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사 이항복(왼쪽), 한음 이덕형. [서울대학교박물관, 한국역사문화원]
부원군은 왕의 장인이나 공신, 정1품 이상 관료에게 내리는 작위로 그 앞에 본관을 붙였다. 이항복은 경주이씨라 경주의 옛 지명인 오성(鰲城)을 붙였고 이덕형은 광주이씨라 경기 광주의 옛 지명인 한성(漢城)을 쓴 것이다. 한음이란 호 역시 한양과 대비해 한수 남쪽이란 뜻으로 본관인 광주를 가리킨다.
이항복이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란길에 동행한 호성공신첩을 받아 오성부원군이란 작위를 받은 반면, 이덕형은 호성공신과 선무공신을 모두 사양해 부원군 작위를 받지 못했다는 주장도 있다. 이는 사실과 다르다. 오성이 작위를 받은 것은 1602년이고 호성공신에 오른 것은 1604년이다.
올해는 오성의 서거 400주기가 되는 해다. 음력으론 5월 13일이고 양력으론 7월 4일이다. 한음은 그보다 다섯 살 연하였지만 오히려 다섯 해 일찍 숨져 2013년이 400주기였다. 오성과 한음 이야기는 이 두 사람이 어린 시절부터 동문수학하며 우정을 나눴다는 설화에 기초한다. 하지만 이는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있다.
목릉성세의 쌍두마
두 사람이 처음 만난 시점은 어린 시절이 아니라 1578년 과거시험장에서였다. 당시 성균관 유생이던 오성이 스물둘, 백면서생이던 한음이 열일곱 살 때다. 한음의 시문집인 ‘한음문고’에는 두 사람이 이때 처음 만나 교유가 시작됐다고 기록돼 있다. 또 한음이 오성에게 보낸 77통의 편지를 보면 ‘형’이라는 격의 없는 호칭을 썼으며 “형도 내 마음은 몰라요”라며 어리광 섞인 표현도 썼음을 확인할 수 있다.두 사람은 여기서 합격해 진사(進仕)가 되고 2년 뒤인 1580년 나란히 대과에 합격한다. 이후 두 사람은 인재가 넘쳐났다고 해 후대에 목릉성세(穆陵盛世)로 불린 선조(묘호가 목릉) 치세 최고의 명신 반열에 오른다.
우선 한음은 조선조 역사에 남을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청요직(淸要職)으로 불리는 홍문관, 사간원과 이조를 거쳐 최연소 대제학(30세)의 기록을 세웠고, 37세에 우의정이 돼 흑두재상으로 불리게 된다. 영의정에 오른 나이 41세는 세조 때 27세 나이로 영의정에 발탁된 종친 출신 이준 다음으로 최연소 기록이다. 오성은 한 걸음 뒤에서 그런 한음의 벼슬을 물려받다 영의정 자리에는 더 빨리 올랐다. 한음보다 2년 앞섰지만 나이로는 44세 때였다.
두 사람은 선조 시대 국가 누란의 위기와 광해군 시대 정치적 격랑을 거치면서 말 그대로 서로의 목을 베어줄 수 있는 문경지교(刎頸之交)를 수립했다. 선조의 피란길을 수행하며 생사고락을 함께 했고 한음이 명나라에 입국해 원병 파병을 끌어내면 오성이 접반사가 돼 그들을 접대했다. 또 병란 시기 가장 중요한 병조판서직을 돌아가며 맡았고, 이후 재상 자리에 올라 병란 수습에 앞장섰다.
오성과 한음은 조선 붕당정치를 뛰어넘는 공평무사의 실천가이기도 했다. 오성의 장인은 서인으로 분류되는 권율이었고, 한음의 장인은 동인의 영수였던 이산해였다. 하지만 두 사람은 당파를 뛰어넘는 우정을 나눴을 뿐 아니라 공명정대한 인재 발탁에도 앞장섰다.
이는 두 사람이 광해군 옹립에 앞장섰지만 그의 치세가 혼조에 빠지자 실로 목숨을 걸고 그 잘못을 비판하다 숨을 거둔 점에서도 확인된다.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에 먼저 나선 것은 같은 동인계로 영의정직에 있던 한음이었다. 광해군이 배다른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이고 그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모하려 하자 이를 만류하다 탄핵당했고 병을 얻은 끝에 낙향해 숨을 거뒀다. 그는 죽기 전까지 상소를 올리며 폐모를 반대했다.
당시 관직에서 물러나 있던 오성은 그런 친구의 죽음에 ‘목소리 죽여 남몰래 한원군을 곡하노라’는 시를 지으며 한탄했다. 그러다 4년 뒤 다시 인목대비 폐모가 현실화되자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됐고, 5개월 만에 그리운 친구의 뒤를 따라갔다.
이렇듯 오성과 한음은 문경지우일지언정 죽마고우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떻게 해서 죽마고우의 대명사가 된 것일까.
오성의 묘지가 있는 경기 포천시는 6월 25일 포천역사문화관에서 ‘백사 이항복 선생 서거 400주년 기념 학술대회’를 개최한다. 이병찬 대진대 교수의 발표문 ‘백사 이항복의 캐릭터 연구’에는 흥미로운 통계가 실렸다. 기지가 넘치고 해학의 대가였던 오성에 대한 문헌설화는 중복된 것을 제외하면 87편에 이른다. 이 중 오성과 한음이 함께 등장하는 것은 6편에 불과하다. 물론 그중에 죽마고우 시절 이야기는 없다. 그러나 오성과 한음 구비설화는 180편 가까운데 그중 오성과 한음이 함께 등장하는 설화가 63편에 이른다. 상당수는 두 사람의 어린 시절 일화다.
한음이 학문, 문장, 경륜, 외교, 군무에 두루 능한 정도전과 신숙주를 계승한 정통파 문사(文士)라면, 오성은 임기응변에 능하고 순발력 넘치는 기재(奇才)라 할 수 있다. 전자의 일화가 햇빛에 말린 정사(正史)형이라면 후자의 일화는 달빛에 말린 야사(野史)형이다. 그래서 역사에선 한음의 역할이 두드러지지만 설화에선 오성이 독보적 위치를 점한다.
오성과 한음 설화를 낳은 제3의 인물
묵재 이귀. [국립중앙박물관]
그런 의미에서 오성과 한음 설화의 숨겨진 그림자로서 제3의 인물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오성과 한음이 다 죽고 난 뒤인 1623년 인조반정의 1등 공신으로 역사의 전면에 나서는 묵재 이귀(默齋 李貴·연평부원군·1557∼1633)다. 묵재는 연안이씨인데 연평은 황해도 연백지역에 해당하는 연안의 옛 지명이다.
한음의 교우관계를 연구한 김학수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에 따르면 묵재는 한음과 한 동네에 살면서 동문수학한 진짜 죽마고우였다. 묵재는 집안이 어려워 충청도로 내려갔다 10대 때 한양으로 다시 돌아오는데, 이때 한 살 위인 오성과 친구 사이가 된다. 두 사람은 ‘밤새워 놀다 이별을 아쉬워 할’ 정도로 절친한 사이가 됐다고 한다.
묵재는 이렇게 오성과 한음 모두와 친했지만 출사는 한참 뒤처졌다. 그가 정식으로 문과에 급제한 나이는 서른다섯. 오성과 한음은 이미 당상관 반열에 올랐을 때였다. 본디 가난한 데다 지방관으로 전전하다 보니 끼니 걱정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마다 도움의 손길을 내민 사람이 오성과 한음이었다. 특히 한음은 관직 생활 내내 봉록을 쪼개 묵재의 살림살이에 보태고 묵재가 염병에 걸려 사경을 헤맬 때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달포 만에 목숨을 구해낸 우정의 화신이었다. 심지어 성정 급한 묵재가 한음의 장인인 이산해를 맹공격하는 상소를 올려도 동인의 공격으로부터 묵재를 보호한 것도 한음이었다.
어린 시절 묵재를 보면 오성과 닮은 점이 많다. 어린 시절 오성은 키가 크고 힘과 기백이 넘치는 골목대장 스타일이었다. 묵재 역시 기백이 넘쳐 문무를 겸비한 장군감이란 평가를 받았다.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을 지킨 무장 이시백이 그의 아들이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집안이 찢어지게 가난했다는 점도 오성과 닮은꼴이다. 무엇보다 둘 다 서인이었다. 물론 오성이 온건파 서인이었다면 묵재는 인조반정의 선봉에 선 골수 서인이었다. 묵재는 설화에서 오성과 한음의 우정을 어린 시절로 확대하는 데 징검다리가 되는 존재였다. 동시에 그 극단성 때문에 오성의 그림자로 남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죽마고우 설화로서 오성과 한음 이야기를 가능케 한 주축 인물이 실제론 오성이 아니라 한음이라는 점을 일깨워주는 인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