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정치 1번지
대구의 한 버스운전사는 “일제강점기 수성구 일대는 대규모 농지였고, 부족한 농업용수를 메우기 위해 인공 연못으로 ‘수성못’을 조성했다”며 “수성 들판에 조선인 대신 일본인이 오가며 농사짓는 모습에 분노한 이상화 시인이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는 시를 짓게 됐다”고 설명했다. 대구가 섬유산업 중심도시로 도시화되는 과정에서 수성못 일대는 관광유원지로, 수성구는 교육과 주거 중심지로 변모했다.
대구 앞산에서 수성구를 바라다보면 범어동에 있는 대구에서 가장 높은 고급 아파트단지인 두산위브더제니스와 황금동에 위치한 대규모 아파트단지 SK리더스뷰 등 높게 솟은 고층 아파트단지가 여럿 눈에 들어온다. 또한 수성구에는 명문대 입학률이 높은 대구과학고와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에서 만점을 받은 학생 4명을 동시에 배출한 경신고가 자리 잡고 있다. 대구에서 택시운전을 하는 김모(52) 씨는 “수성구 교육열은 서울 강남 교육열보다 더할 것”이라며 “지난해 수능 만점자가 여럿 나온 뒤로 수성구 아파트값이 크게 올랐다”고 말했다.
높은 교육열로 대구의 강남에 비유되는 수성구는 의사, 변호사 같은 전문직 종사자와 사업가 등 대구·경북(TK)지역 오피니언 리더가 많이 거주해 대구 민심의 바로미터이자 대구 정치 1번지라는 상징성도 갖고 있다. 수성갑에서 17대부터 19대까지 3선을 기록하며 터줏대감 노릇을 했던 새누리당 이한구 의원이 2월 내년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현 새누리당 당원협의회(당협) 위원장은 김문수 전 경기도지사. 김 전 지사는 8월 새누리당 경선을 거쳐 수성갑 당협위원장에 선출됐다. 김 위원장은 재선 경기도지사를 지냈고, 그에 앞서 경기 부천 소사에서 15대부터 17대까지 내리 3선 의원을 지냈다. 수도권에서 20여 년 가까이 정치적 입지를 다져온 그가 대구행을 택하자 지역 여론은 찬반으로 크게 갈렸다.
대구지역 여론에 밝은 한 인사는 “박근혜 대통령 이후 마땅한 TK 출신 차기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대선주자급 김 전 지사가 대구를 선택한 것은 좋은 일이라고 얘기하는 사람도 있고, 총선을 1년도 남겨놓지 않은 시점에 내려온 데 대해 ‘(대구를)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아니냐’며 못마땅해하는 사람도 있다”고 전했다.
새누리당 대구 수성갑 김문수 당원협의회(당협) 위원장(오른쪽)이 9월 8일 서울 여의도 중소기업중앙회에서 열린 2015 새누리당 원외당협위원장 연찬회에서 참석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다.
김 위원장은 내년 총선에서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 김부겸 후보와 맞붙을 공산이 크다. ‘포스트 박근혜’를 노리는 여야 TK 차기주자들이 맞붙게 될 수성갑은 말 그대로 별들의 전쟁이 예고돼 있는 셈.
새정연 김부겸 지역위원장의 경우 19대 총선을 앞두고 ‘지역주의 극복’을 기치로 내걸고 여당 텃밭과도 같은 대구로 일찌감치 내려와 야당 후보로 19대 총선과 지난해 지방선거에 연거푸 도전했다 낙선한 바 있다. 19대 총선에서는 새정연 전신인 민주통합당 후보로 수성갑에 출마해 40.4%를 득표해 52.8%를 기록한 이한구 의원에게 패했고,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새정연 후보로 대구시장에 도전해 40.3%를 득표했지만 56%를 얻은 권영진 시장에게 졌다. 내년 총선은 그의 세 번째 도전인 셈.
아직은 불안한 리드
김부겸 위원장은 “많은 대구 시민이 ‘대한민국 정치가 지금 이대로는 안 된다’ ‘공존의 정치, 상생의 정치가 필요하다’는 데 공감한다”면서 “내년 총선에 수성갑에서 대구 유권자들이 한국 정치를 바꿔낼 계기를 만들어주실 것으로 믿고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세 번째 도전을 5개월여 앞둔 김부겸 위원장에게 대구 여론은 과거에 비해 우호적이다. ‘영남일보’가 10월 8일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김부겸 위원장이 44.3% 지지율로 36.8% 지지율에 그친 김문수 위원장을 7.5%p 앞선 것. 지난해 지방선거에서는 수성갑의 경우 김부겸 후보가 50.6% 득표로 47%에 그친 권영진 시장을 3.6%p 앞서기도 했다.
수성구는 범어1·2·3·4동, 만촌1·2·3동, 황금1·2동, 고산1·2·3동 등 모두 12개 동으로 구성돼 있는데 19대 총선 당시 김부겸 후보는 이한구 후보에게 12개 동 모두에서 뒤졌다. 그러나 지난해 대구시장선거 때는 범어2동과 만촌1·2동, 황금2동 등
4개 동을 제외한 8개 동에서 더 많이 득표했다. 특히 유권자 수가 많은 황금1동과 고산1·2·3동에서 비교적 큰 표차로 앞섰다. 이 같은 득표율 변화가 내년 총선 때까지 이어질지 주목된다.
대구의 한 언론인은 “김부겸 전 의원이 19대 총선과 지난 지방선거에 잇따라 출마하면서 인지도가 많이 높아졌다”며 “높아진 인지도가 지지율로 이어졌고, 그가 왜 대구에서 출마하려는지 진의가 조금씩 유권자들에게 인정받고 있는 측면도 있다”고 평가했다.
총선 6개월 전 실시한 10월 여론조사에서 김부겸 위원장이 오차범위를 벗어나 앞서 있지만 내년 총선 때까지 현재의 리드가 지속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없지 않다. 뒤늦게 뛰어든 김문수 위원장의 추격세가 만만치 않기 때문.
김문수 위원장은 10월 25일 대구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 서거 36주년 기념식에 참석했고, 그에 앞서 11일에는 전두환 전 대통령이 참석해 화제가 된 대구공고 총동문회 체육대회장도 찾아갔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시절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민청학련) 사건으로 제적됐고, 전두환 대통령 재임 때는 5·3인천사태로 투옥되는 등 고초를 겪었다. 구원(舊怨)이 있는 두 전직 대통령 관련 행사에까지 참석한 그를 두고 “표에 몰입하는 느낌을 준다”는 긍정적 여론과 “지나치게 표를 좇는다”는 부정적 여론이 공존한다. 김문수 위원장은 “지역 내 여러 행사에 두루 참석하려 노력하고 있다”며 “열심히 하고 있으니 지켜봐달라”고 말했다.
김부겸 위원장에 대한 지역 여론은 “고생했으니 당선시켜줄 때도 됐다”는 호의적 여론과 “야당으로 바꿨다 피해가 돌아오지 않겠나” 하는 불안 심리가 공존하고 있다. 황금동에서 간이음식점을 운영하는 40대 후반의 한 남성은 “김부겸 씨가 참 열심히 한다”며 “지난해에 (대구시장선거에서) 아깝게 떨어졌는데 내년(총선)에는 잘되지 않겠느냐”고 기대감을 표했다. 그러나 일부 상인과 기업가는 야당 후보에 대한 불안감을 노골적으로 토로했다. 서문시장에서 만난 50대 초반의 한 여성 상인은 “김부겸은 좋은데 야당이라 싫다”고 했고, 대구에서 레저업을 한다는 40대 중반 남성도 “머리로는 김부겸 후보를 찍어야겠다고 생각하다가도 막상 투표장에 가면 1번이 아닌 2번을 찍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기더라”고 했다.
새누리당 공천과 대통령 지지율
10월 27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새정치민주연합(새정연)-대구시 예산정책협의에서 새정연 대구 수성갑 김부겸 지역위원장과 권영진 대구시장, 새정연 최재천 정책위의장(오른쪽에서 두 번째, 세 번째, 네 번째) 등이 손을 맞잡고 있다.
수성구 출신 한 인사는 “한쪽 날개로 새가 날 수 없는 것처럼 대구 정치권에도 여야 양 날개가 필요하다는 인식이 생기기 시작했다”며 “내년 총선 때 대구가 9시 톱뉴스에 나오려면 수성구에서 뭔가 큰 변화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여론이 젊은 층을 중심으로 생겨나고 있다”면서 “여당 후보로 나오면 무조건 당선했던 과거 선거 결과가 내년 총선에서는 통하지 않을 수 있다”고 말했다.
내년 총선에서 수성갑 선거에 영향을 끼칠 변수로는 크게 두 가지가 꼽힌다. 하나는 새누리당 공천. 대구 의원 12명 전원이 새누리당 소속이다 보니, 대구 정치권 최대 관심사는 새누리당 공천이다. 대구 정가의 한 관계자는 “19대 총선에서 12명의 국회의원 가운데 7명이 초선으로 교체됐는데 내년 총선에서도 그 정도의 교체를 예상하고 있다”며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현역의원 교체가 이뤄지면 새누리당 독주가 지속될 개연성이 높다. 하지만 만약 유승민 의원, 또는 유 의원과 가까운 대구 초선의원들이 대거 새누리당 공천에서 탈락해 이들이 무소속으로 출마하면 내년 총선 결과를 장담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대구 정가의 또 다른 인사는 “존재감 없는 초선은 교체해야겠지만, 그렇다고 총선 때마다 현역의원을 큰 폭으로 교체하면 언제 큰 인물로 키우겠느냐”며 복잡한 심경을 비쳤다.
두 번째 변수는 박근혜 대통령의 국정수행 지지율. 박 대통령의 지지율이 고공행진을 계속하면 여당 후보에게 유리하고, 박 대통령에 대한 국민적 실망감이 커지면 적극적 여권 투표층에서 투표 참여율이 떨어질 공산이 커 야당 후보에게 기회가 돌아갈 수 있다는 논리다. 여론조사기관 한국갤럽이 10월 20일부터 22일까지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박 대통령의 국정수행에 대한 전국 평균 지지율은 42%. 하지만 대구·경북의 경우 59%로 평균치를 크게 웃돌았다. 대통령을 배출한 지역이라는 자부심과 함께 박 대통령이 성공한 대통령이 되기를 바라는 대구 유권자의 마음이 그 같은 지지율 격차에 담겨 있는 셈이다.
대구 수성갑 선거는 외견상 새누리당 김문수 대 새정연 김부겸의 대결구도지만, 그 속에는 박근혜 대 비박근혜라는 보이지 않는 구도가 중첩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