회 석광철 홍보이사는 “대구지역 전체 약국이 1000여 곳이 넘기 때문에 약사회 전체 사장 의약품은 1백억원을 훨씬 넘을 것이고, 이를 전국적으로 추산하면 수천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네약국들의 재고 의약품 누적이 계속되자 각 시-도 약사회는 사장 의약품의 집단 반환에 나서는 한편, 인터넷 홈페이지에 ‘교환품 센터’를 개설해 재고 의약품의 소진에 힘쓰지만, 거의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워낙 종류가 많은데다 대부분이 처방전이 잘 나오지 않는 카피약이기 때문이다.
사실 동네약국의 이런 ‘의약품 대란’은 의약분업 이전부터 정부가 주도하던 지역협력위원회 제도가 사실상 무산되면서 일찍이 예고된 일이었다. 지역협력위원회는 각 기초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의-약-정-시민단체가 참여해 상용의약품 목록을 정하고, 의사가 다빈도 처방약을 바꿀 경우 이들간의 협의를 거치도록 한 제도.
정부는 의약품의 효율적 분배와 의사들의 처방 리베이트 차단을 위해 위원회 설치를 의사단체와 약사단체에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위원회 제도는 결국 ‘처방권은 의사 고유의 권한’이라는 의사들의 주장에 밀렸고, 의료대란 와중이던 지난해 11월 약사법 개정안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의사단체나 종합병원이 일방적으로 건네주는 상용 의약품 목록은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바뀌기 일쑤이거나 실제와 다른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네약국들로 하여금 실제 상용 다빈도 의약품 600~700여 종 외에 1000여 종 이상의 의약품을 추가로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동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약사들은 지역협력위원회 구성과 관계없이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 관행만 수그러져도 의약품 재고는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서울시 강동구 B약국 이모약사(35)는 “오리지널약과 카피약은 같은 수입원료를 써서 만든 제품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약효 동등성 시험을 거친 제품인데도, 값 차이가 무려 10배 이상 나는 것도 있다”며 “고가약 처방을 계속하면 환자 본인 부담금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건강보험 재정만 축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건강심사평가원의 자료는 의약분업 이후 고가약 처방의 증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약분업 이전인 지난해 5월, 외래 약품비 중 고가 약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2.9%였으나 의약분업 이후인 11월에는 무려 62.2%로 증가한 것. 이로 말미암아 추가로 소요된 보험재정만 1080억원에 이르렀다. 약제비뿐만 아니라 고가약의 투여 횟수도 의약분업 이전 하루 18.6회에서 26.7회로 43.4%나 늘었다.
고가약이란 동일한 성분-함량-제형을 가진 약품 그룹 중 가격이 가장 비싼 약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동일성분 약품 그룹에 속하는 약품이 적게는 7~8개, 많게는 100여 개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 의존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의약분업 이후 이토록 고가 오리지널약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한의사협회는 이를 의약분업과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 실시로 인해 약품에 대한 의사들의 경제적 욕구가 사라진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의협의 한 관계자는 “초기에는 ‘의약분업 한번 망해봐라’는 식의 충동적 처방이 많았으나 이후에는 더 이상 약품 마진이 없는 상태에서 좀더 좋은 약을 써보자는 의사들의 충정이 반영된 것”이라며 “카피약 중 대부분은 약효 동등성을 거쳤을 뿐 인체를 대상으로 한 생물학적 동등성을 거치지 않은 약이 많기 때문에 믿고 처방할 의약품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또 의약분업 이후 처방전을 공개함에 따라 ‘고가약=좋은 약’ 이라는 의식이 환자들에게 퍼져 있어 카피약을 처방하면 나쁜 의사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의사들이 고가약 처방에 의존하는 한 이유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석균 정책실장은 “오리지널약이 카피약보다는 약품의 질이 더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실제 인체에 투여하였을 때 오리지널약이 카피약보다 더 약효가 좋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즉 인체를 대상으로 한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의 경우 약효의 동등 정도가 80%가 넘으면 인체에 대한 효력은 똑같다는 것. 따라서 80%보다 100%가 더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문제는 또 있다.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이 건강보험재정 파탄의 한 이유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환자 본인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동일성분의 약품 그룹 중 최저가약을 ‘기준 약가’로 정해 그 보다 더 비싼 약을 처방할 경우, 환자-의사-약사가 똑같이 기준 약가 이상의 부담을 나누게 되어 있다. 또 미국 몇몇 주의 경우 고가약을 처방할 경우 반드시 환자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이 건강보험 재정 파탄의 한 원인으로 떠오르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4월13일 부리나케 “동일성분의 약품 중 최저가약의 2배까지만 보험급여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환자 본인부담으로 돌리겠다”면서 ‘기준약가제’에 대한 방침을 언론에 흘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건강보험의 주인인 국민에게 약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한번 검토중인 것을 신문들이 잘못 쓴 것입니다.” 복지부 보험급여과의 한 담당자는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한두 알 나가고 판매가 뚝 끊어져 버린 약품들까지 합하면 거의 절반 가량의 약품이 ‘사장(死藏) 의약품’이 되어 버린 것. 김씨는 반품을 받아주지 않는 제약업체와 언성을 높여보기도 했지만 ‘특단’의 돌파구가 없다면 수천만원의 약품 구입비용만 날릴 판이다.
준비 안 된 의약분업은 이렇게 의약품의 낭비를 부추기고, 건강보험의 재정을 갉아먹는 또 다른 부작용을 낳았다. 의약분업 시작 9개월이 지난 지금, 약국에는 의사들에게 버림받은 의약품들이 먼지를 덮어쓴 채 쌓여가고 있다. 많게는 진열 의약품의 40%, 적게는 20~30%가 사장 의약품들이다.
정부와 약사들은 의약분업 이후 의사들이 진품 고가약 처방에 너도나도 나서면서 이런 현상이 벌어졌다고 주장한다. 저가 카피약은 약효가 ‘동등’하지만 특별한 로비(?)가 있어 보이는 특정 약품들만이 팔려 나갈 뿐 나머지는 몇 달이 지나가도 처방전에 오르는 일이 없다는 것. 의약분업 이전 약값의 마진이 크고, 약품 리베이트의 대상이 되는 관계로 카피약이 의사들의 사랑을 독차지한 것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이다.
“지난 2월 통사정을 해 꽤 많은 의약품을 반품했지만 아직도 900여 품목이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서울시 성북구에서 대형 동네약국을 운영하는 약사 문모씨(50)는 사장 의약품의 확산은 곧 의약분업 체제의 붕괴를 뜻한다고 경고한다. 그는 “의사들의 처방약이 일관성 없이 달마다 바뀌는 것을 그대로 놔둘 경우 대부분의 약국이 (병원이나 의사들과의) 담합약국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며 “처방전은 적게 오고, 의약품은 내버려야 하는 이중고(二重苦)를 감내할 약사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라고 고충을 토로했다.
이런 현상은 ‘재고 의약품 0%’의 담합약국을 제외한 동네약국 전반의 문제. 정부나 대한약사회 전체 차원의 조사는 없었지만 전국적으로 수천억원이 넘는 의약품이 사장되고 있는 것으로 추정한다. 대구시 약사회가 지난 3월 대구지역 227개 약국들이 반송 의뢰한 약품들을 조사한 결과, 20억원이 훨씬 넘는 금액의 약품들이 교환이나 반품대상으로 올라왔다. 대구시 약사회 석광철 홍보이사는 “대구지역 전체 약국이 1000여 곳이 넘기 때문에 약사회 전체 사장 의약품은 1백억원을 훨씬 넘을 것이고, 이를 전국적으로 추산하면 수천억원에 이를 것”이라고 주장했다.
동네약국들의 재고 의약품 누적이 계속되자 각 시-도 약사회는 사장 의약품의 집단 반환에 나서는 한편, 인터넷 홈페이지에 ‘교환품 센터’를 개설해 재고 의약품의 소진에 힘쓰지만, 거의 성과가 없는 형편이다. 워낙 종류가 많은데다 대부분이 처방전이 잘 나오지 않는 카피약이기 때문이다.
사실 동네약국의 이런 ‘의약품 대란’은 의약분업 이전부터 정부가 주도하던 지역협력위원회 제도가 사실상 무산되면서 일찍이 예고된 일이었다. 지역협력위원회는 각 기초자치단체를 중심으로 의-약-정-시민단체가 참여해 상용의약품 목록을 정하고, 의사가 다빈도 처방약을 바꿀 경우 이들간의 협의를 거치도록 한 제도.
정부는 의약품의 효율적 분배와 의사들의 처방 리베이트 차단을 위해 위원회 설치를 의사단체와 약사단체에 지속적으로 요구했으나 위원회 제도는 결국 ‘처방권은 의사 고유의 권한’이라는 의사들의 주장에 밀렸고, 의료대란 와중이던 지난해 11월 약사법 개정안에서 삭제되었다. 이후 의사단체나 종합병원이 일방적으로 건네주는 상용 의약품 목록은 유명무실해져 버렸다. 바뀌기 일쑤이거나 실제와 다른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다. 이는 동네약국들로 하여금 실제 상용 다빈도 의약품 600~700여 종 외에 1000여 종 이상의 의약품을 추가로 준비하지 않을 수 없는 동기를 제공했다.
하지만 약사들은 지역협력위원회 구성과 관계없이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 관행만 수그러져도 의약품 재고는 많이 줄어들 것이라고 불만을 터뜨린다. 서울시 강동구 B약국 이모약사(35)는 “오리지널약과 카피약은 같은 수입원료를 써서 만든 제품으로, 식품의약품안전청의 약효 동등성 시험을 거친 제품인데도, 값 차이가 무려 10배 이상 나는 것도 있다”며 “고가약 처방을 계속하면 환자 본인 부담금이 늘어나는 것은 물론, 건강보험 재정만 축날 것”이라고 우려한다.
실제로 건강심사평가원의 자료는 의약분업 이후 고가약 처방의 증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의약분업 이전인 지난해 5월, 외래 약품비 중 고가 약품비가 차지하는 비중은 42.9%였으나 의약분업 이후인 11월에는 무려 62.2%로 증가한 것. 이로 말미암아 추가로 소요된 보험재정만 1080억원에 이르렀다. 약제비뿐만 아니라 고가약의 투여 횟수도 의약분업 이전 하루 18.6회에서 26.7회로 43.4%나 늘었다.
고가약이란 동일한 성분-함량-제형을 가진 약품 그룹 중 가격이 가장 비싼 약품을 가리키는 것으로, 동일성분 약품 그룹에 속하는 약품이 적게는 7~8개, 많게는 100여 개에 이르는 점을 감안하면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 의존율이 얼마나 심각한지를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의사들이 의약분업 이후 이토록 고가 오리지널약에 집착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대한의사협회는 이를 의약분업과 의약품 실거래가 상환제 실시로 인해 약품에 대한 의사들의 경제적 욕구가 사라진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의협의 한 관계자는 “초기에는 ‘의약분업 한번 망해봐라’는 식의 충동적 처방이 많았으나 이후에는 더 이상 약품 마진이 없는 상태에서 좀더 좋은 약을 써보자는 의사들의 충정이 반영된 것”이라며 “카피약 중 대부분은 약효 동등성을 거쳤을 뿐 인체를 대상으로 한 생물학적 동등성을 거치지 않은 약이 많기 때문에 믿고 처방할 의약품이 많지 않은 것이 사실”이라고 해명했다. 그는 또 의약분업 이후 처방전을 공개함에 따라 ‘고가약=좋은 약’ 이라는 의식이 환자들에게 퍼져 있어 카피약을 처방하면 나쁜 의사로 낙인 찍히는 경우가 많은 것도 의사들이 고가약 처방에 의존하는 한 이유라고 귀띔했다.
하지만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우석균 정책실장은 “오리지널약이 카피약보다는 약품의 질이 더 좋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지만 실제 인체에 투여하였을 때 오리지널약이 카피약보다 더 약효가 좋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반박했다. 즉 인체를 대상으로 한 생물학적 동등성 시험의 경우 약효의 동등 정도가 80%가 넘으면 인체에 대한 효력은 똑같다는 것. 따라서 80%보다 100%가 더 좋은 것은 사실이지만 인체에는 아무런 영향이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문제는 또 있다.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이 건강보험재정 파탄의 한 이유가 되고 있을 뿐 아니라, 환자 본인의 의사를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독일에서는 동일성분의 약품 그룹 중 최저가약을 ‘기준 약가’로 정해 그 보다 더 비싼 약을 처방할 경우, 환자-의사-약사가 똑같이 기준 약가 이상의 부담을 나누게 되어 있다. 또 미국 몇몇 주의 경우 고가약을 처방할 경우 반드시 환자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하고 있다.
의사들의 고가약 처방이 건강보험 재정 파탄의 한 원인으로 떠오르자 보건복지부는 지난 4월13일 부리나케 “동일성분의 약품 중 최저가약의 2배까지만 보험급여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환자 본인부담으로 돌리겠다”면서 ‘기준약가제’에 대한 방침을 언론에 흘렸다. 하지만 이번에도 건강보험의 주인인 국민에게 약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한번 검토중인 것을 신문들이 잘못 쓴 것입니다.” 복지부 보험급여과의 한 담당자는 아직 문제의 심각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