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10대 후반에 찾아온 아버지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꿈 대신 현실과 타협하게 만들었다. 당장 가족의 생활을 책임져야 했던 그는 와인 판매상이던 아버지가 남긴 고객 명단을 들고 와인 판매에 뛰어들었다. 넉넉지 않은 생활을 이어가면서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고 꿈을 향해 한 걸음씩 나아갔다. 그리고 1998년 마침내 자신이 만든 첫 번째 와인을 시장에 내놓았다. 1200㎡의 작은 포도밭과 주차장을 개조한 와이너리에서 만든 와인이었다. 겨우 600병이었지만 품질이 좋아 순식간에 팔려 나갔다.
문제는 너무 적은 생산량이었다. 거기에서 나온 수입으로는 포도밭과 와이너리를 넓히는 것은 물론 생활을 유지하기조차 힘들었다. 다행히 그의 재능을 알아본 이웃 와이너리들에게 컨설팅을 해주고 받은 보수와 사이클대회에서 받은 상금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포도밭을 조금씩 확장해갔다.
17년이 지난 지금 스테판은 18ha(약 18만m2)의 포도밭과 최신 설비를 갖춘 와이너리 소유주가 됐다. 큰 규모는 아니지만 그의 와인 클로 마누(Clos Manou)는 메독의 떠오르는 샛별로 주목받고 있다. 마누는 그의 어릴 적 별명이라고 한다. 그리고 레이블에 그려진 코끼리는 지난 세월 와이너리를 넓히고 이전하면서 수없이 무거운 짐을 이리저리 옮겨야 했던, 마치 코끼리처럼 힘을 쓰며 일했던 자신과 아내 프랑수아즈의 모습이라고 한다.
클로 마누는 3가지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대표 와인인 클로 마누는 카베르네 소비뇽과 메를로를 절반씩 블렌딩한 와인으로 소량의 프티 베르도(Petit Verdot)가 향미를 더한다. 농익은 과일과 담배, 초콜릿, 가죽향이 적절한 산도, 부드러운 타닌과 섞여 있는데 그 밸런스가 절묘하다. 보르도 와인 고유의 강직함도 느껴지지만 섬세함이 유독 돋보인다. 프티 마누(Petit Manou)는 클로 마누보다 좀 더 쉽게 마실 수 있는 와인으로, 세컨드 와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다채로운 과일향을 보여준다. 가장 주목할 만한 와인은 클로 마누 1850이다. 수령 150년이 넘은 고목에서 생산된 메를로 100% 와인으로 놀랍도록 복합적인 향미와 탄탄한 구조감이 매력적이다. 작황이 좋은 해에만 만들기 때문에 매년 생산되지 않고 생산량도 2배럴(약 317ℓ)을 넘지 않아 600병 내외만 판매한다고 한다.
흔히 보르도 와인 하면 긴 역사를 자랑하는 와이너리와 전통을 고집하는 맛을 쉽게 떠올린다. 하지만 실제 보르도에는 스테판처럼 끊임없는 실험으로 개성 있는 와인을 만드는 신예 장인들이 있다. 보르도의 진화는 현재진행형이다. 유명 와이너리의 비싼 와인도 좋지만, 보르도 와인 애호가라면 클로 마누처럼 신생 샤토에서 생산하는 와인을 시음해보는 건 어떨까. 보르도의 숨은 보석을 찾게 될지도 모르니 말이다.
수령 150년 이상을 자랑하는 클로 마누의 메를로 포도나무. 클로 마누 와인병들. 와인 숙성실에 서 있는 클로 마누 와이너리 대표 스테판(왼쪽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