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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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둔 나라 사랑…“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 김건우 대전대 교수·국문학 kwms00@chol.com

    입력2015-11-02 1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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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1938년 37세의 김교신.

    1936년 베를린올림픽 마라톤에서 우승한 손기정이 시상대 위에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 숙이고 찍은 유명한 사진 한 장이 있다. 올림픽 우승 당시 24세였던 손기정은 양정고등보통학교 재학생이었다. 늦은 나이에 양정고보에 입학한 그는 평북 신의주 출신의 고학생이었다. 자신의 가슴에 붙은 일장기를 부끄러워했던, 당대 최고의 조선인 마라토너에게는 이후로도 평생 잊을 수 없는 스승이 있었다. 김교신(1901~45)이었다.

    훗날 손기정은 김교신을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그냥 바라만 보고 있어도, 아니 선생님이 계시다는 생각만 하고 있어도 무엇이 저절로 배워지는 것 같은 분이셨다”(손기정의 ‘비범하셨던 스승님’). 김교신은 양정고보에서 그의 교사생활 중 가장 긴 12년을 근무했고 여러 제자를 길러냈다. 양정고보 시절 손기정의 마라톤 코치이기도 했던 김교신이 1935년 일본 도쿄에서 열린 베를린올림픽 국가대표 선발전에서 손의 요청에 따라 자동차로 앞서 달렸던 일화는 유명하다. 손은 “선생님 얼굴을 보면서 뛰겠다”고 했다 한다.

    김교신은 만 44년의 짧은 생을 살았고 그나마 평교사 생활과 정기독자 수백의 작은 잡지 하나를 낸 것으로 삶을 마친 인물이지만, 그가 제자들과 독자들에게 끼친 ‘정신적’ 영향은 측량하기 어렵다. 1901년생 김교신은 일제로부터 해방되기 직전 사망했다. 해방 후 대한민국 역사에서는 존재하지 않는 인물임에도, 김교신은 한 명의 교육자가 소수의 제자에게 끼친 영향이 어떻게 세상을 바꾸는지를 실증한 하나의 예다. 이후 글들에서 보겠지만, 그는 해방 후 한국 사회 형성에 중요한 흔적을 남기게 된다.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김교신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의 회고가 남아 있다. 그를 회고하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그에 대해 진심으로 존경을 표현했다. 이찬갑(국학자, 이기백과 이기문의 부친)과 함께 충남 홍성에 풀무학원을 설립한 주옥로는 1965년 5월 ‘김교신 선생 20주기 기념강연’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는 평민적인 진정한 기독자이며 성서 신앙의 확립자요, 진리에 근원한 애국자요, 우리 역사 최초의 참된 한국인이었다.”(주옥로의 ‘참 한국인’)

    김교신은 소위 ‘무교회주의 신앙’을 조선에 알린 인물이기도 하다. 오늘날 일반에서 무교회주의에 대해 잘 알지 못하더라도 함석헌, 류달영, 장기려 등 이 계보에 놓인 인물들의 면면은 어느 정도 알려져 있다. 이들 한국 무교회주의자들의 앞머리에 김교신이 있다.



    일본 기독교 지성 우치무라 간조와의 만남

    1927년 7월, 일본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조선인 6명이 잡지 하나를 만들었다. ‘성서조선’이라는 이름의 기독교 신앙지였다. 김교신과 함석헌, 양인성, 류석동, 정상훈, 송두용 등 한국 기독교회사에서 성서조선 그룹으로 명명되는 이들 6명은, 일본에서 학교를 다니던 시절 모두 우치무라 간조(內村鑑三)의 제자였다. 김교신의 동지이자 도쿄고등사범학교를 같이 다녔던 함석헌이 우치무라로부터 받은 영향은 잘 알려져 있다. 훗날 함석헌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치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김교신에게도 우치무라는 절대적인 존재였다. 후일 김교신이 ‘성서조선 사건’ 으로 1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출옥 직후 친구 가타야마에게 보낸 편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돼 있다. “지난 1년간 옥중생활에서 난관에 부딪힐 때마다 꿈에 우치무라 선생이 나타나서 격려해주시고, 가르쳐 주시고, 위로해주시고, 때로는 지도해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이 1년간은 우치무라 선생과 기거를 같이 한 365일이었습니다.”

    근대 일본 지성사에서 우치무라는 독특하면서도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무교회주의 창도자인 그는 일찌감치 일왕의 ‘교육칙어’에 대한 불경(不敬) 사건과 러일전쟁 반대로 일본의 국적(國賊)으로 몰려 있었다. 일본이 무력을 바탕으로 한 팽창주의로 달려갈 때,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가 병역을 거부하고 국가주의에 반대한 것은 이들 신념의 논리적 귀결이었다. 러일전쟁을 전후한 시기 우치무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러일전쟁을 하지 말자는 비개전론자(非開戰論者)일 뿐만 아니라 전쟁 절대 폐지론자다. 전쟁의 이익은 강도의 이익이다.” “‘러시아가 만주를 빼앗으면 일본이 위태롭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나 20세기인 오늘날, 중국식 충효 도덕을 국민에게 강요하는 것 그 자체가 일본의 존재를 가장 위태롭게 하는 것이다.”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성서조선’ 창간 당시 동인들. 1927년 2월 촬영한 것으로 뒷줄 왼쪽부터 양인성과 함석헌, 앞줄 왼쪽부터 류석동, 정상훈, 김교신, 송두용.

    “독립운동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성서조선’ 표지.

    그런데 우치무라의 배경에는 기독교 정신주의와 자국(自國)에 대한 애정이 공존하고 있었다. 김교신과 함석헌이 자신의 문하에 있던 시절, 우치무라는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도 애국심이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청년 시절에 늘 외국 친구들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사랑하는 두 개의 J가 있다. 그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Japan)이라고 했다. 어느 쪽을 더 사랑하는지 나로서도 모르겠다. (중략) 내가 일본을 사랑하는 사랑은 보통 이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애국의 사랑은 아니다. 나의 애국심은 군국주의로 나타나지는 않는다.”(우치무라 간조의 ‘나의 애국심에 관하여’)

    김교신과 함석헌이 ‘성서조선’을 짚어내 온 것도 이 지점이었을 것이다. 우치무라의 ‘Japan’이 식민지 제자들에게 와서 ‘조선’이 된 것이다.

    과거 오랫동안 중고교 국어교과서에 수록돼 있었던 김교신의 짧은 글 한 편이 있다. 김교신이 개성 송도고보에서 교편을 잡던 시기, 송악산 골짜기 기도터에서 새벽기도를 할 때 에피소드를 기록한 ‘성서조선’ 1942년 3월호 권두언 ‘조와(弔蛙)’이다. 혹독한 추위로 개구리들이 얼어 죽은 일을 묘사한 글로, 마지막 부분은 이렇게 돼 있다. “혹한에 작은 담수 밑바닥까지 얼어서 이 참사가 생긴 모양이다. 얼어 죽은 개구리 시체를 매장하여 주고 보니, 연못 밑바닥에 아직 두어 마리 기어 다닌다. 아! 전멸은 면했나 보다!”

    이 글로 1942년 ‘성서조선 사건’이 발생했다. 정기독자 전원이 검거됐고 김교신, 함석헌, 류달영 등 13인은 서울 서대문형무소에서 꼬박 1년간 옥고를 치렀다. 물론 ‘성서조선’도 폐간됐다.

    어느 일본인 형사로부터 ‘독립운동하는 놈들보다 더한 최악질들’이라는 소리를 들었다는 성서조선 그룹은 한국 기독교 정신주의의 가장 비타협적 지점에 서 있다. 이들은 기독교 신앙에 바탕을 두고 자신의 삶 전체를 민족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다. 우치무라의 무교회주의를 철저히 신봉했던 까닭에 제도권 기독교계와 끊임없이 갈등했고, 정기독자라야 300명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소위 ‘정예’라 할 만했다. ‘성서조선’의 정기독자는 신청한다고 해서 모두 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김교신에게 편지로 구독 사유를 써 보내 허락을 받아야 했다.

    ‘성서조선’은 기독교 정통신앙에 가까웠음에도 끊임없이 이단 논쟁에 휘말렸다. 이들은 신앙공동체 자체가 교회이며, 예배당도 필요 없고 성직도 불필요하다고 했다. 성서를 통해 신자가 직접 신과 교통한다는 루터의 ‘만인제사장’론을 비타협적으로 신봉했다. 김교신의 다음과 같은 언급에서 이들의 생각을 알 수 있다.

    “무교회주의자로 자임하는 이는 동정을 구하거나 혹은 자기 과장을 위하여 무교회론을 열렬히 변론하고자 하는 이들이 있으나, 우리도 예수 믿는 사람이지 결코 무교회를 신봉하는 자가 아니다. 교회 조직의 필요를 논하는 이가 있을 때에 그 헛된 생각임을 우리가 지적할 뿐이요,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고집하는 이를 만날 때에 교회 밖에도 구원이 있다고 프로테스트할 뿐이다.”(김교신의 ‘나의 기독교’)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서울 정릉 북한산 자락에 있던 김교신의 자택. 오른편이 김교신이 직접 지은 서재다.

    김교신은 말한다. “우리는 누구보다도 ‘무교회’라는 문자를 즐겨 하지 않는다.” “무교회주의자는 건드리지만 않으면 아주 무난한 존재자이다.” “그러므로 제발 우리를 건드리지 말라.” 그렇지만 제도권 교회에서는 이들을 극도로 기피했다. “‘성서조선’지의 겉장만 보고도 폭탄처럼 두려워하는 교직자들이 적지 않았으며”(류달영의 ‘김교신과 조선’), 교인들에게 ‘성서조선’을 소개한 목사가 이단으로 몰리고, ‘성서조선’ 독자라는 이유만으로 교회에서 쫓겨났다.

    제도권 기독교계에서 무교회주의자들을 기피하는 데 전혀 근거가 없었던 건 아니다. 기본적으로 무교회주의자들은 내세에 관심이 없었다. 김교신은 ‘사후(死後) 구원’ 문제는 신학교 선생님들에게나 물어보라며, 자신은 오로지 “오늘을 어떻게 싸울까? 이 순간 내가 주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이것이 현재의 나를 삼켜버린다. 요컨대 오늘의 전투, 지금 발사하는 탄환을 적중시키려는 조준에 나의 심신을 집결시키고자 한다”고 했다.

    지극히 비타협적이고 정신주의적이면서도, 기본적으로 ‘내세’가 아니라 ‘현실’에 초점을 둔다는 것. 이 현실은 조선민족이 처한 현실이었다. “널리 깊게 조선을 연구하여 영원한 새로운 조선을 성서 위에 세우라. 그러므로 조선을 성서 위에.”(김교신의 ‘성서조선의 해’)

    김교신의 ‘성서조선’과 민족운동

    김교신의 넷째 딸 김정옥이 2010년 8월 12일 오전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서대문형무소역사관 11·12옥사에서 열린 특별전시회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에 마련된 아버지의 전시실을 둘러보고 있다. 김 여사가 가리키는 것은 일제 이시카와라는 검사가 보안법 사건에 연루된 사람을 나열한 서류로 김교신의 3·1운동을 입증하는 자료다(왼쪽). ‘성서조선’을 창간하고 주필로 활동하면서 일제 식민통치를 비판하다 옥고를 치른 민족운동가 김교신의 마지막 제자인 서병주가 2010년 특별전시회 ‘거대한 감옥, 식민지에 살다’를 둘러보다 손수 챙겨온 양정고등보통학교 졸업앨범을 꺼내 보고 있다.

    노동자들의 아버지가 되다

    김교신은 직접 몸을 움직여 노동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실제로 김교신 자체가 엄청난 체력의 소유자이기도 했다. 양정고보 교사 시절에는 마포에 있던 학교와 정릉 집 사이를 매일 자전거로 출퇴근했다고 한다. 정릉 시냇가의 돌을 주워 직접 자신의 서재 건물을 지었고, 교사생활이나 ‘성서조선’ 편집과 별도로 밭을 경작하고 과수를 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흙을 사랑했다. 그것이 교신의 신조였다.”(니이호리 구니지의 ‘김교신의 신앙과 저항’)

    1942년 ‘성서조선 사건’으로 1년간 복역한 김교신은, 출옥 후 더는 교사 생활과 ‘성서조선’ 발간이 불가능해지자 고향 근처인 함경도 흥남으로 가서 공장에 취업했다. 흥남질소비료공장(일본 해군 군수공장) 노동자들의 후생 관계 업무였다. 당시 이 공장에는 약 5000명의 조선인이 징용돼 열악한 환경에서 비인간적 대우를 받으며 일하고 있었다.

    근로과 직원이 된 김교신은 후생, 노무, 의료, 주택 등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환경과 생활환경 개선에 진력했다. 성서조선 그룹의 핵심이던 노평구를 불러 교육계 업무를 맡기고, 수원고등농림학교 출신 제자 류달영을 불러 농장을 관리케 해 채소를 노무자들에게 공급했다. 이 시기 김교신을 지켜보던 의사 박춘서는 1945년 3월 30일 일기에 다음과 같이 썼다. “조선인들은 김계장을 호주(戶主)로 가장으로 믿고 살아간다.”(박춘서의 ‘병상기 초(抄)’)

    강철 같던 김교신조차 과로를 이기진 못했던 듯하다. 4월 18일, 하필 자신의 생일에 와병한 김교신은 일주일 만에 숨을 거뒀다. 해방되기 불과 서너 달 전이었다. 자신이 꿈꾸던 조선을 김교신은 끝내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10대 중반 나이에 그의 학생이 돼 김교신이 사망할 때까지 따랐던 제자 한 사람이, 한참 시간이 흐른 후 스승이 꿈꾸던 것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매우 큰 스케일의 시도를 하게 된다. 류달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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