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에 와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주제를 알라’였어요. ‘여기가 어딘 줄 알아? 니네 중국 땅이 아니야. 여기는 한국이야, 한국! 주제를 알아야지’라고 하는 거예요.”
김춘란씨(44)는 수년째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눈길을 돌리거나, 뒤늦게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어머, 아래층 여자 ‘쭝국인’이래!”라고 외쳐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9년째 접어든 한국에서의 삶은 그에게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선족’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다. 김씨는 눈물 흘릴 일이 있을 때마다 눈물 대신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에 적어내려갔다. 이렇게 3년 가까이 쓰고 또 고쳐 쓴 원고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보낸 것이 덜컥 최우수작에 당선됐다.
전화로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목이 메더니, 시상식장에서는 아예 목놓아 울고 말았다. “남에게 하기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조선족이라고 손가락질받았던 거랑, 재혼 후 힘들었던 집안 일 등이 담긴 원고를 보내놓고 괜한 짓 했다며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선되니 이로써 내 인생의 한 획을 긋고 비로소 한국인 김춘란으로 살게 됐다는 생각에 서러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복받쳐 오르더군요.”
홀홀 단신으로 건너온 ‘기회의 땅’엔 차별과 서러움만
‘신동아’에 원고를 보낼 때 본명 김춘란 대신 어린 시절 이름 김진분이라 쓴 것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사람 대접 못 받는 중국 동포라는 자괴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씨가 조국에서 겪은 일들을 듣노라면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방인에게라도 그처럼 모질게 대할 수 있을까. 김씨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중국 동포도 같은 핏줄이라는 눈물겨운 호소가 담겨 있었다.
중국 지린성에 살던 김씨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92년 6월2일이었다. 위암으로 남편을 잃고 열한살짜리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 일이 막막했을 때 떠오른 것이 기회의 땅 조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의 머릿속에서 한국은 마냥 아름다운 섬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아들은 친정에 맡기고 돈 벌어 오겠다면서 김씨는 홀홀 단신 인천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다.
처음 본 서울은 까마득한 고층빌딩에 물결처럼 흐르는 자동차 행렬, 깨끗한 거리를 활보하는 아름다운 행인들의 도시였다. 거북살스러운 중국말 대신 귀에 들어오는 조선말을 아름답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대형서점에 들렀다 서고 가득한 책을 보고 감격했다. 문학소녀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김씨는 책이라도 마음껏 읽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첫 일자리인 식당 주방 일에서부터 ‘차별’의 연속이었다. 일단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일을 하고도, 아니 제때 화장실에 못 가 변비가 생길 정도로 일을 해도 다른 종업원에 비해 10만∼20만원 정도 월급이 적은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같은 주방일꾼끼리도 중국인이라며 강아지 부리듯 잔심부름을 시켰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다가오는 체류 마감일 때문에 초조함을 감출 수 없어 법무부에 가서 한 달, 또 한 달 체류기간을 연장했지만 마감 일자는 너무 빨리 돌아왔다. 그때 마침 일산 신도시 건설 현장이 비교적 단속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새로 얻은 함바식당 일자리는 월급이 60만원. 전에 일하던 서울의 식당보다 10만원이나 많았다. 입이 벌어졌다. 1년이면 720만원, 2년이면 1440만원, 3년이면 2160만원. 3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을 생각하며 잠시 부자가 되는 꿈에 빠지기도 했다.
석달째 불법체류자로 불안한 삶을 살다보니 슬그머니 재혼 생각이 났다. 김씨야 어차피 남편과 사별한 처지니 한국 남자와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지만, 한창 중국 동포들의 ‘위장결혼’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을 때라 결심이 쉽지만은 않았다. 중매쟁이가 소개한 아홉살 연상의 지금 남편과는 너무 쉽게 결혼을 했다. 거기에는 남편의 전처가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같은 병으로 짝을 잃은 사람끼리 기대어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7년 과부 생활을 청산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 생활을 시작하니 가정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거리는 너무 컸다.
‘중국산’ 마누라와 살면서도 입버릇처럼 “중국산은 뭐든지 못 써먹는다”고 하는 남편, 한창 반항기에 접어들어 실수로라도 ‘엄마’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전처 소생의 아들, 술만 마시면 주먹부터 올라가는 남편을 말리는 대신 “자식 내팽개쳐 두고 혼자 나와 사는 년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며 아픈 데를 더 후벼파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결혼 생활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한국 남자에게 시집가 잘 사는 줄 알았던 친정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거지처럼 노예처럼 살 것 없다. 당장 돌아오라”고 편지가 왔지만 꾹 참았다.
“보따리 싼 게 열두 번도 더 되죠.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편의 폭력을 피해) 이웃집으로 도망쳐서 이젠 그만 살아야겠다 생각하다가도, 위장결혼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하며 다시 이를 악물었습니다.”
IMF가 터져 모두들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칠 때 이 땅은 조국이 아니라 바늘방석이었다. 남편의 장사가 어려워져 김씨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직업소개소에서 어쩌다 나온 일감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눈을 벌겋게 뜨고 달려들 때 김씨는 “말도 마. 지금 식당이고 어디고 업소마다 교포년들이 한둘씩은 다 들어가 있더라구. 골치야 골치” 하며 힐끔거리는 눈길을 피해 몸을 웅크려야 했다.
한국남자와 재혼 그리고…중국에 두고 온 아들 여전히 눈에 밟혀
그런 모욕쯤 눈도 꿈쩍 안할 만큼 단련됐건만, 김씨는 중국에 두고 온 아들 이야기가 나오면 또 발을 동동 구른다. 얼마 전 법무부에 한국초청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보고 싶으면 엄마가 가면 되지 않느냐”는 냉정한 답변만 들었다. 그나마 요즘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중국 동포들이 ‘(중국에 있는) 자식 포기 각서’를 쓰는 것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사실 이런 일로 눈물 글썽이고 있을 시간도 없다. 김씨보다 훨씬 곤란한 처지의 중국 동포들이 수시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중국 동포들의 119’라는 김씨는 시댁식구 눈치를 보면서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동포들이 보따리를 맡기러 오거나, 중국에 송금하려 할 때, 혹은 갑작스럽게 병이 났다며, 심지어 불법체류외국인 수용소에서까지 김씨에게 연락이 왔고 그때마다 ‘해결사’로 나섰다.
지난 8년이 김씨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다. 원래 글쓰기를 좋아했던 김씨는 지린시 우리말 문예지 ‘도라지’에 단편 ‘아버지’로 등단했다. 한국에 온 뒤 잠시 문학의 꿈을 접기도 했으나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현장소설로 써 중국 잡지 ‘장백산’에 기고한 것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씨는 요즘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며 정말 한국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보고 싶은 책을 인터넷 책방에 주문하면 척척 집까지 가져다 주는 게 그렇게 신기하고 고마울 수 없다. 또 간판이라도 제대로 읽기 위해 뒤늦은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왜 그렇게 외래어를 많이 쓰죠? 사탕이라 하면 될 것을 꼭 캔디라 하고, 열쇠를 왜 키라고 합니까?”
소시지를 수세미로 혼동하고 오뎅과 우동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털어놓으며 김씨는 환하게 웃는다. 이제 그런 일쯤은 웃음으로 넘길 수 있다고….
김춘란씨(44)는 수년째 같은 아파트에 살면서도 눈이 마주치면 눈길을 돌리거나, 뒤늦게 중국에서 왔다는 것을 알고 “어머, 아래층 여자 ‘쭝국인’이래!”라고 외쳐도 무덤덤하기만 하다.
9년째 접어든 한국에서의 삶은 그에게 아무리 발버둥쳐도 ‘조선족’이라는 낙인을 지울 수 없다는 사실만 확인시켜 주었다. 김씨는 눈물 흘릴 일이 있을 때마다 눈물 대신 한 글자 한 글자 종이에 적어내려갔다. 이렇게 3년 가까이 쓰고 또 고쳐 쓴 원고 ‘길림댁은 등나무처럼 살고 싶다’를 ‘신동아 논픽션 공모’에 보낸 것이 덜컥 최우수작에 당선됐다.
전화로 당선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목이 메더니, 시상식장에서는 아예 목놓아 울고 말았다. “남에게 하기 좋은 이야기도 아니고, 조선족이라고 손가락질받았던 거랑, 재혼 후 힘들었던 집안 일 등이 담긴 원고를 보내놓고 괜한 짓 했다며 많이 후회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당선되니 이로써 내 인생의 한 획을 긋고 비로소 한국인 김춘란으로 살게 됐다는 생각에 서러움과 기쁨이 한꺼번에 복받쳐 오르더군요.”
홀홀 단신으로 건너온 ‘기회의 땅’엔 차별과 서러움만
‘신동아’에 원고를 보낼 때 본명 김춘란 대신 어린 시절 이름 김진분이라 쓴 것도, 여전히 마음 한 구석에 사람 대접 못 받는 중국 동포라는 자괴감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김씨가 조국에서 겪은 일들을 듣노라면 같은 한국인이라는 게 부끄러워질 정도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방인에게라도 그처럼 모질게 대할 수 있을까. 김씨의 말투는 담담했지만 그 속에는 중국 동포도 같은 핏줄이라는 눈물겨운 호소가 담겨 있었다.
중국 지린성에 살던 김씨가 처음 한국에 온 것은 92년 6월2일이었다. 위암으로 남편을 잃고 열한살짜리 아들 하나 데리고 사는 일이 막막했을 때 떠오른 것이 기회의 땅 조국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김씨의 머릿속에서 한국은 마냥 아름다운 섬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아들은 친정에 맡기고 돈 벌어 오겠다면서 김씨는 홀홀 단신 인천항을 거쳐 서울역에 도착했다.
처음 본 서울은 까마득한 고층빌딩에 물결처럼 흐르는 자동차 행렬, 깨끗한 거리를 활보하는 아름다운 행인들의 도시였다. 거북살스러운 중국말 대신 귀에 들어오는 조선말을 아름답다 못해 신기하기까지 했다. 더욱이 대형서점에 들렀다 서고 가득한 책을 보고 감격했다. 문학소녀의 꿈을 버리지 못했던 김씨는 책이라도 마음껏 읽겠다는 소박한 꿈을 꾸며,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땅에서 살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첫 일자리인 식당 주방 일에서부터 ‘차별’의 연속이었다. 일단 못 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같은 일을 하고도, 아니 제때 화장실에 못 가 변비가 생길 정도로 일을 해도 다른 종업원에 비해 10만∼20만원 정도 월급이 적은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같은 주방일꾼끼리도 중국인이라며 강아지 부리듯 잔심부름을 시켰지만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그저 다가오는 체류 마감일 때문에 초조함을 감출 수 없어 법무부에 가서 한 달, 또 한 달 체류기간을 연장했지만 마감 일자는 너무 빨리 돌아왔다. 그때 마침 일산 신도시 건설 현장이 비교적 단속으로부터 안전하다는 소문을 들었다. 새로 얻은 함바식당 일자리는 월급이 60만원. 전에 일하던 서울의 식당보다 10만원이나 많았다. 입이 벌어졌다. 1년이면 720만원, 2년이면 1440만원, 3년이면 2160만원. 3년 동안 벌 수 있는 돈을 생각하며 잠시 부자가 되는 꿈에 빠지기도 했다.
석달째 불법체류자로 불안한 삶을 살다보니 슬그머니 재혼 생각이 났다. 김씨야 어차피 남편과 사별한 처지니 한국 남자와 결혼하지 못할 이유가 없었지만, 한창 중국 동포들의 ‘위장결혼’이 사회적 물의를 빚고 있을 때라 결심이 쉽지만은 않았다. 중매쟁이가 소개한 아홉살 연상의 지금 남편과는 너무 쉽게 결혼을 했다. 거기에는 남편의 전처가 위암으로 사망했다는 사실도 한몫 했다. ‘같은 병으로 짝을 잃은 사람끼리 기대어 살면 좋겠다’는 생각에 7년 과부 생활을 청산했다. 그러나 막상 결혼 생활을 시작하니 가정에서도 중국과 한국의 거리는 너무 컸다.
‘중국산’ 마누라와 살면서도 입버릇처럼 “중국산은 뭐든지 못 써먹는다”고 하는 남편, 한창 반항기에 접어들어 실수로라도 ‘엄마’ 소리 한번 하지 않는 전처 소생의 아들, 술만 마시면 주먹부터 올라가는 남편을 말리는 대신 “자식 내팽개쳐 두고 혼자 나와 사는 년이 잘났으면 얼마나 잘났느냐”며 아픈 데를 더 후벼파는 시어머니 사이에서 결혼 생활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한국 남자에게 시집가 잘 사는 줄 알았던 친정에서도 이 소식을 듣고 “거지처럼 노예처럼 살 것 없다. 당장 돌아오라”고 편지가 왔지만 꾹 참았다.
“보따리 싼 게 열두 번도 더 되죠. 헝클어진 모습으로 (남편의 폭력을 피해) 이웃집으로 도망쳐서 이젠 그만 살아야겠다 생각하다가도, 위장결혼 소리는 듣지 말아야지 하며 다시 이를 악물었습니다.”
IMF가 터져 모두들 일자리가 없어 아우성칠 때 이 땅은 조국이 아니라 바늘방석이었다. 남편의 장사가 어려워져 김씨는 다시 일거리를 찾아 나섰다. 직업소개소에서 어쩌다 나온 일감 하나를 놓고 여러 사람이 눈을 벌겋게 뜨고 달려들 때 김씨는 “말도 마. 지금 식당이고 어디고 업소마다 교포년들이 한둘씩은 다 들어가 있더라구. 골치야 골치” 하며 힐끔거리는 눈길을 피해 몸을 웅크려야 했다.
한국남자와 재혼 그리고…중국에 두고 온 아들 여전히 눈에 밟혀
그런 모욕쯤 눈도 꿈쩍 안할 만큼 단련됐건만, 김씨는 중국에 두고 온 아들 이야기가 나오면 또 발을 동동 구른다. 얼마 전 법무부에 한국초청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보고 싶으면 엄마가 가면 되지 않느냐”는 냉정한 답변만 들었다. 그나마 요즘 한국 남자와 결혼하는 중국 동포들이 ‘(중국에 있는) 자식 포기 각서’를 쓰는 것에 비하면, 자신의 처지가 낫다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사실 이런 일로 눈물 글썽이고 있을 시간도 없다. 김씨보다 훨씬 곤란한 처지의 중국 동포들이 수시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면 거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자신을 ‘중국 동포들의 119’라는 김씨는 시댁식구 눈치를 보면서도 그들을 외면하지 않았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동포들이 보따리를 맡기러 오거나, 중국에 송금하려 할 때, 혹은 갑작스럽게 병이 났다며, 심지어 불법체류외국인 수용소에서까지 김씨에게 연락이 왔고 그때마다 ‘해결사’로 나섰다.
지난 8년이 김씨에게 고통만 준 것은 아니다. 원래 글쓰기를 좋아했던 김씨는 지린시 우리말 문예지 ‘도라지’에 단편 ‘아버지’로 등단했다. 한국에 온 뒤 잠시 문학의 꿈을 접기도 했으나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의 생생한 체험을 현장소설로 써 중국 잡지 ‘장백산’에 기고한 것이 좋은 반응을 얻고 있다.
김씨는 요즘 영어와 컴퓨터를 배우며 정말 한국 사람으로 살기 위해 노력한다. 보고 싶은 책을 인터넷 책방에 주문하면 척척 집까지 가져다 주는 게 그렇게 신기하고 고마울 수 없다. 또 간판이라도 제대로 읽기 위해 뒤늦은 영어공부를 하고 있다.
“왜 그렇게 외래어를 많이 쓰죠? 사탕이라 하면 될 것을 꼭 캔디라 하고, 열쇠를 왜 키라고 합니까?”
소시지를 수세미로 혼동하고 오뎅과 우동을 구분하지 못해 생긴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털어놓으며 김씨는 환하게 웃는다. 이제 그런 일쯤은 웃음으로 넘길 수 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