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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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참 빠르게 변하더군요”

입장 바뀌어 ‘도와달라’ 아쉬운 소리 죽을맛…‘적자생존’ 현실은 냉혹

  • 입력2005-11-29 13:3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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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 참 빠르게 변하더군요”
    지난 2월 정보통신부 지식정보산업과장을 마지막으로 15년 공무원 생활을 마감한 강문석씨의 명함에는 요즈음 ‘삼보기술무역유한공사 대표이사’라는 직함이 적혀 있다. 삼보컴퓨터에서 추진중인 중국법인의 설립, 직원 선발, 현지 관계자 접촉 등 모든 업무를 총괄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업무다. 공직 시절처럼 국장-차관-장관의 결재라인도 없을 뿐더러 강사장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일을 진행해야 한다. 전권이 주어진 만큼 책임도 따르는 법. 강사장은 이를 위해 아직 집기도 제대로 들여놓지 않은 사무실 벽에 대형 중국지도를 붙여 놓았고 틈나는 대로 늦깎이 중국어 공부에도 매달리고 있다. 15년 공직 생활을 마감하고 난 뒤 ‘인생 이모작’을 위한 새로운 모내기가 시작된 것이다.

    최근 공직사회의 침체된 분위기와 민간 분야의 벤처열풍이 맞물리면서 ‘벤처행 엑소더스’에 몸을 실은 경제 관료 출신들은 강사장뿐만이 아니다. 지난 3, 4월 산업자원부 정보통신부 금융감독위원회 등 경제부처의 엘리트 관료들이 줄줄이 옷을 벗고 나오면서 공무원 사회는 이미 심리적 공황 상태에 빠져들었다.

    엘리트 공무원 변신은 무죄

    산업자원부 무역조사실장을 거친 구본룡씨(행시 16회)는 인터넷과 오프라인 광고대행업체인 온앤오프를 설립하면서 회장을 맡았고 정보통신부 공종렬국장(행시 22회)은 전자신문 자회사인 ET뉴스 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기술거래소 설립을 주도하다가 지난 3월 공직을 떠난 산업자원부 권용원 산업기술개발과장(기술고시 21회)은 지난 5월3일 인터넷 종합 솔루션업체인 다우기술 부사장에 취임했다. 권부사장은 현재 다우기술의 미주지사 설립 작업을 총괄하고 있다. 공대 출신의 재경직 공무원이라는 독특한 경력에 산업자원부 초대 전자상거래 과장을 맡아 화제를 모았던 박용찬씨(행시 26회) 역시 전자상거래 과장 4개월만에 공직을 떠나, 실리콘밸리 근무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인터젠 인베스트먼트 앤 컨설팅 그룹이라는 e비즈니스 컨설팅 회사 창립을 준비하고 있다.

    금융감독위원회 구조개혁기획단에서 은행구조조정을 총괄했던 김범석서기관(행시 24회)은 인터넷 종합증권사인 키움닷컴증권 사장으로 변신했다. 지난해 6월 일찌감치 사표를 던졌던 금감위 조창현 기업구조조정추진팀장 역시 최근 금융기관에 대한 신용평가업무를 담당하는 대일톰슨뱅크와치신용평가정보 대표이사를 맡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최근 공직사회를 떠나 민간 기업으로 자리를 옮긴 관료들의 공통적 특징은 대부분 각 부처에서 고시 동기들에 비해 승진 속도나 근무 부서 등에서 선두를 달리던 엘리트 관료들이라는 것. 이들의 사표 행렬이 충격을 던졌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정통부 출신의 강문석사장은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과 경제수석실 정보통신정책과 등을 두루 거쳤고 재경부 출신의 김범석사장도 은행과 금융총괄과 금융제도과 등 금융 관련 부서에서만 10년을 근무한 이 분야 베테랑이다.

    이처럼 잘 나가던 경제 관료들이 잇따라 옷을 벗게 된 원인은 크게 두가지. 미래에 대한 전망 부재와 경제적 이유가 그것이다. 사명감 하나로 버티기에는 공무원 사회의 경직성에 대한 주변의 시선이 너무 차가웠다는 것이 이들의 한결같은 고백이다. 게다가 야근을 밥먹듯이 하며 열심히 일해 훌륭한 성과를 내도 별도의 인센티브나 보상이 돌아오지 않는 시스템 아래서는 열과 성을 바쳐 일할 맛이 나지 않는다는 것도 이들이 공직에 대한 미련을 과감히 포기한 이유가 됐다.

    그러나 역시 빠듯한 월급만으로 공무원 생활을 버텨야 하는 상황도 무시하지 못할 이유로 작용했다. 공직 생활 15년의 강문석사장은 “공무원 시절 내 연봉 액수가 기업체 임원을 지내고 있는 친구들이 1년 동안 내는 세금보다도 적다는 사실을 알고 비애를 느낀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기억했다. 억대 연봉을 받으면서 신설 증권사로 옮긴 경우는 정도가 더욱 심하다. 키움닷컴증권 김범석사장은 한 걸음 더 나아가 “현재 받고 있는 연봉의 세금 공제액이 공무원 시절 연봉의 몇 배는 될 것”이라고 말했다. 공무원 생활 20년을 내다보는 중앙부처 과장급 연봉이라야 3000만~4000만원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공직 사회의 상대적 박탈감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아니다. 김사장은 “민간 기업으로 옮긴 뒤에도 동료나 후배 공무원들로부터 ‘함께 일하고 싶으니 일자리라도 알아봐달라’는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고 말해 경우에 따라서는 2차 엑소더스가 일어날 가능성마저 암시했다.

    물론 엑소더스를 감행한 공무원들이 모두 억대 연봉을 노리거나 이러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은 아니다. 산자부 전자상거래 과장을 지낸 박용찬씨는 “대기업 임원이나 중견 벤처기업 대표를 맡아달라는 제의도 여러 차례 받았지만 공직 사회의 경험을 살려 좀더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어 e비즈니스 컨설팅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망 벤처기업을 발굴해 투자를 유치하고 국내 기업과 미국 등 해외 네트워크를 연결하는 사업을 위해 이미 200명 정도의 박사급 전문 인력 풀을 확보해 놓고 있다고 밝혔다.

    공무원 변신의 또다른 사례로 각 부처의 영향력 아래 놓여 있는 관련 기업체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도 있다. 과거 퇴물 관료들의 자리 만들어주기나 낙하산 인사라는 비난도 있었지만 최근에는 관련 공기업들이 모두 민영화 일정을 앞두고 있어 이들의 마음이 결코 편한 것만은 아니다.

    한국전력의 통신회선 임대사업 자회사인 파워콤의 경우 최근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 출신이 7명이나 둥지를 틀었다. 이 회사 사장 역시 산업자원부 자원정책실장을 지낸 행시 10회의 서사현씨. 파워콤 관계자는 “민영화를 앞두고 최근 팀제 도입, 결재라인 간소화 등으로 대대적인 체질 개선 작업이 진행중인 만큼 소관 부처의 낙하산 인사로 보지는 말아달라”고 주문했다. 민간 기업의 체질에 적응하기 위한 ‘몸만들기’ 작업이 한창이라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공기업 자회사로 옮긴 공무원들도 덩달아 긴장할 수밖에 없다. 정보통신부 서기관 출신으로 최근 파워콤에 합류한 구교광이사는 “최근 가장 많이 떠오르는 단어가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라는 말로 요즘 심경을 요약했다. 말하자면 엑소더스를 선택한 관료들은 모두 공무원 시절 기업인들이나 사업자단체에 대해 감독과 규제를 하던 입장에서 오히려 감독 당국의 인허가를 받아야 하는 상황으로 입장이 바뀐 것이다. 공무원 시절 남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가 없었던 사람들이 여기저기 쫓아다니며 회사를 홍보하고 ‘도와달라’고 하소연하고 다녀야 하니 죽을 맛이라는 말이다. 이들은 이를 두고 ‘갑과 을의 입장이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조창현사장은 “공무원 시절에는 기업인들을 청사로 불러들여 만났으므로 하루에 10명까지도 만날 수 있었지만 지금은 기껏해야 3명 정도 만나고 나면 하루가 저문다”고 말했다.

    관료사회의 옷을 벗고 온실에서 양지로 나온 이들 관료 출신 기업인들이 부딪히는 현실은 무척이나 냉혹하다. 김범석사장은 “비즈니스 세계에서는 연공서열이란 없다. 적자생존이 적용될 뿐이다”고 말했다. 물론 이들이 공직에서 벗어나 가장 많이 느끼는 것은 ‘세상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르게 변한다’는 것이다. 이들이 공무원 신분이던 시기와 지금이 변화의 속도라는 면에서 달라진 것이 없다면 정답은 한가지가 아닐까. 과천에서는 변화하는 세상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 그런 측면에서 공무원들의 2차 엑소더스는 이미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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