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973

2015.01.26

삼성 경영권 승계, SERI(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

대외활동 전면 중단 2년째…“민감한 시기에 밉보일 이유 없다”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15-01-26 13: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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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성 경영권 승계, SERI(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
    “순식간이다. 이렇게 빠른 속도로 분위기가 변할 거라고는 생각을 못 했다. 몸담고 있던 팀이 해체되면서 사람들이 뿔뿔이 흩어졌고, 몇몇은 회사를 떠났다. 밖에서 ‘파워집단’이니 ‘막강 연구 인력’이니 목소리를 높이던 그 순간 이미 변화는 궤도에 오른 상태였다. 조직이 쓸모없는 작업이라고 판단한다면 구성원으로서는 할 말이 있을 리 없다. ‘좋은 시절’이 끝난 게 안타까울 뿐 미련은 없었다.”(지난해 퇴직한 삼성경제연구소 전직 관계자)

    줄줄이 문 닫은 대외사업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달라졌다. 한국 사회의 경제 분야 담론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며 ‘스마트 통치’라는 비판까지 받았던 공격적 행보는 완전히 자취를 감췄다. 정부의 주요 정책 결정 과정에 이론적 근거와 어젠다를 제공하던 것이 7~8년 전 일임을 감안하면 실로 격세지감. 경제·사회·인문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주제를 포괄해 이슈를 주도하던 ‘동아시아 싱크탱크’에서 삼성그룹 내부의 경영 전략에만 집중하는 ‘인하우스(in-house)’ 연구소로의 탈바꿈이다.

    과거는 화려했다. 2013년 4월 이광근 당시 성공회대 민주주의연구소 연구원(현 동국대 다르마칼리지 강의초빙교수)과 이경환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 연구원이 한국 비판사회학회 학술대회에서 발표한 논문 ‘스마트 통치의 등장 : 삼성경제연구소의 등장과 영향력 강화’는 그 전성기를 고스란히 보여준다. 논문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의 입을 통해 등장한 ‘국민소득 2만 달러’론이 노무현 대통령을 통해 당시 정부의 주요 국정과제로 설정되는 과정을 추적했다. 서비스산업 중심론, 매력한국론,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추진에 이르기까지 SERI가 주도적으로 제안한 이들 프로젝트가 당시 여당이던 열린우리당과 청와대를 거쳐 국가정책으로 입안되곤 했다는 게 이들의 분석이다.

    공교롭게도 해당 논문이 발표된 직후인 2013년 여름부터 SERI의 분위기는 급반전하기 시작했다. 연구소에서 생산한 보고서 상당량을 공개하던 인터넷 홈페이지는 2013년 10월을 마지막으로 국문 보고서 게재를 중단했다. 영문 보고서 역시 그해 11월이 마지막. 이후 1년여를 훌쩍 넘기는 동안 SERI의 연구 결과는 대중에게 공개된 적이 없다. 새해 경제전망과 ‘올해의 10대 히트상품’ 등 이 연구소가 꾸준히 펴내던 대표적인 연차보고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2012년 11월 분사된 SERICEO만이 회원제 유료정보 형태로 명맥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뿐 아니다. 2008년부터 6년간 펴냈던 계간 영문저널 ‘SERI 쿼털리’도 2014년 2월 폐간을 선언했다. 매년 7~8종씩 펴내던 단행본 역시 2014년에는 4종으로 줄었고, 그마저 대부분은 외부 필자 책이다. 4월 내부 연구 인력이 펴낸 마지막 단행본 ‘플랫폼, 경영을 바꾸다’는 정보통신기술(ICT) 산업 분야에 한정한 기술 분석서. 중국과 일본 경제, 은퇴와 노령화, 메가트렌드 등 동북아 전체를 큰 틀에서 논하던 이전과는 적잖이 다른 패턴이다.

    수년 전까지 SERI의 주요 사업 가운데 하나였던 정부기관이나 지방자치단체, 주요 정당에 대한 컨설팅 프로젝트도 2014년 이후 대부분 중단했다는 게 연구소 측 설명이다. 남아 있는 것은 지난해 하반기 출범한 대구와 경북의 창조경제혁신센터에 삼성그룹 내 다른 계열사들과 함께 참여한 정도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참석해 언론의 대대적인 주목을 받은 이들 센터는 그룹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프로젝트다. 정부사업 참여라기보다 그룹 지원에 해당한다는 게 연구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정부보다 낮은 경제성장률 예측

    삼성 경영권 승계, SERI(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

    2014년 12월 17일 경북 구미시 신평동 모바일기술융합센터에서 열린 경북창조경제혁신센터 출범식에 참석한 박근혜 대통령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오른쪽에서 세 번째와 두 번째).

    경제 분석 기사에 SERI 전문가들의 견해가 쉴 새 없이 등장하던 이전과 달리, 2014년 이후로는 SERI 소속 연구 인력의 언론 기고는 물론 기사에 인용되는 코멘트도 찾아보기 쉽지 않아졌다. 연구소가 내부적으로 이들의 대외활동에 제한을 두고 있다는 게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연구 인력이 개인 차원에서 참석하던 외부 세미나 등 학술행사나 학술저널에 논문을 싣는 일까지 제약을 받는 것으로 전해진다. 지난해 학술행사에 참석한 몇몇 개인이 경위서 제출을 요구 받은 일도 있었다는 후문. 한마디로 ‘외부에 SERI의 견해로 오해받을 수 있는 발언 일체’를 차단한 셈이다.

    짧은 사이 벌어진 극적인 변화. 안팎에서 거론하는 첫 번째 이유는 SERI가 내놓는 분석이 여야 정치권에서 정책 공방의 주요 근거로 인용되는 일이 부담스러워졌으리라는 시각이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새해 경제 전망. 2012년까지 SERI가 내놓은 새해 경제성장률 예측치가 정부나 한국은행, 한국개발연구원(KDI) 등 국책연구기관 전망치에 비해 크게 밑도는 상황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정치권과 언론이 SERI 측 수치를 인용해 정부의 ‘지나치게 낙관적인 자세’를 질타하는 상황이 반복되기도 했다.

    특히 SERI 안팎에서는 이건희 회장의 건강 악화와 이재용 부회장 등 3대로의 경영권 승계가 궤도에 오르면서 삼성그룹 전체가 극히 조심스러운 행보를 보이는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여기에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 ‘굳이 (정부와 관점이 다른 연구 결과를 공개해) 심기를 거스를 필요가 있느냐’는 기류가 형성됐다는 것. 경영권 승계라는 민감한 작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청와대는 물론 주요 경제부처와도 불편한 관계를 만들지 않는 일이 중요했을 것이라는 견해다. 앞서 소개한 논문의 필자인 이광근 교수의 말이다.

    “임기 중반 지지율 하락으로 궁지에 물렸던 노무현 정부는 신성장동력 등 새로운 어젠다를 던져 공격적으로 경제를 이끌 필요가 있었고, 따라서 SERI의 아이디어나 도움이 반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산업화 시대의 발전 전략을 차용하고 있는 박근혜 정부는 그런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12년 대통령선거 당시 경제 분야의 주요 화두는 분배였지만, 이는 SERI가 경쟁력을 가진 이슈가 아니지 않은가. 여기에 재벌의 경영권 승계에 비판적인 여론의 향배를 민감하게 의식하면서 SERI의 최근 변화가 나타났다고 본다.”

    삼성 경영권 승계, SERI(삼성경제연구소)의 경우

    2013년 7월 5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국형 시장경제체제의 모색’ 제2차 학술심포지엄. 삼성경제연구소(SERI)가 공식적으로 주최한 마지막 외부 공개 행사다.

    이러한 견해에 대해 SERI 측은 “시점을 짜 맞춘 오해”라고 반박한다. 김진혁 SERI 연구조정실 수석연구원은 “외부활동 자제와 보고서 비공개는 그룹 내 주요 계열사의 실적이 악화하면서 내부 사업에 역량을 집중하자는 취지에서 결정된 것일 뿐, 경영권 승계나 새 정부 출범과는 무관하다”고 말했다. 스마트폰 등 하향세를 보이는 주요 사업에서 새로운 산업 전략 수립을 지원하는 작업에 역량을 쏟다 보니 내부 컨설팅이 급증했고, 그에 따라 거시 분석이나 인문·사회 분야에 대한 연구가 급감했다는 설명이다. 2013년부터 새해 경제성장률 예측을 내놓지 않고 있는 것 역시 투입해야 할 인력과 시간을 감안하면 다른 기관이나 해외 투자은행(IB) 전망치를 활용하는 게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 때문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SERI 전체의 조직체계나 인력 구성이 그룹 내부의 산업 전략을 지원하는 형태로 급속도로 재편되고 있음은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된다. 인문·사회·안보 등 연구원의 전공 분야에 관계없이 주요 계열사의 요청에 따른 컨설팅 작업에 투입되고 있다는 것. 여기에 외부 학술행사 참여나 논문 발표 등도 제약을 받으면서 학계에 뜻을 두고 있는 전문 인력의 이직도 심심찮게 이어지고 있다. 2013년까지만 해도 이러한 흐름이 경영권 승계 과도기에 잠시 벌어지는 일일 것이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지난해 하반기를 넘어오면서 그룹 최고경영진 차원에서 연구소의 역할을 영구적으로 바꾸겠다고 결정한 것 같다는 인식이 확산됐다는 이야기다.

    SERI의 연구 인력은 현재 160명 안팎. 지원 인력 100여 명을 포함하면 전체 종업원은 250명을 가뿐히 넘어선다. 이공계 연구소를 제외하고는 공공과 민간을 가리지 않고 대한민국 최대 규모. 특히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는 연구진들의 전공은 그간 ‘SERI 보고서’의 브랜드파워를 키우는 원동력이었다. 주목할 것은 대외활동이 중단된 최근 1~2년 사이 연구 인력은 오히려 40명 가까이 늘어났다는 사실이다. 신규 채용되는 인원은 화학, 건설 등 산업 분야 전공자가 대부분을 차지한다. 종합연구소에서 인하우스 연구소로의 정책 변경이 구조적인 작업이라는 방증이다.



    “문제는 오너 마인드”

    이러한 SERI의 급격한 변신에 대해 긍정적 평가와 비판이 엇갈린다. 삼성이라는 기업이 국가정책이나 담론 형성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가 사라졌다는 점은 긍정적으로 볼 수 있지만, 거꾸로 특정 법안이나 정책에 대해 삼성이 어떤 생각이나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지 들여다볼 창구도 함께 사라졌다는 것. 정책 문제와는 별개로 한국 사회가 고민해야 할 이슈를 선제적으로 따져 묻곤 했던 SERI의 순기능마저 함께 사라진 것은 사회적 손실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 지금은 대학에 몸담고 있는 한 전직 SERI 관계자의 말이다.

    “문제는 기업 공공성에 대한 오너의 마인드라고 본다. SERI의 활발한 담론활동에는 국내 최대기업 삼성의 사회적 기여라는 측면도 있었다. 기업과 사회가 만나는 최소한의 접촉면(interface)마저 닫아버리는 것은 ‘지나친 몸조심’이 아닐 수 없다. 더욱이 이제까지 공개적으로 담론 형성에 참여했다면 앞으로는 비슷한 작업이 극소수 정책결정자들을 상대로 한층 은밀하게 이뤄질 개연성도 배제하기 어렵다고 본다.”

    이에 대해 SERI 측은 “사회적 기여라는 측면에서 보면 안타까운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나, 연구 결과를 내부에서만 독식한다는 비판은 오해”라고 말했다. 사회에 공개할 만한 결과물이 더는 생산되지 않는 것일 뿐, 있으면서도 내놓지 않는 게 아니라는 취지다. 김진혁 수석연구원은 “경제 상황 악화와 내부 역할 조정에 따라 진행되는 불가피한 변화임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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