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웨이에서 왔다”고 하지 않고 “베르겐에서 왔다”고 할 만큼 문화적 자긍심이 드높은 소도시 베르겐. 대작곡가 그리그의 고향답게 레코드숍의 음반 비중도 유독 ‘그리그적(的)’이다. 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현역 연주가 코너. 바로 ‘레이프 오베 안스네스’(29)라는 이름이 금방 도드라지는 곳이다. 안스네스의 고향은 베르겐이 아니라 카모이라는, 역시 인구 4만 정도의 소도시지만 그의 인기는 노르웨이 전체를 관통한다. 사실 그는 노르웨이가 배출한 최고의 현역 피아니스트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은 명연주자다.
그 스스로는 낭만주의 작곡가들을 선호하는 편이지만 어떤 연주든 순도 높은 정수를 잘 드러내 보인다는 점에서 전방위적이다. 바흐와 하이든은 물론 슈베르트, 브리튼, 쇼스타코비치, 프로코피예프도 그의 자장(磁場) 안에 자연스럽게 포섭된다. 유달리 투명하고 또렷한 그의 연주 스타일은 어떤 작곡가의 작품이든 참신하고 개성적인 것으로 바꿔 놓는다. 서늘하고 청명한 느낌이랄까. ‘스칸디나비아풍(風)’ 이라고 부를 만한 개성이고 매력이다.
이러한 그의 특성을 가장 또렷하게 느낄 수 있는 것은 그리그의 피아노협주곡(버진레코드)에서다. 드미트리 키타옌코(현 KBS교향악단 상임지휘자)가 지휘하는 베르겐필하모닉과의 협연으로 전개되는 이 음반에서, 안스네스는 그야말로 최선을 다한 명인기를 보여준다. 나무랄 데 없는 힘과 균형, 그리고 리듬감각…. 그의 물 흐르는 듯한 연주는 같은 연원(淵源)을 가진 이들만이 공유할 수 있는 속깊은 교감으로 넘실댄다. 깎아지른 듯한 피오르드 계곡과, 계곡이 끝나는 곳에서 시작되는 감청색 바다… 인간의 왜소함을 절감케 하는 노르웨이 산하의 장엄한 풍경이, 그의 손끝에서 선연히 그려지는 것이다.
1970년생인 안스네스는 네살 때부터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고, 16세 때 베르겐음악원에서 지리 흘링카로부터 배웠다. 그로부터 3년 뒤 뉴욕과 워싱턴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했으며, 캐나다 영국 등지로 그 여세를 몰아갔다. 베를린필, 클리블랜드심포니, 로스앤젤레스필, 런던필 등은 그가 협연한 유명 오케스트라의 일부다.
안스네스는 대형 음반사인 EMI 소속이다. 화려한 경력에 유명 레이블까지 잡았으니 그의 성공은 이미 예약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세속의 명성에 초연한 탓이다. EMI측조차 “그의 빼어난 연주는 인정하지만 스타 기질이 부족해 큰 대중적 성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평가할 정도다. 12월21일로 예정된 내한 연주회(예술의전당 콘서트홀)의 레퍼토리에서도 대중과 영합하려는 의도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 안스네스는 남다른 공정성으로 평판이 높은 독일음반비평가상(2회 수상)을 비롯해 그리그상, 레빈상, 노르웨이음반비평가상, 길모어상 등을 받았다. 이번 내한 연주회를 놓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다
(문의:음연 02-543-5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