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과 아베 신조 일본 총리(왼쪽), 리커창 중국 총리가 11월 1일 청와대에서 한중일 정상회의에 앞서 손을 맞잡고 있다.
만남 그 자체가 성과
두 달 전 여론조사 전문기관 리얼미터에서 우리 국민이 중국인과 일본인에 대해 어느 정도 호감을 갖고 있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중국인에 대해서는 호감 30%, 비호감 12%로 나타났고, 일본인에 대해서는 비호감 49%, 호감 15%로 나타났다. 지난달 중국 ‘런민왕(人民網)’은 중국과 일본 국민이 서로에게 느끼는 비호감은 여전하지만, 공격성은 약간 누그러졌다는 여론조사 결과를 발표했다. 최근엔 중국 국민이 한국 국민에 대해 예전처럼 높은 호감을 갖고 있지 않다는 보도도 나왔다. 한중일 3국 국민이 서로에게 갖는 감정은 더는 단선적이거나 일방적이지 않다. 우리는 어떤 경우에 호감을 갖거나 공격성을 보일까.
한국사회여론연구소에서 사회심리학적 논거에 기초해 어떤 요인이 호감을 만들고 공격성을 만드는지에 대한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호감 요인에 대해선 ‘생각과 성격이 비슷할 때’라는 응답이 37%로 가장 높게 나타났다. 그다음으로 ‘지적인 매력을 느낄 때’ 22%, ‘자주 접촉하거나 만나는 빈도가 높을 때’ 21%, ‘외형에 매력을 느낄 때’ 11%, ‘나를 좋아할 때’ 9%로 나타났다(그래프 참조).
공격성 요인에 대해선 ‘학습된 사회적 행동’이라는 응답이 32%로 가장 높게 나타났고, 그다음으로 ‘좌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 30%, ‘인간의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 19% 순이었다.
한중일은 지리적 근접성과 문화적 동질감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특징은 서로의 생각을 하나로 묶는 긍정적인 영향도 있지만, 폭력이 대부분 가까운 거리와 관계에서 벌어진다는 것 또한 부인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호감과 폭력성은 공존한다. 그러나 분명한 사실 하나 더. 근접성과 동질감은 폭력(공격성)보다 호감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사회심리학의 정설이다.
그래서 가능하면 자주 만나야 한다. 자주 만나면 서로에 대한 기대만큼 노력하게 되고, 상호협력의 기회도 확대된다. 설령 과거의 사건과 현재의 갈등이 발목을 붙잡는다 해도 미래를 위해 자주 만나야 한다. 만남 그 자체가 성과일 수 있다는 이야기다.
또 다른 흥미로운 의미를 시사하는 결과도 엿볼 수 있었다. ‘호감을 느끼는 경우’가 20대는 ‘자주 접촉하거나 만나는 빈도가 높을 때’라는 응답이, 30대 이상은 ‘생각과 성격이 비슷할 때’라는 응답이 높았다. 또 여성이 남성보다 ‘지적 매력’에, 남성이 여성보다 ‘외형적 매력’에 더 끌렸다. 연령에 따른 사회화 정도, 성별에 따른 관심의 차이가 반영된 결과로 풀이된다.
‘공격성’에 대해선 20대와 30대가 ‘인간의 본능적이고 생물학적인 현상’이라는 응답이, 40대는 ‘학습된 사회적 행동’이라는 응답이 높았다. 주목할 만한 결과는 60세 이상에서 나타났는데 ‘공격성의 요인이 어디에서 출발하는지 잘 모르겠다’는 응답이 높았다는 점이다. 삶의 과정에서 얻은 경험의 양에 따라 성찰 정도가 다른 것일까. 또 여성은 ‘좌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응답이 높았다. 인구사회학적 제약 조건이 많았던 여성의 한탄일까.
사회심리학적 탐구에 초점을 맞출 만한 결과도 나왔다. 매력이란 ‘카리스마’처럼 느낄 수는 있어도 설명하기 어려운 감정이다. 외형적 매력에 호감을 갖는 사람은 공격성이 좌절에 대한 자연스러운 반응이라는 응답이, 지적 매력에 호감을 갖는 사람은 공격성이 학습된 사회적 행동이라는 응답이 높았다. 왜 그럴까. 사회적 약자가 가지는 폭력성에 대한 진단과 사회적 강자가 느끼는 폭력성에 대한 진단이 서로 다른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보자.
아시아 역사 공동연구의 해법
한중일 간 공격성이 체계적 학습이나 좌절에 따른 자연스러운 반응에 의한 것이라 할지라도 얼마든 줄일 수 있다. 예컨대 한중일 3국이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 교류를 통해 서로의 공격성을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정화하게 하면 어떨까. 그냥 보기엔 좋은 방법 같지만 이러한 방법이 오히려 공격성을 강화한다는 것이 다수설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 내집단 편향이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폭력물을 시청했을 때 폭력성이 줄어들기보다 더 늘어난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렇다면 서로에 대한 호감을 높이고 공격성을 줄일 수 있는 방법에는 무엇이 있을까. 요즘 정치권에서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논쟁이 한창이다. 하지만 이와 별개로 아시아 역사에 대한 새롭고 통합적인 고찰이 필요하다. 아시아 역사, 동아시아 역사에 대한 고찰이 없는 한국사는 내집단 편향의 또 다른 교과서가 될 수 있다.
근현대사를 시작으로 최근 수백 년간 한중일 역사는 이웃 국가를 침략하고 약탈한 역사로만 기록돼 있다. 필자가 역사 전문가는 아니지만, 이와 달리 한중일은 수천 년 동안 이웃하며 이보다 더 많은 이타적 사건들과 더 긴 공존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더 나아가 영국이 산업화 시대를 맞이하기 전,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은 중국 발명품을 전달하는 무대였을 뿐이다. 일본 도쿠가와 시대의 산업발전은 독일 산업성장 이후 볼 수 있는, 그 이전의 모습이었다.
수천 년 전 세계 중심이었고 세계 총생산량의 90% 이상을 차지했던 아시아의 시대가 다시 도래할 것이라는 데 이견을 다는 전문가는 없다. 한중일 3국은 기록된 역사보다 앞으로 함께 써야 하는 역사가 더 많을 것이다. 유럽처럼 통합된 역사교과서를 만들고 교육하는 것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역사는 흐른다. 서로가 더 아픈 상처의 역사를 만들고 싶지 않다면 당장은 자주 만나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