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전 시카고에 있는 사립탐정 강효흔씨에게 잃어버린 딸을 찾아 달라는 노모의 안타까운 사연이 날아 들었다.
“전쟁통에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파편에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남편은 썩어가는 상처를 바라보면서도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날품을 팔아봤자 우리 가족의 하루 한 끼니를 때우기 도 어려웠습니다. 하루 품거리를 찾아 주막에 찾아든 어느 날 주막 집 주인은 열 살 된 큰딸아이를 보고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제의 해왔습니다. 딸아이가 주막에 있으면 굶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울며 매달리는 딸아이를 달랬습니다. 내년 봄엔 꼭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딸아이는 주막집 주인을 따라 부 엌으로 들어갔고 나는 도망치듯 달아났습니다.
그 후 나는 딸아이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한 끝에 3년 만 에 가까스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주막으로 딸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에게 들은 소식으로 는 그동안 힘겨운 부엌일에 술시중까지 들다가 몇 개월 전 어느 술 집으로 팔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미동포 35% 혈육과 연락 두절
딸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맸으나 술집에서 도망, 고아원을 전전하다 미국에 입양돼 갔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벌써 30여 년이 지났으나 주막집 주인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개나리 필 때는 꼭 데리러 오라고 몇 번을 다짐시키며 눈길을 놓지 않던 딸아이의 눈망울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평생 그 아이를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나는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발 이 늙은 어미의 소원을 풀어주세요.”
노모의 가슴을 짓눌러온 40년 가까운 고통은 그러나 너무 쉽게 해결 됐다. 사건을 의뢰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딸의 거처가 확인됐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됐다. 재회하는 순간 그들이 한 말은 “그동 안(적극적으로 찾지 않고 보낸)의 시간이 아깝고 후회스럽다”는 것 이었다.
강씨의 사무실에는 이처럼 20~40년 전 헤어진 혈육이나 친지를 찾아 달라는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연도 갖가지여서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입양시킨 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찾아달라는 사연이 가장 많고, 돈 벌러 떠났다가 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찾는 사 연, 유학이나 이민을 떠난 뒤 연락이 끊긴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달 라는 것 등이다. 특히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노인 들은 눈을 감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헤어진 피붙이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매달린다.
남북이산가족도 부둥켜안고 만나는 시대에 자유왕래가 가능한 한국 과 미국에서 이처럼 생사도 모르고 수십 년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 온 이산가족이 많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재미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35% 정도가 혈육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며 그 중 90% 이상이 한국에 혈육이 있다고 한 다. 이들이 헤어지게 된 원인을 보면, 해외입양을 제외하고는 대개 통신수단의 미비로 서로 주소지가 바뀌면서 편지가 몇 차례 반송되 다 아예 연락이 끊긴 경우다.
98년 LA에서 헤어진 지 21년 만에 눈물의 상봉을 한 정모씨 남매의 사연을 들어보면 ‘생이별’이 결코 전쟁통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7년 정씨 남매의 고모는 미군과 결혼해 애틀랜 타에 정착한 뒤 평소 예뻐하던 세 살짜리 여조카를 데리고 갔다. 문 제는 부부싸움이 잦던 고모가 이혼을 하면서부터였다. 고모가 병까 지 생겨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어린 정씨는 미국에 온 지 2년 만에 아동복지국에 맡겨졌고 그 후 6년 동안 임시양부모의 집을 전 전하며 자랐다. 정씨는 그때까지 고모가 친엄마인 줄로만 알고 있었 고 한국에 친부모와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정씨의 오빠(33)는 한국기업 미국지사에 파견되자 곧 여동생 찾기에 나섰다. 이때 정씨의 어릴 적 별명이 ‘복동이’였다는 사실이 중요 한 단서가 됐다. 정씨가 처음 미국에 와서 살았던 동네는 인구가 많 지 않은 작은 지역이어서 수소문하기가 수월했다. 한 동네에서 20 여년 간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한국인이 ‘복동이’로 통하던 정씨 소식을 알려주었다. 정씨 남매의 극적인 상봉은 LA공항에서 이루어 졌다.
이운학씨(68) 남매는 같은 미국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생사를 모른 채 22년을 살아온 경우다. 이씨의 여동생 명희씨는 미국인과 결혼해 73년 도미했다. 그 후 3년 간 한국의 가족과 소식이 오갔으나 서울 의 오빠집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되고 언니가 살던 집마저 헐려 이사 를 하자 동생 명희씨가 띄운 편지는 계속 반송됐다. 명희씨 역시 남 편 근무지를 따라 계속 이사를 하다보니 영영 연락이 끊기고 말았 다.
오빠 이운학씨도 93년 미국으로 이민와서 신문광고를 내는 등 계속 동생을 찾았으나 사기만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탐정에게 의뢰하자 일은 쉽게 풀렸다. 오빠는 시카고에, 동생은 조지아주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10여만명의 한국인 입양자녀들이 자신의 핏줄을 잊은 채 미국인으로 자라고 있다. 이제 30대의 성인이 된 이들은 대부분 한 국의 친부모와 형제자매를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 어 릴 때 입양돼 자신의 한국이름조차 모르거나 입양서류 등이 분실돼 한국의 가족을 찾아줄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모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신(新) 이산가족인 셈이 다.
남북이산가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만나지 못했 지만, 한국과 미국의 이산가족은 만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 만 헤어진 가족과 연락할 방법이 없을 뿐이다. ‘주간동아’가 미국 공인탐정 강효흔씨(미국명 브루스 리)와 공동으로 ‘한국-미국 그리 운 얼굴 찾기 무료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이들의 안타까움을 조금 이나마 달래기 위해서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든 혈육은 소중한 존재 다. 본지의 무료캠페인 작업은 헤어진 가족들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마음의 고통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쟁통에 모든 재산을 하루아침에 잃고,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가 파편에 한쪽 다리를 잃어버린 남편은 썩어가는 상처를 바라보면서도 약 한 첩 써보지 못하고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여자의 몸으로 날품을 팔아봤자 우리 가족의 하루 한 끼니를 때우기 도 어려웠습니다. 하루 품거리를 찾아 주막에 찾아든 어느 날 주막 집 주인은 열 살 된 큰딸아이를 보고 자신이 데리고 있겠다고 제의 해왔습니다. 딸아이가 주막에 있으면 굶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울며 매달리는 딸아이를 달랬습니다. 내년 봄엔 꼭 데리러 오겠다는 약속을 몇 번이고 확인하고 나서야 딸아이는 주막집 주인을 따라 부 엌으로 들어갔고 나는 도망치듯 달아났습니다.
그 후 나는 딸아이를 되찾겠다는 일념으로 열심히 일한 끝에 3년 만 에 가까스로 방 한 칸을 마련하고 주막으로 딸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딸아이는 그곳에 없었습니다. 동네 사람에게 들은 소식으로 는 그동안 힘겨운 부엌일에 술시중까지 들다가 몇 개월 전 어느 술 집으로 팔려갔다는 것이었습니다.
재미동포 35% 혈육과 연락 두절
딸을 찾기 위해 전국을 헤맸으나 술집에서 도망, 고아원을 전전하다 미국에 입양돼 갔다는 사실을 알고 결국 포기했습니다. 벌써 30여 년이 지났으나 주막집 주인의 손에 이끌려 가면서 개나리 필 때는 꼭 데리러 오라고 몇 번을 다짐시키며 눈길을 놓지 않던 딸아이의 눈망울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나는 평생 그 아이를 가슴에 묻어두고 살아왔습니다. 이제 나는 살 날도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용서를 받지 않고서는 눈을 감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제발 이 늙은 어미의 소원을 풀어주세요.”
노모의 가슴을 짓눌러온 40년 가까운 고통은 그러나 너무 쉽게 해결 됐다. 사건을 의뢰한 지 한 달도 채 안 돼 딸의 거처가 확인됐고, 두 사람은 다시 만나게 됐다. 재회하는 순간 그들이 한 말은 “그동 안(적극적으로 찾지 않고 보낸)의 시간이 아깝고 후회스럽다”는 것 이었다.
강씨의 사무실에는 이처럼 20~40년 전 헤어진 혈육이나 친지를 찾아 달라는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다. 사연도 갖가지여서 가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미국으로 입양시킨 자식이나 형제자매를 찾아달라는 사연이 가장 많고, 돈 벌러 떠났다가 소식이 없는 아버지를 찾는 사 연, 유학이나 이민을 떠난 뒤 연락이 끊긴 친척이나 친구를 찾아달 라는 것 등이다. 특히 앞으로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고령의 노인 들은 눈을 감기 전에 한번만이라도 헤어진 피붙이를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거의 애원하다시피 매달린다.
남북이산가족도 부둥켜안고 만나는 시대에 자유왕래가 가능한 한국 과 미국에서 이처럼 생사도 모르고 수십 년 세월을 고통 속에 살아 온 이산가족이 많다는 사실은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러나 최근 재미동포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35% 정도가 혈육과 연락이 두절된 상태며 그 중 90% 이상이 한국에 혈육이 있다고 한 다. 이들이 헤어지게 된 원인을 보면, 해외입양을 제외하고는 대개 통신수단의 미비로 서로 주소지가 바뀌면서 편지가 몇 차례 반송되 다 아예 연락이 끊긴 경우다.
98년 LA에서 헤어진 지 21년 만에 눈물의 상봉을 한 정모씨 남매의 사연을 들어보면 ‘생이별’이 결코 전쟁통의 이야기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77년 정씨 남매의 고모는 미군과 결혼해 애틀랜 타에 정착한 뒤 평소 예뻐하던 세 살짜리 여조카를 데리고 갔다. 문 제는 부부싸움이 잦던 고모가 이혼을 하면서부터였다. 고모가 병까 지 생겨 아이를 돌볼 수 없게 되자 어린 정씨는 미국에 온 지 2년 만에 아동복지국에 맡겨졌고 그 후 6년 동안 임시양부모의 집을 전 전하며 자랐다. 정씨는 그때까지 고모가 친엄마인 줄로만 알고 있었 고 한국에 친부모와 형제가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렸다.
정씨의 오빠(33)는 한국기업 미국지사에 파견되자 곧 여동생 찾기에 나섰다. 이때 정씨의 어릴 적 별명이 ‘복동이’였다는 사실이 중요 한 단서가 됐다. 정씨가 처음 미국에 와서 살았던 동네는 인구가 많 지 않은 작은 지역이어서 수소문하기가 수월했다. 한 동네에서 20 여년 간 식료품점을 운영하던 한국인이 ‘복동이’로 통하던 정씨 소식을 알려주었다. 정씨 남매의 극적인 상봉은 LA공항에서 이루어 졌다.
이운학씨(68) 남매는 같은 미국 하늘 아래 있으면서도 생사를 모른 채 22년을 살아온 경우다. 이씨의 여동생 명희씨는 미국인과 결혼해 73년 도미했다. 그 후 3년 간 한국의 가족과 소식이 오갔으나 서울 의 오빠집이 도시계획으로 철거되고 언니가 살던 집마저 헐려 이사 를 하자 동생 명희씨가 띄운 편지는 계속 반송됐다. 명희씨 역시 남 편 근무지를 따라 계속 이사를 하다보니 영영 연락이 끊기고 말았 다.
오빠 이운학씨도 93년 미국으로 이민와서 신문광고를 내는 등 계속 동생을 찾았으나 사기만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 사건을 탐정에게 의뢰하자 일은 쉽게 풀렸다. 오빠는 시카고에, 동생은 조지아주에 살고 있었던 것이다.
미국에는 10여만명의 한국인 입양자녀들이 자신의 핏줄을 잊은 채 미국인으로 자라고 있다. 이제 30대의 성인이 된 이들은 대부분 한 국의 친부모와 형제자매를 찾고 싶어한다. 그러나 불행히도 너무 어 릴 때 입양돼 자신의 한국이름조차 모르거나 입양서류 등이 분실돼 한국의 가족을 찾아줄 아무런 정보도 갖고 있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모두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갈라진 신(新) 이산가족인 셈이 다.
남북이산가족은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정치적인 이유로 만나지 못했 지만, 한국과 미국의 이산가족은 만나지 못할 이유가 전혀 없다. 다 만 헤어진 가족과 연락할 방법이 없을 뿐이다. ‘주간동아’가 미국 공인탐정 강효흔씨(미국명 브루스 리)와 공동으로 ‘한국-미국 그리 운 얼굴 찾기 무료캠페인’을 벌이는 것도 이들의 안타까움을 조금 이나마 달래기 위해서다. 어떤 이유로 헤어졌든 혈육은 소중한 존재 다. 본지의 무료캠페인 작업은 헤어진 가족들이 오랫동안 간직해 온 마음의 고통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