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부터 진달래 피기만을 기다렸다. ‘진달래꽃을 수매한다’는 말 때문이었다. 쌀이나 보리처럼 꽃을 수매한다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싶었다. 전국에 유명한 진달래 군락지야 창녕의 화왕산, 여천의 영취산, 마산의 무학산, 대구의 비슬산, 장흥의 천관산 등등 쌔고 쌨다. 하지만, 진달래를 수매하는 곳은 면천밖에 없다. 그 곳에 진달래꽃으로 술을 담는 두견주 제조장이 있어서다.
두견주 기능 보유자인 인간문화재 박승규씨와 몇 차례 연락을 하였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박승규씨는 한국전통민속주협회 회장 일을 보고 있어 서울 사무소와 지방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비도 적게 오고 날씨도 찬 편이라 진달래가 유난히 늦다고 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근 일주일만에 다시 연락하였더니 1kg에 5000원하는 진달래꽃 수매가 벌써 끝났다고 했다. 전화번호라도 남기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여느 해보다 꽃이 좋지 않아서 수매 기간이 짧았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진달래 말리는 장면이라도 보려고 부랴부랴 면천으로 향했다. 면천에 들어서니 벚꽃잎은 바람에 날려 길을 덮고, 진달래가 군데군데 수줍은 시골 처녀처럼 길가에 나와 있었다. 사선으로 비껴드는 아침 햇살을 받아, 진달래꽃은 마치 꽃등을 밝히고 있는 듯 눈부셨다. 길가에 무더기로 핀 진달래 언덕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곳에 ‘진달래 동산’이라는 작은 팻말이 꽂혀 있어서, 애정으로 보호하고 있는 성의도 엿보였다. 면천에는 그렇게 팻말을 꽂아 둔 진달래 동산이 십여 군데가 된다고 했다.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은 오래 전부터 인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백제 시대에는 혜군이라 불렸고, 통일 신라 시대에 혜성군이었다가 고려 시대엔 면주로 승격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면천군이 되어 22개 면을 거느렸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이 61세 환갑의 나이(1797년)에 군수로 부임해온 곳도 이 곳이었다. 그때 당진읍은 한 단계 아래인 현에 지나지 않았다.
옛 명성에 견주면 오늘의 면천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기껏 옛 일을 돌이켜볼 수 있는 것이라곤, 향교와 무너진 성터뿐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 전기 ‘과정록’에는 그 향교와 성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성 동쪽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사방 100보쯤 됐는데 황폐해진 지 여러 해 되어 물을 가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집해 연못을 준설하여 도랑물이 그 속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이에 물이 가득 고여 넘실거렸으며,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았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6각의 초정(草亭)을 세워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초정은 없어졌지만, 그 연못은 아직 남아 있다. 향교로 들어가는 길을 넓히려고 물이 다 빠져 있지만, 길 안내를 한 면천 고경수면장님은 그곳에 물을 새로 가두고 그 둘레에 산책로를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그곳에 박지원의 옛일을 상기시키는 작은 팻말 하나 서 있어도 좋을 성싶다.
면천 두견주 제조장(0457-356-4555)은 면천 초등학교를 바라보고 오른편 뒤쪽에 터를 잡고 있었다. 양조장 앞에는 안샘이라는 우물이 보호각을 쓰고 있었다. 진달래꽃, 곧 두견화로 빚은 두견주 탄생 전설이 담긴 우물이다.
마한 시대 때부터 헤아려 근 2000년의 면천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은 면천 복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 공신인 복지겸이다. 그 복지겸이 큰 병이 들어서 몸져 눕게 되었다. 어떤 명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그 당시 복지겸에게는 12세였다고도 하고, 17세였다고도 하는 딸 영랑이 있었다. 영랑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마을 뒷산 아미산에 올라가 빌었다. 그렇게 100일 동안 기도를 올렸는데, 마지막 날 밤 꿈에 산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아미산 진달래꽃을 따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 물로 빚어 아버지께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두 그루 은행나무를 심어서 정성껏 기도하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영랑은 그 말대로 술을 빚어 드렸고, 아버지 병은 이내 낫게 되었다. 이때부터 면천의 두견주가 생겨났고, 그때 심은 은행나무는 근 1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높이 자라 면천을 굽어보고 있다.
면천 사람들은 봄이면 진달래술을 담가 먹는다. 술 항아리에 진달래를 담고 소주를 부어서 한달 이상 재놓았다가 마시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전통적인 방법은 청주를 담그면서 그 안에 진달래를 섞는 것이다. 약술을 담그려면 진달래를 많이 넣는데 그러면 술빛이 아주 붉어진다.
1986년에 두견주 인간문화재로 선정된 박승규씨도 이 방법으로 술을 담근다. 우선 찹쌀을 손끝으로 누르면서 뼈없이 문드러질 만큼 푹 삶는다. 이를 지에밥이라고 하는데, 지에밥을 식혀 누룩 가루와 안샘 물을 혼합하여 항아리에 담아 5일이 지나면 밑술이 완성된다. 그리고 찹쌀 1말, 누룩 2되, 물 5되, 진달래 1되 3홉의 비율로 덧술을 만들어 밑술과 섞는다. 그 상태로 50일 가량 발효시키고 나서 술을 압착기로 걸러낸다. 걸러낸 술을 20일간 정착하면 맛을 안정시킨 뒤에 출고한다. 620ml 한 병에 소비자가격으로 1만원 한다. 우리 나라 최고의 곡주 값으론 그다지 비싼 편은 아니다.
두견주는 19도로 곡주 중에서는 도수가 센 편이다. 입 천장을 톡 쏘는 날카로운 느낌과 진달래에서 배어난 단맛까지 돈다. 박승규씨에게 달리 설탕 같은 첨가제를 넣느냐고 묻자, “두견주는 찹쌀, 누룩과 진달래 세 가지 재료만 쓰지 다른 첨가물은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단맛이 도는데 왜 설탕을 넣겠습니까. 두견주는 어찌보면 단조로워 보이는데, 술맛을 내는 중요한 변수는 온도 조절과 발효 기간에 달려 있습니다”고 했다. 두견주는 진달래 때문에 다른 곡주와는 달리 담황색의 붉은 기운이 돈다. 소주는 너무 쓰고 독해서 싫고, 맥주는 너무 차고 배가 불러서 싫은 사람들에게는 두견주가 제격이다.
두견주 석 잔에 5리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은근하게 취한다는 면천 두견주에 입맛을 들이면, 사시사철 진달래 향에 잠길 수 있을 것이고, 사라진 면천의 천년 영화가 아름다운 영랑 전설과 함께 되살아 올 것이다.
두견주 기능 보유자인 인간문화재 박승규씨와 몇 차례 연락을 하였지만, 서로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박승규씨는 한국전통민속주협회 회장 일을 보고 있어 서울 사무소와 지방을 자주 왕래하고 있었다. 게다가 올해는 비도 적게 오고 날씨도 찬 편이라 진달래가 유난히 늦다고 했다.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고 근 일주일만에 다시 연락하였더니 1kg에 5000원하는 진달래꽃 수매가 벌써 끝났다고 했다. 전화번호라도 남기지 않은 것이 잘못이었다. 여느 해보다 꽃이 좋지 않아서 수매 기간이 짧았다고 한다.
더 늦기 전에 진달래 말리는 장면이라도 보려고 부랴부랴 면천으로 향했다. 면천에 들어서니 벚꽃잎은 바람에 날려 길을 덮고, 진달래가 군데군데 수줍은 시골 처녀처럼 길가에 나와 있었다. 사선으로 비껴드는 아침 햇살을 받아, 진달래꽃은 마치 꽃등을 밝히고 있는 듯 눈부셨다. 길가에 무더기로 핀 진달래 언덕이 곳곳에 눈에 띄었다. 그 곳에 ‘진달래 동산’이라는 작은 팻말이 꽂혀 있어서, 애정으로 보호하고 있는 성의도 엿보였다. 면천에는 그렇게 팻말을 꽂아 둔 진달래 동산이 십여 군데가 된다고 했다.
충청남도 당진군 면천은 오래 전부터 인근의 중심지 역할을 했다. 백제 시대에는 혜군이라 불렸고, 통일 신라 시대에 혜성군이었다가 고려 시대엔 면주로 승격되었으며 조선 시대에 면천군이 되어 22개 면을 거느렸다. ‘열하일기’를 쓴 박지원이 61세 환갑의 나이(1797년)에 군수로 부임해온 곳도 이 곳이었다. 그때 당진읍은 한 단계 아래인 현에 지나지 않았다.
옛 명성에 견주면 오늘의 면천은 너무나 보잘 것 없고 초라하기 짝이 없다. 기껏 옛 일을 돌이켜볼 수 있는 것이라곤, 향교와 무너진 성터뿐이다. 박지원의 아들 박종채가 쓴 아버지 전기 ‘과정록’에는 그 향교와 성에 관한 얘기가 나온다.
‘성 동쪽 향교 앞에 버려진 연못이 있었다. 사방 100보쯤 됐는데 황폐해진 지 여러 해 되어 물을 가둘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술과 음식을 마련한 후 백성들을 모집해 연못을 준설하여 도랑물이 그 속으로 흘러들게 만들었다. 이에 물이 가득 고여 넘실거렸으며, 가뭄이 들어도 물이 줄지 않았다. 연못 한가운데에는 돌을 쌓아 작은 섬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곳에 6각의 초정(草亭)을 세워 건곤일초정(乾坤一草亭)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초정은 없어졌지만, 그 연못은 아직 남아 있다. 향교로 들어가는 길을 넓히려고 물이 다 빠져 있지만, 길 안내를 한 면천 고경수면장님은 그곳에 물을 새로 가두고 그 둘레에 산책로를 만들 예정이라고 했다. 그곳에 박지원의 옛일을 상기시키는 작은 팻말 하나 서 있어도 좋을 성싶다.
면천 두견주 제조장(0457-356-4555)은 면천 초등학교를 바라보고 오른편 뒤쪽에 터를 잡고 있었다. 양조장 앞에는 안샘이라는 우물이 보호각을 쓰고 있었다. 진달래꽃, 곧 두견화로 빚은 두견주 탄생 전설이 담긴 우물이다.
마한 시대 때부터 헤아려 근 2000년의 면천 역사에서 가장 출중한 인물은 면천 복씨의 시조이자 고려 개국 공신인 복지겸이다. 그 복지겸이 큰 병이 들어서 몸져 눕게 되었다. 어떤 명약을 써도 효과가 없었다. 그 당시 복지겸에게는 12세였다고도 하고, 17세였다고도 하는 딸 영랑이 있었다. 영랑은 아버지의 병을 낫게 해달라고 마을 뒷산 아미산에 올라가 빌었다. 그렇게 100일 동안 기도를 올렸는데, 마지막 날 밤 꿈에 산신으로부터 계시를 받았다. 아미산 진달래꽃을 따서 술을 빚되 반드시 안샘 물로 빚어 아버지께 드리라고 했다. 그리고 두 그루 은행나무를 심어서 정성껏 기도하면 아버지의 병이 나을 것이라고 했다. 영랑은 그 말대로 술을 빚어 드렸고, 아버지 병은 이내 낫게 되었다. 이때부터 면천의 두견주가 생겨났고, 그때 심은 은행나무는 근 11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높이 자라 면천을 굽어보고 있다.
면천 사람들은 봄이면 진달래술을 담가 먹는다. 술 항아리에 진달래를 담고 소주를 부어서 한달 이상 재놓았다가 마시는 것이 가장 쉬운 방법이다. 전통적인 방법은 청주를 담그면서 그 안에 진달래를 섞는 것이다. 약술을 담그려면 진달래를 많이 넣는데 그러면 술빛이 아주 붉어진다.
1986년에 두견주 인간문화재로 선정된 박승규씨도 이 방법으로 술을 담근다. 우선 찹쌀을 손끝으로 누르면서 뼈없이 문드러질 만큼 푹 삶는다. 이를 지에밥이라고 하는데, 지에밥을 식혀 누룩 가루와 안샘 물을 혼합하여 항아리에 담아 5일이 지나면 밑술이 완성된다. 그리고 찹쌀 1말, 누룩 2되, 물 5되, 진달래 1되 3홉의 비율로 덧술을 만들어 밑술과 섞는다. 그 상태로 50일 가량 발효시키고 나서 술을 압착기로 걸러낸다. 걸러낸 술을 20일간 정착하면 맛을 안정시킨 뒤에 출고한다. 620ml 한 병에 소비자가격으로 1만원 한다. 우리 나라 최고의 곡주 값으론 그다지 비싼 편은 아니다.
두견주는 19도로 곡주 중에서는 도수가 센 편이다. 입 천장을 톡 쏘는 날카로운 느낌과 진달래에서 배어난 단맛까지 돈다. 박승규씨에게 달리 설탕 같은 첨가제를 넣느냐고 묻자, “두견주는 찹쌀, 누룩과 진달래 세 가지 재료만 쓰지 다른 첨가물은 전혀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단맛이 도는데 왜 설탕을 넣겠습니까. 두견주는 어찌보면 단조로워 보이는데, 술맛을 내는 중요한 변수는 온도 조절과 발효 기간에 달려 있습니다”고 했다. 두견주는 진달래 때문에 다른 곡주와는 달리 담황색의 붉은 기운이 돈다. 소주는 너무 쓰고 독해서 싫고, 맥주는 너무 차고 배가 불러서 싫은 사람들에게는 두견주가 제격이다.
두견주 석 잔에 5리를 못 간다는 말이 있다. 그만큼 은근하게 취한다는 면천 두견주에 입맛을 들이면, 사시사철 진달래 향에 잠길 수 있을 것이고, 사라진 면천의 천년 영화가 아름다운 영랑 전설과 함께 되살아 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