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찌하여 이 지경이 되었을까?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인 맹씨 행단(孟氏 杏壇)을 들어서자, 이맛살부터 찌푸려졌다. 600살이 넘은, 귀기(鬼氣) 어린 두 그루의 은행나무 옆으로 채석장이 보여서였다. 옛 사람들은 집터를 잡을 때면 주변의 산수 경개를 살피고 그 조화를 따졌다. 그 흔적이 역력한 맹씨 행단은, 풍수 좋고 안전한 곳에 터를 잡았기에 병화와 수재를 입지 않고 670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그런데 지금은 안전하지 못하다. 행단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설화산의 한쪽 날개가 까뭉개졌기 때문이다. 골재를 채취하는 채석장이 삼십년 가량 산을 파헤친 결과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자리한 이 맹씨 행단은 어떤 집인가. 택호(宅號)를 풀이하면,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다. 맹씨는 맹자의 후손으로, 신라 진성여왕 2년, 서기 888년에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다. 고려 충숙왕 때에 맹의(孟儀)가 아산 지역인 신창백(新昌伯) 작위를 받으면서 신창 맹씨의 가문을 새롭게 열었다.
이 집의 원 주인은 고려 명장이자 죽어서 무속인들로부터 가장 영험한 장군신으로 섬겨지는 최영(1316~88)이었다. 충남 홍성 홍북면 노은리에서 출생한 최영이 어떤 경위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최영이 15세 때인 1330년에 그의 아버지 최원직이 이 집을 지었고, 최영이 양광도(현재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 순찰사로 있을 때에 이 집에 기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에게 멸족될 때까지 최영 집안은 이 행단에서 살았다. 그 뒤로 주인 잃고 버려진 집에 들어와 산 사람은 맹희도였다. 맹희도는 정몽주와 동문수학한 사이로, 최영 집안과는 한 동네에 산 적이 있었다.
최영 장군이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 배나무 밭에서 용이 승천하기에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보았다.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아이들을 꾸짖으니 모두 달아나는데 한 아이만 이 배를 가지고 와서 잘못을 고했다. 최장군은 누구 집 자식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맹희도이고 할아버지는 맹유였다. 서로 잘 아는 처지였다. 최장군은 맹유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고, 예의바른 손자를 칭찬했다. 그 인연으로 최장군은 그 아이를 손녀 사위로 삼게 되었다.
그 아이가, 황희와 더불어 조선 왕조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기려지는 맹사성(1360~1438)이다. 그의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 멸망과 함께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리라”고 결심하면서 옛 최영의 집을 개수하여 살게 된다. 맹희도는 새 왕조로부터의 거듭된 출사 요구를 뿌리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절의를 지키지만, 젊은 아들 맹사성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막지 않았다.
맹씨 행단에 남아 있는 고려식 옛집은 좌우 대칭형으로 생긴 정면 4칸, 측면 3칸짜리 구조다. 가운데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좌우로 온돌방이 앉혀졌다. 동쪽 벽에는 아침 햇살이 잘 들도록 정자살의 붙박이 광창과 쌍여닫이 문, 외여닫이 창이 나있다. 안방에는 마당을 내다볼 수 있는 앙증맞은 눈꼽재기창이 있다. 창마다 문마다 크기와 모양이 달라서 그 쓰임새를 눈여겨볼 만하다. 이같은 건축물은 나라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서, 중국 불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맹사성은 이 집에서 살면서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 시조를 지었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濁冗·막걸리) 계변(溪邊)에 금린어 안주 삼고/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늘해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소정(小艇·작은 배)에 그물 실어 흘리 띄워 던져 두고/ 이 몸이 소일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한자가 넘다)/ 삿갓 비끼 쓰고 누역(縷繹·도롱이)으로 옷을 삼고/ 이 몸이 춥지 안함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로, 맹씨 행단의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음률에 밝고 대금도 스스로 만들어 불 줄 알았던 맹사성이 가락에 실어 부르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4절까지 된 이 작품은 최초의 연시조이며, 자연을 찬탄한 수많은 강호가(江湖歌)의 원류로 국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현재 맹씨 행단에서는 맹사성의 21대 손이 대를 이어 살고 있고, 집 앞에는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 있다. 행단 옆에는 구괴정(九槐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종 때에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허조가 좌의정인 맹사성의 집을 방문하여 느티나무 세 그루씩 모두 아홉 그루를 그 둘레에 심었다는 정자다. 지금은 허리가 휘어진 한 그루만이 간신히 쇠기둥에 몸을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그 구괴정에서는 설화산의 흉물스런 채석장이 더 확연하게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삼십년째 계속되어온 채석장의 사업허가는 올해 말로 끝난다. 하지만 근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골재 채취업자가 사업 기간을 5년 연장하는 신청서를 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맹씨 문중의 맹국섭씨는 문화재관리국에 탄원서를 내보지만, 공사가 조금씩 조금씩 한없이 연장되어 설화산이 다 뭉개질 때까지 진행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발파할 때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주춧돌이 흔들려, 마을 집들이 금가고 맹씨 행단마저도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라며 후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탄했다.
맹씨 행단의 장래가, 맹씨들만의 문제이겠는가. 최영 장군의 숨결이 느껴지고 맹사성의 강호사시가가 유유자적하게 흘러나오는 듯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인 맹씨 행단을 온전하게 보존해야 하는 몫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인 맹씨 행단(孟氏 杏壇)을 들어서자, 이맛살부터 찌푸려졌다. 600살이 넘은, 귀기(鬼氣) 어린 두 그루의 은행나무 옆으로 채석장이 보여서였다. 옛 사람들은 집터를 잡을 때면 주변의 산수 경개를 살피고 그 조화를 따졌다. 그 흔적이 역력한 맹씨 행단은, 풍수 좋고 안전한 곳에 터를 잡았기에 병화와 수재를 입지 않고 670년의 세월을 견뎌왔다. 그런데 지금은 안전하지 못하다. 행단에서 좌청룡에 해당하는 설화산의 한쪽 날개가 까뭉개졌기 때문이다. 골재를 채취하는 채석장이 삼십년 가량 산을 파헤친 결과다.
충남 아산시 배방면 중리에 자리한 이 맹씨 행단은 어떤 집인가. 택호(宅號)를 풀이하면, 맹씨가 사는 은행나무 단이 있는 집이다. 맹씨는 맹자의 후손으로, 신라 진성여왕 2년, 서기 888년에 중국에서 귀화한 성씨다. 고려 충숙왕 때에 맹의(孟儀)가 아산 지역인 신창백(新昌伯) 작위를 받으면서 신창 맹씨의 가문을 새롭게 열었다.
이 집의 원 주인은 고려 명장이자 죽어서 무속인들로부터 가장 영험한 장군신으로 섬겨지는 최영(1316~88)이었다. 충남 홍성 홍북면 노은리에서 출생한 최영이 어떤 경위로 이곳에 살게 되었는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 최영이 15세 때인 1330년에 그의 아버지 최원직이 이 집을 지었고, 최영이 양광도(현재의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 순찰사로 있을 때에 이 집에 기거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화도 회군을 한 이성계에게 멸족될 때까지 최영 집안은 이 행단에서 살았다. 그 뒤로 주인 잃고 버려진 집에 들어와 산 사람은 맹희도였다. 맹희도는 정몽주와 동문수학한 사이로, 최영 집안과는 한 동네에 산 적이 있었다.
최영 장군이 하루는 낮잠을 자고 있었다. 꿈에 배나무 밭에서 용이 승천하기에 놀라 깨어 밖으로 나가보았다. 동네 아이들이 나무에 올라가 배를 따고 있었다. 아이들을 꾸짖으니 모두 달아나는데 한 아이만 이 배를 가지고 와서 잘못을 고했다. 최장군은 누구 집 자식인지 물었다. 아버지는 맹희도이고 할아버지는 맹유였다. 서로 잘 아는 처지였다. 최장군은 맹유를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고, 예의바른 손자를 칭찬했다. 그 인연으로 최장군은 그 아이를 손녀 사위로 삼게 되었다.
그 아이가, 황희와 더불어 조선 왕조 초기의 명재상이자 청백리로 기려지는 맹사성(1360~1438)이다. 그의 조부 맹유는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으로 고려 멸망과 함께 순절했고, 아버지 맹희도는 “국가와 더불어 기쁨과 근심을 같이하리라”고 결심하면서 옛 최영의 집을 개수하여 살게 된다. 맹희도는 새 왕조로부터의 거듭된 출사 요구를 뿌리치고 후진 양성에 힘쓰며 절의를 지키지만, 젊은 아들 맹사성이 벼슬길에 나가는 것은 막지 않았다.
맹씨 행단에 남아 있는 고려식 옛집은 좌우 대칭형으로 생긴 정면 4칸, 측면 3칸짜리 구조다. 가운데는 넓은 대청마루가 있고 좌우로 온돌방이 앉혀졌다. 동쪽 벽에는 아침 햇살이 잘 들도록 정자살의 붙박이 광창과 쌍여닫이 문, 외여닫이 창이 나있다. 안방에는 마당을 내다볼 수 있는 앙증맞은 눈꼽재기창이 있다. 창마다 문마다 크기와 모양이 달라서 그 쓰임새를 눈여겨볼 만하다. 이같은 건축물은 나라 안에서 찾아보기 어려워서, 중국 불교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한다.
맹사성은 이 집에서 살면서 산천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임금의 은혜에 감사한 시조를 지었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탁료(濁冗·막걸리) 계변(溪邊)에 금린어 안주 삼고/ 이 몸이 한가하옴도 역군은(亦君恩)이샷다.
강호에 여름이 드니 초당에 일이 없다/ 유신(有信)한 강파(江波)는 보내느니 바람이로다/ 이 몸이 서늘해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가을 드니 고기마다 살져 있다/ 소정(小艇·작은 배)에 그물 실어 흘리 띄워 던져 두고/ 이 몸이 소일하옴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에 겨울이 드니 눈 깊이 자히 남다(한자가 넘다)/ 삿갓 비끼 쓰고 누역(縷繹·도롱이)으로 옷을 삼고/ 이 몸이 춥지 안함도 역군은이샷다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로, 맹씨 행단의 앞을 흐르는 금곡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고 추정된다. 음률에 밝고 대금도 스스로 만들어 불 줄 알았던 맹사성이 가락에 실어 부르게 했을 것으로 여겨진다. 4절까지 된 이 작품은 최초의 연시조이며, 자연을 찬탄한 수많은 강호가(江湖歌)의 원류로 국문학사에서 비중 있게 다뤄지고 있다.
현재 맹씨 행단에서는 맹사성의 21대 손이 대를 이어 살고 있고, 집 앞에는 고불 맹사성 기념관이 있다. 행단 옆에는 구괴정(九槐亭)이라는 정자가 있다. 세종 때에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허조가 좌의정인 맹사성의 집을 방문하여 느티나무 세 그루씩 모두 아홉 그루를 그 둘레에 심었다는 정자다. 지금은 허리가 휘어진 한 그루만이 간신히 쇠기둥에 몸을 의지해 살아가고 있다. 그 구괴정에서는 설화산의 흉물스런 채석장이 더 확연하게 보인다.
다행스럽게도 삼십년째 계속되어온 채석장의 사업허가는 올해 말로 끝난다. 하지만 근심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골재 채취업자가 사업 기간을 5년 연장하는 신청서를 냈다는 소문이 돌고 있기 때문이다. 맹씨 문중의 맹국섭씨는 문화재관리국에 탄원서를 내보지만, 공사가 조금씩 조금씩 한없이 연장되어 설화산이 다 뭉개질 때까지 진행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하고 있었다. 발파할 때마다 지진이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리고 주춧돌이 흔들려, 마을 집들이 금가고 맹씨 행단마저도 언제 허물어질지 모르는 위태한 상황이라며 후손된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있음을 자탄했다.
맹씨 행단의 장래가, 맹씨들만의 문제이겠는가. 최영 장군의 숨결이 느껴지고 맹사성의 강호사시가가 유유자적하게 흘러나오는 듯한, 이 땅에서 가장 오래된 살림집인 맹씨 행단을 온전하게 보존해야 하는 몫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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