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9

2000.06.22

‘사회통념 뒤집기’ 도전장

  • 입력2006-01-25 12: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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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통념 뒤집기’ 도전장
    싸고 좋은책. 이것이 문고의 의무라면 그 역할을 다하기 위해 태어난 책이 있다. 5월25일 ‘한국의 정체성’ 등 5종의 출간으로 시작된 책세상문고-우리시대 시리즈가 바로 그것이다. 우선 150쪽 안팎(200자 원고지 500매 정도)의 작고 얇은 책, 거기에 3900원이라는 저렴한 가격이 독자의 마음을 편하게 한다. 최근 웬만한 인문학 서적이 1만원대를 넘어선 것을 감안하면 출판사가 이번 시리즈의 가격 책정에 얼마나 신경을 썼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가벼운 가격에 비해 내용은, 첫 출고분 5종의 제목만 훑어보아도 그 무게가 만만치 않다. ‘한국의 정체성’(탁석산), ‘반동적 근대주의자 박정희’(전재호), ‘악기로 본 삼국시대 음악문화’(한흥섭), ‘가족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권명아), ‘전자민주주의가 오고 있다’(박동진). “우리사회에서 생산적인 토론과 지적 양식을 넓힐 수 있는 정치 사회 역사 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접근을 시도할 것”이라는 출판사의 기획 의도가 첫 출고분에 충분히 반영된 셈이다.

    또 이 시리즈는 단순 인문교양서이기를 거부한다. 오히려 소장학자들이 우리 사회에 “싸움을 건다”는 말이 적합하다. 예를 들어 ‘한국의 정체성’의 저자 탁석산씨는 “영화 ‘서편제’보다 ‘쉬리’가 더 한국적”이라는 말로 사회통념을 깨뜨린다. 도발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우리는 시원(始原)을 따지는 습관이 있다. 그러나 시원은 정체성 판단에 아무런 기여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현재 우리 한국이 갖고 있는 모든 것이 정체성 판단의 근거가 된다.”

    즉 저자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를 탐구해 우리 것을 찾는 것은 무의미하며, 이 땅에서 대중의 지지와 호응을 받는 것이야말로 한국적인 것이라고 주장한다.



    ‘…박정희’의 저자 전재호씨는 박정희를 민족주의자라고(혹은 아니라고) 믿고 자란 사람들을 위해 이 책을 썼다고 말한다. 박정희를 평가할 때 민족주의냐 아니냐는 식의 규범적 시각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전통적, 전근대적 사고와 근대의 기술이 기묘하게 결합돼 나타난 19세기말 독일의 ‘반동적 근대주의’에서 박정희의 뿌리를 발견했다.

    그러나 “국가 안보와 경제발전을 위해서라면 민주주의도, 노동자의 권익도 희생될 수 있다”는 박정희의 독재에 대해 그는 한나 아렌트의 말을 빌려 이렇게 결론지었다. “폭력은 정당화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정당한 것은 아니다”고.

    ‘악기로 본…’은 위의 두 책과 달리 논쟁에서 비켜간 듯한 인상을 준다. 그러나 저자 한흥섭씨는 왕산악이 중국의 칠현금을 거문고로 개량했듯이 왜래악기의 수용과정에서 삼국(고구려 백제 신라)이 보여준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수용 태도’를 들어, 오늘날 생명력을 잃어버린 전통음악 혹은 전통문화의 문제점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문학평론가 권명아씨의 ‘가족이야기…’는 문단의 주목을 받고 있다. 박완서 방현석 신경숙 배수아 은희경 등 잘 나가는 작가들을 텍스트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우리사회에서 ‘절대선’으로 여겨지는 ‘가족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우리를 억압하는 권력이 됐는지 지적한 부분이 돋보인다.

    ‘전자민주주의…’는 정보화가 정치에 끼칠 성급한 낙관론이나 비관론을 모두 경계한다. 저자 박동진씨는 전자민주주의를 절차적 변화에 국한시키지 않고, 정보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변화시키고 발전시킬 수 있는지 본질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이 시리즈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게 책의 맨 마지막 부분에 실려 있는 ‘더 읽어야 할 자료들’이다. 그냥 참고문헌 정도가 아니라 저자의 독서편력을 엿볼 수 있는 데다 간단한 평론까지 곁들여 있어 흥미롭다. 예를 들어 탁석산씨는 ‘한국인문학의 서양콤플렉스’(민음사)의 저자 이진우씨에 대해 “서양철학, 특히 독일철학의 세례를 지나치게 많이 받은 저자에게 한국의 현실이 관념이 아니라 마음의 아픔으로 느껴질 수 있는지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생산적인 논쟁은 이렇게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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