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이 운용하는 랜싯 드론. [ZALA Aero Group 제공]
화력에서 밀리는 러시아군
우크라이나군이 155㎜ 견인포를 발사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군은 화력 열세를 드론으로 만회하고 있다. [뉴시스]
이런 상황에서 러시아군의 부족한 화력을 보충해주는 게 랜싯(Lancet) 드론이다. 흔히 ‘자폭 드론’으로 소개되는 랜싯 드론의 정확한 명칭은 ‘배회탄약(loitering munition)’이다. 준수한 성능과 높은 신뢰성, 낮은 생산비용 덕에 엄청난 양이 생산돼 전후방 가리지 않고 광범위하게 쓰이고 있다. 랜싯은 러시아 칼라시니코프그룹 자회사가 2019년 개발했다. 칼라시니코프그룹은 인류 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대량살상무기’라는 AK 소총을 개발한 러시아의 대표적인 무기업체다. 랜싯은 전장 정찰 및 타격을 위해 만들어진 배회탄약 시스템이다. 배회탄약은 느린 속도로 전장 상공을 빙빙 돌며 정찰하다가 목표물이 포착되면 돌입해 자폭하는 무기다. 당초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지만 러시아군이 포병 화력 부족을 겪으면서 이번 전쟁 최고 ‘라이징 스타’로 떠오르고 있다.
기본 모델인 랜싯-3는 보병이 직접 들고 나르거나 소형 차량에 실어 운용할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 기본 중량은 12㎏이고 전동모터로 비행한다. 시속 80~110㎞ 속도로 최대 40분간 체공할 수 있으며, 3~5㎏의 탄두와 사진·영상 촬영이 가능한 전자광학 카메라가 탑재된다. 랜싯-3는 전장 상공을 비행하다가 우크라이나군 전차나 장갑차, 포병무기를 발견하면 그대로 돌진해 자폭한다. 탑재된 카메라의 해상도가 꽤 좋아서 조종자 숙련도에 따라 고속 표적도 정확히 타격할 수 있다.
최근 전선에서 러시아군 랜싯은 상당한 전과를 올리고 있다. 서방이 우크라이나군에 제공한 레오파르트 2, M1A1 에이브람스, 챌린저 2 전차 상당수가 랜싯에 격파됐다. 한국산 K9 자주포 차체를 사용한 것으로 유명한 폴란드 AHS 크라프 자주포, 미국 M109 자주포, 프랑스 세자르 자주포는 물론, 독일의 첨단 방공 시스템 IRIS-T SLM, 영국제 스토머 HVM 같은 방공무기조차 랜싯의 마수를 피하지 못했다. 랜싯은 심지어 흑해에 떠 있는 우크라이나군 경비정을 찾아내 대파하기도 했다.
랜싯, 불발 많지만 ‘가성비’ 우수
물론 랜싯도 완벽한 무기는 아니다. 목표에 명중해도 실제로 터지지 않는 경우가 적잖기 때문이다. 전장에서 촬영된 사진과 영상을 보면 상당수 랜싯이 우크라이나군 전차·장갑차 상부에 설치된 철제 구조물이나 나일론 위장망에 걸려 있다. 이 경우 랜싯은 목표물에 전혀 피해를 주지 못하고 고스란히 노획되는 경우가 많다. 최근에는 랜싯을 그대로 복제한 우크라이나군의 ‘짝퉁 랜싯’도 등장했다. 속도가 느린 랜싯의 특성상 목표와 충돌해도 탄두부 신관에 충격이 전달되지 않아 불발에 그치기도 한다.
러시아군도 랜싯의 한계를 잘 알고 있다. 특히 일선 부대가 랜싯의 위력 부족을 자주 보고하고 있다. 기본형 랜싯-3는 탄두 중량이 3㎏에 불과한 데다, 원가 절감을 위해 이중 탄두도 사용하지 않았다. 목표물이 철제 구조물이나 증가장갑을 갖춘 경우 일격에 제압하기 어렵다. 최근 쿠르스크 전선에서 러시아군 랜싯-3가 우크라이나군 T-80BV 전차 포탑 후방을 정확히 강타하는 영상이 공개됐다. 그런데 영상 속 전차는 드론에 피격되고도 수십m를 더 이동했다. 전차 승무원들이 아군의 통행을 방해하지 않도록 갓길에 전차를 주차하고 대피할 때까지도 폭발하지 않았다.
이에 따라 러시아군은 최근 랜싯 운용 전술을 바꿨다. 기존처럼 낮은 각도로 비스듬히 날아가 들이박는 대신, 높이 상승한 뒤 수직으로 내리꽂혀 충돌 속도를 2~3배 높이는 방식이다. 이런 전술은 분명 효과적이지만 드론 조종자에게 높은 숙련도가 요구되기에 범용성이 떨어진다. 여러 문제가 있음에도 러시아군이 랜싯을 여전히 애용하는 이유는 값싸고 편리하기 때문이다.
랜싯은 무기 대량 생산의 대명사인 칼라시니코프그룹의 자회사에서 생산하는 제품답게 저렴하고 생산성도 높다. 이 드론은 다른 무기처럼 복잡한 특수 생산 설비가 아닌, 평범한 공장에서 제작된다. 빈 창고를 헐값에 사들여 간단한 조립 설비만 갖추면 즉시 생산할 수 있다. 최근 일부 공장에선 중고교생이 취업 실습 명목으로 드론 조립에 투입됐다고 한다. 청소년을 무기 제작에 동원할 정도로 러시아 군수산업이 열악하다는 의미인데, 동시에 그만큼 드론 생산에 별다른 숙련 기술이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랜싯에 들어가는 부품은 대부분 온라인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상용 제품이다. 높은 내구성과 신뢰성이 요구되는 군용 규격 제품보다 훨씬 저렴하다. 이 때문에 비슷한 성능의 서방제 배회탄약 1대 가격이 10만 달러(약 1억3400만 원)를 넘는 반면, 랜싯은 2만 달러(약 2680만 원)도 안 된다. 개발·제작에 필요한 기술 문턱이 낮은 데다, 생산비용이 저렴한 것이다. 러시아로선 이처럼 가성비 좋은 무기를 대량 생산해 전선에 적극 투입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北, 자폭형 드론으로 재래식 전력 열세 만회 노려
김정은 북한 노동당 총비서 겸 국무위원장(오른쪽)이 8월 24일 각종 무인기 성능시험을 현지 지도했다고 ‘노동신문’이 8월 26일 보도했다. [뉴스1]
북한이 중국과 러시아를 통해 상용 부품만 안정적으로 조달한다면 랜싯 같은 드론 1만 대를 만드는 비용은 2억 달러(약 2680억 원)가 채 되지 않는다. 그 정도 물량의 랜싯은 유사시 재래식 전쟁의 판도를 바꿔놓을 엄청난 전력이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와 달리 한반도 전장은 매우 좁다. 한국군 주력 부대는 대부분 휴전선으로부터 40㎞ 안에 배치돼 있다. 심지어 한국군은 소형 드론에 대한 방공 능력이 대단히 떨어진다. 유사시 북한이 소형 드론을 집중 운용할 경우 그 위력은 상상을 초월할 수 있다.
한국군 K2 전차. 한국군 기갑차량은 성능 면에서 북한군 장비를 월등히 앞서지만, 드론 공격을 받을 경우 상당한 피해를 볼 수 있다. [현대로템 제공]
모든 기갑장비에 APS 설치해야
북한이 랜싯 같은 드론을 대량 운용하는 데 맞설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방어책은 모든 기갑차량에 능동방어장치(APS)를 설치하는 것이다. 다만 전차, 장갑차, 자주포 개수만 7000대가 넘는 한국군 입장에서 한 세트에 20억 원이 넘는 APS를 모두 설치하는 것은 부담이 클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뿐이다. 최근 우크라이나군을 비롯한 각국 군대가 광범위하게 도입하고 있는 전파 교란 장비, 즉 재머(jammer)를 대량 보급하는 것이다. 재머는 드론이 지상 통제소로부터 수신하는 전파를 차단해 드론을 무력화하는 장비다. 기술적으로 그리 복잡하지 않고 가격도 저렴하다. 현재 가장 많이 판매되는 제품은 500~3000m 범위에서 드론을 재밍할 수 있는데, 한 세트에 3500~5000달러(약 470만~670만 원) 정도 가격에 구입해 장착할 수 있다.
한국군은 급한 대로 재머를 대량 구매해 주요 시설과 기갑차량에 장착하고, 중장기적으로 APS를 모든 기갑장비에 설치해야 한다. 전차 1대에는 3~4명, 장갑차 1대에는 9~12명의 귀중한 장병이 타기 때문이다. 장병들에게 ‘파이트 투나잇(fight tonight)’ 정신을 요구하려면 국가도 당장 오늘 밤 전투가 벌어져도 승리해 가족 품으로 돌아갈 수 있는 여건을 보장해야 한다. 한국군 당국이 북한판 랜싯이라는 새로운 위협으로부터 장병들을 지킬 대책 마련을 서두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