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시험 1차 1번, 2차 2번, 3차 면접 3번 만에 최종 합격한 독특한 이력의 소유자가 있다. 1월 19일 사법연수원을 44기로 수료하고 2월부터 대형로펌 ‘광장’에서 변호사의 길을 걷게 된 정진섭 변호사(사진)가 그 주인공. 정 변호사는 17대와 18대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소속 국회의원을 지낸 정치인 출신.
정 변호사의 삶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75년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과 동시에 강제 징집된 그는 제대 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했고 그해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2차에서는 행정학에서 과락(科落)을 하는 바람에 동차 합격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80년 복학 후 후배들이 주도한 ‘개헌 포럼’을 지도한 혐의로 ‘5·17 포고령 위반’으로 또다시 퇴학 처분을 받는다. 이듬해인 81년 사법시험 2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3차 면접 때 ‘시위 전력’이 문제가 돼 최종 합격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82년 두 번째로 3차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동기 될 뻔
그로부터 25년 시간이 흐른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시위 전력’을 이유로 사법시험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사법연수원 입소 기회를 줄 것을 건의하면서 그에게 뒤늦게 ‘사법시험 최종합격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사법시험 23회 때 2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뒤 사법시험 49회로 최종합격했어요. 참 먼 길을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가 정상적으로 사법시험 23회로 합격했다면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창석 대법관,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동기가 될 뻔했다. 2007년 사법시험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당시 현역 국회의원 신분이던 그는 사법연수원 입소를 뒤로 미뤘다. 2012년 5월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그는 2013년 1월 사법연수원 44기로 입소했다. 연수원 입소 때 그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1세. 1월 19일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 길을 걷게 된 그는 올해 63세다.
▼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입니다.
“(웃음) 그래요? 집사람도 제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젊은 사람들과 생활하더니 많이 젊어졌다’고요.”
▼ 늦깎이 연수원생으로 젊은이 사이에서 공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사법연수원 입소 전까지 6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매일같이 책상에 앉아 구약과 신약을 독파했어요. ‘민법총칙’부터 연수원 수업에 필요한 책까지 구해 미리 예습도 했고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죠. 그 말을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서울을 가운데 두고 경기도 동남쪽 광주시에 기거하는 그는 경기도 서북쪽 고양시에 위치한 사법연수원까지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을 아껴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 연수원 시절 일과가 어땠습니까.
“연수원 바로 앞에 호수공원이 있어요. 아침에 1시간 정도 산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예습하고, 수업 듣고, 저녁에는 매일 자정까지 과제하고…. 연수원 생활이 굉장히 빡빡해요.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생활의 연속이에요. 그래도 조와 반 모임, 체육대회 등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어요. 남들 공부할 때 혼자 쉬면 뒤처질 수 있지만, 다같이 시간을 보내면 부담이 덜하거든요(웃음). 연수원생 사이에서 경쟁의식이 그만큼 치열해요.”
정 변호사는 “수업을 마칠 때쯤 (사법연수원) 공익요원이 끌고 오는 수레 소리가 들리면 ‘두툼한 판례집 한 권씩 나눠주고 강평하라는 숙제가 또 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긴장하게 되더라”며 ‘빡센’ 연수원 생활을 회고했다.
“매 학기마다 치르는 연수원 시험과목이 모두 10과목이에요. 몇 해 전까지는 열흘 동안 내리 시험을 치렀다고 해요. 그러다 연수원생 한 사람이 시험 기간에 과로로 숨진 일이 있은 뒤로 하루 건너 한 과목씩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다 보니 시험을 한 달 가까이 봐요. 그때는 집에 갈 엄두도 못 내고 기숙사에서 빨래를 해가며 시험을 봤죠.”
▼ 뒤늦게 공부하느라 고생을 참 많이 했네요.
“나이 들어 공부하는 사람이 두뇌 회전이 빠른 젊은 사람을 따라가려면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어요.”
▼ 성적은 어땠나요.
“동기 연수원생들한테 눈총 좀 받았죠. 썩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뒤를 받쳐주지는 않았거든요.”
‘광장’서 변호사로 새 출발
▼ 국회의원 등 오랜 사회 경험이 연수원 공부에 도움이 됐나요.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문제는 철저하게 엄격한 기준에 따라 해야 돼요. 법이 모든 사회 현상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판례가 중요한 기준이 되죠. 연수원에서 배우는 것도 판례 연구가 많아요. 연수원 공부라는 게 나이가 많고 사회 경험이 많다고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토론 수업 때 젊은 연수원생과 대화해보면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사회경험이 있는 것이 조금 유리한 면은 있어요.”
▼ 연수원생들은 검찰과 법원, 변호사 시보를 거치도록 돼 있는데.
“저도 똑같이 시보 생활을 했어요. 연수원 수업이든 시보든 예외가 전혀 없었어요. 검찰에선 직무대리 임명장을 받고 가벼운 사건은 직접 조사도 했고, 법원에서는 조정위원으로 간단한 조정도 진행했어요. 단독 재판부에서 재판 과정을 참관하고 판결문 초안을 직접 써보기도 하고요. 변호사 시보 때는 친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건 수임부터 재판 진행까지 가까이서 지켜봤어요.”
▼ 변호사로서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계획입니까.
“2월부터 로펌 광장에서 변호사로 일하게 됐어요. 광장은 ‘최고 전문가 집단’이란 자부심이 아주 강한 곳이에요. 최고 인재가 모인 곳에서 제 몫을 다해내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죠.”
변호사로서의 포부를 밝히는 그의 ‘씩씩한’ 모습에서 사회 진출을 앞둔 20대 청년의 패기가 느껴졌다.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단순히 광고카피가 아닌, 현실이란 점을 몸소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1980년대 초 ‘시위 전력’에 발목이 잡혀 사시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지 못한 그는 30년 가까이 정계에서 활동했다. 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 안양 동안을에 처음 출마했고, 2000년 총선 때는 국회의원 정수 축소로 인근 지역구와 통합되면서 출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정 변호사는 “(2000년) 당시 지역구별 인구 편차를 최대 4 대 1까지 허용한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해 승소를 끌어냈다.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현행 3 대 1에서 2 대 1로 축소하라는 지난해 헌법재판소 판결의 최초 문제 제기자가 바로 정 변호사인 셈.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던 2005년 경기 광주 재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했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 경기 광주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 지냈는데, 내년 총선에 출마합니까.
“막 변호사로 첫발을 내딛었는데 좌고우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변호사의 시각에서 과거 입법 과정에 참여한 법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유심히 살펴볼 작정입니다. 만약 법 따로 현실 따로인 간극이 존재한다면, 앞으로 어떤 입법으로 보완해야 할지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입법과 현실 사이에서 가교 노릇을 잘하는 것이 제가 담당해야 할 몫이 아닐까 싶어요.”
정 변호사의 삶은 우리나라의 굴곡진 현대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서울대 법대에 재학 중이던 1975년 시위를 주도했다는 이유로 퇴학과 동시에 강제 징집된 그는 제대 후 사법시험을 준비했다. 80년 ‘서울의 봄’ 때 복학했고 그해 사법시험 1차에 합격하고, 2차에서는 행정학에서 과락(科落)을 하는 바람에 동차 합격의 기회를 놓쳤다. 그는 80년 복학 후 후배들이 주도한 ‘개헌 포럼’을 지도한 혐의로 ‘5·17 포고령 위반’으로 또다시 퇴학 처분을 받는다. 이듬해인 81년 사법시험 2차 시험에 합격했지만 3차 면접 때 ‘시위 전력’이 문제가 돼 최종 합격하지 못했다. 이듬해인 82년 두 번째로 3차 면접을 봤지만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동기 될 뻔
그로부터 25년 시간이 흐른 2007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가 ‘시위 전력’을 이유로 사법시험에서 탈락한 이들에게 사법연수원 입소 기회를 줄 것을 건의하면서 그에게 뒤늦게 ‘사법시험 최종합격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사법시험 23회 때 2차 시험에 합격했는데, 그로부터 26년이 흐른 뒤 사법시험 49회로 최종합격했어요. 참 먼 길을 돌아온 느낌입니다.”
그가 정상적으로 사법시험 23회로 합격했다면 강금실 전 법무부 장관, 김창석 대법관, 박한철 헌법재판소장, 황교안 법무부 장관과 동기가 될 뻔했다. 2007년 사법시험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았지만 당시 현역 국회의원 신분이던 그는 사법연수원 입소를 뒤로 미뤘다. 2012년 5월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친 그는 2013년 1월 사법연수원 44기로 입소했다. 연수원 입소 때 그의 나이는 환갑을 넘긴 61세. 1월 19일 사법연수원을 수료하고 변호사 길을 걷게 된 그는 올해 63세다.
▼ 나이에 비해 훨씬 젊어 보입니다.
“(웃음) 그래요? 집사람도 제게 그렇게 얘기합니다. ‘젊은 사람들과 생활하더니 많이 젊어졌다’고요.”
▼ 늦깎이 연수원생으로 젊은이 사이에서 공부하기 쉽지 않았을 텐데요.
“18대 국회의원 임기를 마치고 사법연수원 입소 전까지 6개월 정도 시간이 있었어요. 그때 매일같이 책상에 앉아 구약과 신약을 독파했어요. ‘민법총칙’부터 연수원 수업에 필요한 책까지 구해 미리 예습도 했고요. ‘공부는 엉덩이로 한다’는 말이 있죠. 그 말을 실천하려고 부단히 노력했어요.”
서울을 가운데 두고 경기도 동남쪽 광주시에 기거하는 그는 경기도 서북쪽 고양시에 위치한 사법연수원까지 오가는 데 드는 시간을 아껴 공부에 더 많은 시간을 쏟기 위해 기숙사 생활을 했다고 한다.
▼ 연수원 시절 일과가 어땠습니까.
“연수원 바로 앞에 호수공원이 있어요. 아침에 1시간 정도 산책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예습하고, 수업 듣고, 저녁에는 매일 자정까지 과제하고…. 연수원 생활이 굉장히 빡빡해요. 하루 종일 책과 씨름하지 않으면 견디기 힘든 생활의 연속이에요. 그래도 조와 반 모임, 체육대회 등에는 빠지지 않고 참석했어요. 남들 공부할 때 혼자 쉬면 뒤처질 수 있지만, 다같이 시간을 보내면 부담이 덜하거든요(웃음). 연수원생 사이에서 경쟁의식이 그만큼 치열해요.”
정 변호사는 “수업을 마칠 때쯤 (사법연수원) 공익요원이 끌고 오는 수레 소리가 들리면 ‘두툼한 판례집 한 권씩 나눠주고 강평하라는 숙제가 또 떨어지겠구나’ 하는 생각에 절로 긴장하게 되더라”며 ‘빡센’ 연수원 생활을 회고했다.
“매 학기마다 치르는 연수원 시험과목이 모두 10과목이에요. 몇 해 전까지는 열흘 동안 내리 시험을 치렀다고 해요. 그러다 연수원생 한 사람이 시험 기간에 과로로 숨진 일이 있은 뒤로 하루 건너 한 과목씩 시험을 치르는 것으로 바뀌었어요. 그러다 보니 시험을 한 달 가까이 봐요. 그때는 집에 갈 엄두도 못 내고 기숙사에서 빨래를 해가며 시험을 봤죠.”
▼ 뒤늦게 공부하느라 고생을 참 많이 했네요.
“나이 들어 공부하는 사람이 두뇌 회전이 빠른 젊은 사람을 따라가려면 시간을 더 투자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어요.”
▼ 성적은 어땠나요.
“동기 연수원생들한테 눈총 좀 받았죠. 썩 좋은 성적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뒤를 받쳐주지는 않았거든요.”
‘광장’서 변호사로 새 출발
▼ 국회의원 등 오랜 사회 경험이 연수원 공부에 도움이 됐나요.
“법을 적용하고 해석하는 문제는 철저하게 엄격한 기준에 따라 해야 돼요. 법이 모든 사회 현상을 규정할 수 없기 때문에 판례가 중요한 기준이 되죠. 연수원에서 배우는 것도 판례 연구가 많아요. 연수원 공부라는 게 나이가 많고 사회 경험이 많다고 반드시 유리한 것은 아니에요. 그래도 토론 수업 때 젊은 연수원생과 대화해보면 사안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사회경험이 있는 것이 조금 유리한 면은 있어요.”
▼ 연수원생들은 검찰과 법원, 변호사 시보를 거치도록 돼 있는데.
“저도 똑같이 시보 생활을 했어요. 연수원 수업이든 시보든 예외가 전혀 없었어요. 검찰에선 직무대리 임명장을 받고 가벼운 사건은 직접 조사도 했고, 법원에서는 조정위원으로 간단한 조정도 진행했어요. 단독 재판부에서 재판 과정을 참관하고 판결문 초안을 직접 써보기도 하고요. 변호사 시보 때는 친구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건 수임부터 재판 진행까지 가까이서 지켜봤어요.”
▼ 변호사로서 앞으로 어떻게 활동할 계획입니까.
“2월부터 로펌 광장에서 변호사로 일하게 됐어요. 광장은 ‘최고 전문가 집단’이란 자부심이 아주 강한 곳이에요. 최고 인재가 모인 곳에서 제 몫을 다해내려면 더 열심히 해야겠죠.”
변호사로서의 포부를 밝히는 그의 ‘씩씩한’ 모습에서 사회 진출을 앞둔 20대 청년의 패기가 느껴졌다. 그는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얘기가 단순히 광고카피가 아닌, 현실이란 점을 몸소 증명해 보이는 듯했다.
1980년대 초 ‘시위 전력’에 발목이 잡혀 사시 최종합격 통지서를 받지 못한 그는 30년 가까이 정계에서 활동했다. 96년 15대 총선 때 신한국당 후보로 경기 안양 동안을에 처음 출마했고, 2000년 총선 때는 국회의원 정수 축소로 인근 지역구와 통합되면서 출마 기회를 잡지 못했다. 정 변호사는 “(2000년) 당시 지역구별 인구 편차를 최대 4 대 1까지 허용한 것은 헌법에 위배된다”고 헌법소원을 제기해 승소를 끌어냈다. 선거구별 인구 편차를 현행 3 대 1에서 2 대 1로 축소하라는 지난해 헌법재판소 판결의 최초 문제 제기자가 바로 정 변호사인 셈. 그는 박근혜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를 맡았던 2005년 경기 광주 재선거를 통해 국회에 입성했고, 2008년 18대 총선에서 재선에 성공했다.
▼ 경기 광주에서 국회의원을 두 번 지냈는데, 내년 총선에 출마합니까.
“막 변호사로 첫발을 내딛었는데 좌고우면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요. 변호사의 시각에서 과거 입법 과정에 참여한 법들이 현실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 유심히 살펴볼 작정입니다. 만약 법 따로 현실 따로인 간극이 존재한다면, 앞으로 어떤 입법으로 보완해야 할지 고민해볼 생각입니다. 입법과 현실 사이에서 가교 노릇을 잘하는 것이 제가 담당해야 할 몫이 아닐까 싶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