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명동’으로 부르는 사채시장에서 8년간 어음할인 업무를 하던 H씨. 그의 현재 명함에는 ‘○○소프트웨어 마케팅담당 이사’라는 직함이 찍혀 있다. 그의 사무실은 이제 사채업자들이 운집해 있는 명동이 아닌 테헤란로 한복판이다. 그가 명동을 떠나 테헤란밸리에 자리잡은 것은 지난 1월. 명동 사채시장에서 비상장 벤처기업의 주식을 장외거래 형식으로 만지기 시작하면서 벤처업계에 대한 감(感)을 익힌 뒤 아예 테헤란로로 진출한 것이다.
높은 수익 비상장 주식 장외거래 열중
명동에서 테헤란로로 ‘거점이동’에 성공한 H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H씨는 “뒤늦게 코스닥열풍에 뛰어든 명동 사채업자들은 지금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명동 골목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채업자들은 최근 ‘닷컴위기론’이나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코스닥 시황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한마디로 벤처열풍이 쓸고 지나간 명동에 찬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사채업자 K씨의 지적.
“‘명동을 보면 금리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명동 사람들은 금융시장 동향에 관한 한 대단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미래를 보는 그런 능력이 벤처기업 투자와 결합되기 시작한 것이 지난해 하반기의 일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어음할인 수수료에만 의존하던 명동시장의 기반을 흔들어놓은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명동에서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비상장 주식이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IMF사태 이후 금융구조조정이 남긴 여파와도 관련이 깊다. 금융권 구조조정 과정에서 명예퇴직 형식으로 쏟아져나온 인력들이 자연스레 명동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어음할인에만 의존해오던 명동에 변화의 기운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어음할인 수수료라는 안정적 수입에만 의존해오던 사채업자들이 비상장 주식의 장외거래를 통해 좀더 높은 이익 창출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사채업자 P씨는 “어음할인 수수료라고 해보았자 은행 금리에 1, 2%를 더 얹는 수준이다. 이 정도 수익률로는 이미 벤처바람이 쓸고 지나간 명동시장의 돈주머니를 채워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 아니었나”고 되묻기도 했다. 이미 기대금리 수준이 그만큼 치솟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벤처 쪽에서도 사채시장을 기웃거리는 경영자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창업투자회사의 까다로운 기업 심사에 일일이 맞춰줄 필요 없이 자금이 풍부한 사채시장으로부터 돈을 끌어다 쓰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이다. 명동 일대에 ‘벤처컨설팅’이라는 간판을 단 사무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
이러다 보니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명동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장외시장에서 거래되는 비상장주가 대부분 그러하듯 기업가치를 정밀하게 분석해 적정주가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떠도는 풍문과 유행에 따라 기업을 선별하다 보니 주가에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생 벤처기업 주변에는 사채업자들이 주식을 사주는 대신 정해진 기간 일정한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이를 되사주는, 일종의 ‘이면계약’마저 생겨났다고 한다.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벤처투자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되었던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인터넷 공모도 이러한 이상 열풍에 한몫을 담당했다.
사채업자 K씨는 “고수익을 노리는 사채시장의 속성상 제조업체 어음을 인수해 안정적 수입을 챙기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금 여력을 바탕으로 벤처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물론 사채업자들이 파이낸스 간판을 달고 대형화 기업화하는 분위기도 작용했다. ‘투자자문회사’ 간판을 단 업체들은 벤처컨설팅 업무로 사업의 외연을 확장했다. 그러나 제조업 건설업 등 전통산업 분야에서 사채시장에 의존하던 중소업체 자금 담당자들은 돈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파이낸스사 등 유사금융업종들이 감독당국의 철퇴를 맞으면서까지 사업의 외연을 넓혀온 명동시장에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서의 H이사도 “지난 4월 이후 코스닥시장이 이렇게 급전직하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사채업자 K씨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벤처 투자에 자금이 묶이면서 아예 당분간 사무실을 폐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K씨는 “사채를 하는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동물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벤처 투자에서만큼은 예외였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채시장 위축의 여파는 곧바로 실물 경기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최근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업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이자율이 높은 사채를 끌어다 써야 할 형편. 그러나 사채시장의 최근 상황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D종합건설 자금 담당자는 “추석 자금 수요가 몰리는 데 비해 소규모 기업들이 의지해온 사채시장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W건설 관계자도 “(사채 시장 위축에다가) 현대사태로 인한 자금 경색까지 겹치면서 하도급 업체에 발행해준 어음 할인율이 2% 이상 더 치솟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대한건설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업체들이 끌어다 쓰는 사채의 평균 이자율은 14.7%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조사대상업체 중 57%가 자금운용 계획에 따라 사채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긴급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사채를 이용해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채시장에 의존하는 업체들의 경우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건설협회 관계자는 “사채시장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경우 자체 신용을 감안해 자금상의 애로사항이 있더라도 이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자금시장이 위축될 때마다 중소기업들에는 자금 고갈을 해소해주는 단비 역할을 했던 사채시장의 돈이 벤처 투자에 묶여버리는 바람에 실물 경기의 모세혈관이 막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향영 21C 리스크컨설팅 이정조 대표는 “개인투자자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할 때는 철저하게 마라톤 게임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100m 달리기 하듯이 덤벼서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고 충고했다. 철저한 기업분석을 토대로 리스크 관리를 주로 해온 이대표의 지론은 ‘개인들의 벤처 투자야말로 기업과 투자자 모두를 위한 윈-윈(win-win)게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명동을 할퀴고 간 닷컴폭풍의 잔해 위에서 속만 태우고 있는 투자자들이라면 한번쯤 되새겨보아야 할 지적이다.
높은 수익 비상장 주식 장외거래 열중
명동에서 테헤란로로 ‘거점이동’에 성공한 H씨는 그래도 나은 편이다. H씨는 “뒤늦게 코스닥열풍에 뛰어든 명동 사채업자들은 지금쯤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명동 골목에서 만난 대부분의 사채업자들은 최근 ‘닷컴위기론’이나 침체 국면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코스닥 시황에 대해 극도로 말을 아꼈다. 한마디로 벤처열풍이 쓸고 지나간 명동에 찬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사채업자 K씨의 지적.
“‘명동을 보면 금리가 보인다’고 할 정도로 명동 사람들은 금융시장 동향에 관한 한 대단한 촉수를 가지고 있다. 미래를 보는 그런 능력이 벤처기업 투자와 결합되기 시작한 것이 지난해 하반기의 일이다. 한마디로 그동안 어음할인 수수료에만 의존하던 명동시장의 기반을 흔들어놓은 사건이나 다름없었다”
명동에서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비상장 주식이 거래되기 시작한 것은 IMF사태 이후 금융구조조정이 남긴 여파와도 관련이 깊다. 금융권 구조조정 과정에서 명예퇴직 형식으로 쏟아져나온 인력들이 자연스레 명동으로 유입되기 시작했고 이들을 중심으로 어음할인에만 의존해오던 명동에 변화의 기운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어음할인 수수료라는 안정적 수입에만 의존해오던 사채업자들이 비상장 주식의 장외거래를 통해 좀더 높은 이익 창출에 눈을 돌리게 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사채업자 P씨는 “어음할인 수수료라고 해보았자 은행 금리에 1, 2%를 더 얹는 수준이다. 이 정도 수익률로는 이미 벤처바람이 쓸고 지나간 명동시장의 돈주머니를 채워주기에 턱없이 부족한 수준 아니었나”고 되묻기도 했다. 이미 기대금리 수준이 그만큼 치솟았다는 말이다.
게다가 벤처 쪽에서도 사채시장을 기웃거리는 경영자들이 없었던 게 아니다. 창업투자회사의 까다로운 기업 심사에 일일이 맞춰줄 필요 없이 자금이 풍부한 사채시장으로부터 돈을 끌어다 쓰는 데 어려움이 없었다는 말이다. 명동 일대에 ‘벤처컨설팅’이라는 간판을 단 사무실이 하나둘씩 늘어나기 시작한 것도 대략 이 무렵.
이러다 보니 적지 않은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게 명동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장외시장에서 거래되는 비상장주가 대부분 그러하듯 기업가치를 정밀하게 분석해 적정주가를 내놓는 것이 아니라 떠도는 풍문과 유행에 따라 기업을 선별하다 보니 주가에 거품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신생 벤처기업 주변에는 사채업자들이 주식을 사주는 대신 정해진 기간 일정한 수익이 나지 않을 경우 이를 되사주는, 일종의 ‘이면계약’마저 생겨났다고 한다. ‘고위험 고수익’이라는 벤처투자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 무시되었던 것이다.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던 인터넷 공모도 이러한 이상 열풍에 한몫을 담당했다.
사채업자 K씨는 “고수익을 노리는 사채시장의 속성상 제조업체 어음을 인수해 안정적 수입을 챙기는 것보다 상대적으로 풍부한 자금 여력을 바탕으로 벤처에 투자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였다”고 말했다. 여기에는 물론 사채업자들이 파이낸스 간판을 달고 대형화 기업화하는 분위기도 작용했다. ‘투자자문회사’ 간판을 단 업체들은 벤처컨설팅 업무로 사업의 외연을 확장했다. 그러나 제조업 건설업 등 전통산업 분야에서 사채시장에 의존하던 중소업체 자금 담당자들은 돈을 구하지 못해 발을 동동 굴렀다.
하지만 파이낸스사 등 유사금융업종들이 감독당국의 철퇴를 맞으면서까지 사업의 외연을 넓혀온 명동시장에 찬바람이 불어닥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앞서의 H이사도 “지난 4월 이후 코스닥시장이 이렇게 급전직하하리라고 예상한 사람은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사채업자 K씨도 “드러내놓고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벤처 투자에 자금이 묶이면서 아예 당분간 사무실을 폐쇄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고 귀띔했다. K씨는 “사채를 하는 사람들은 웬만해서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고 동물적 감각을 유지하고 있지만 벤처 투자에서만큼은 예외였던 것 같다”고 말하기도 했다.
사채시장 위축의 여파는 곧바로 실물 경기에 직접적 영향을 미쳤다. 최근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건설업체의 경우만 보더라도 규모가 작은 기업일수록 이자율이 높은 사채를 끌어다 써야 할 형편. 그러나 사채시장의 최근 상황 역시 호락호락하지는 않다. D종합건설 자금 담당자는 “추석 자금 수요가 몰리는 데 비해 소규모 기업들이 의지해온 사채시장이 움직이지 않고 있어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전했다. W건설 관계자도 “(사채 시장 위축에다가) 현대사태로 인한 자금 경색까지 겹치면서 하도급 업체에 발행해준 어음 할인율이 2% 이상 더 치솟기도 했다”고 말했다.
지난 3월 대한건설협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업체들이 끌어다 쓰는 사채의 평균 이자율은 14.7%에 달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게다가 조사대상업체 중 57%가 자금운용 계획에 따라 사채를 쓰는 것이 아니라 ‘긴급자금을 융통하기 위해’ 사채를 이용해왔다. 더욱 심각한 문제는 사채시장에 의존하는 업체들의 경우 그 전모를 파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 건설협회 관계자는 “사채시장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경우 자체 신용을 감안해 자금상의 애로사항이 있더라도 이를 감추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자금시장이 위축될 때마다 중소기업들에는 자금 고갈을 해소해주는 단비 역할을 했던 사채시장의 돈이 벤처 투자에 묶여버리는 바람에 실물 경기의 모세혈관이 막혀버리고 있다는 것이다. 향영 21C 리스크컨설팅 이정조 대표는 “개인투자자들이 벤처기업에 투자할 때는 철저하게 마라톤 게임의 자세로 임해야 한다. 100m 달리기 하듯이 덤벼서는 아무것도 건질 수 없다”고 충고했다. 철저한 기업분석을 토대로 리스크 관리를 주로 해온 이대표의 지론은 ‘개인들의 벤처 투자야말로 기업과 투자자 모두를 위한 윈-윈(win-win)게임이 되어야 한다는 것. 명동을 할퀴고 간 닷컴폭풍의 잔해 위에서 속만 태우고 있는 투자자들이라면 한번쯤 되새겨보아야 할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