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79

2011.03.21

국모 시해…강제 하야…힘없이 나라 잃은 설움이여!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홍릉(洪陵)

  • 이창환 상지영서대 조경학과 교수 55hansong@naver.com 사진 제공·문화재청, 서헌강, 이창환

    입력2011-03-21 11:2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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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모 시해…강제 하야…힘없이 나라 잃은 설움이여!

    1 홍릉을 지키고 있는 석마. 대한제국의 기우는 모습을 보는 듯하다. 2 홍릉은 황제의 능제에 따라 석수가 침전 전면에 배치되고 숫자도 많아졌다. 홍릉의 참도는 삼로이며 침전(배전)은 일자형인 것이 특이하다. 3 청량리에 있던 명성황후의 능을 천장해 고종과 합장한 홍릉의 능침.

    홍릉(洪陵)은 조선 제26대 왕이며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인 고종(高宗皇帝, 1852~1919, 재위 1863~1907)과 명성황후(明成皇后, 1851~1895) 민씨의 동봉이실 합장릉이다.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 홍유릉지구에 있다.

    고종은 1852년 남연군의 아들 흥선대원군 이하응과 여흥부대부인 민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철종이 승하하자 당시 왕실 최고 어른인 조 대비(추존왕 익종비)는 220년 전에 대가 갈린 인조의 3남 인평대군의 후손인 남연군을 사도세자의 3남 은신군에 양자로 입적하고, 그의 손자를 왕위에 앉혔는데 바로 그가 고종이다. 철종이 승하한 날 고종을 즉위시킨 조 대비는 수렴청정을 시작했다. 조 대비는 남편인 효명세자(익종)를 고종의 양부로 하고 자신(신정왕후)을 모친으로 입적해 왕위를 이었다.

    고종은 43년 7개월간 재위하며 세도정치를 분쇄해 쇠락한 왕권을 되찾고 조선을 압박해오는 외세에 대적하기 위한 과감한 개혁정책을 추진했다. 국호를 대한으로 바꾸어 황제국으로 했으며, 신식 군대를 만들어 친히 통솔하는 정책을 펴기도 했다. 그러나 일본의 침략 야욕은 친러 정책을 지향하는 명성황후를 시해하고 고종을 강제로 하야시키는 만행을 저질렀다.

    너무 늦은 외세에 대항한 개혁 정책

    고종은 황제국 선언 직후 전주의 시공묘를 봉산(정비)한 사당인 조경단(肇慶壇)을 설치하고 삼척에 있는 이태조 5대조의 묘소를 찾아 보수하고 준경묘, 영경묘라 명명했다. 태조를 태조고황제로 하고 장조와 정조, 순조, 문조 등 4대조를 황제로 추존 배향했다. 이때까지 장조는 장종, 정조는 정종, 문조는 익종으로 불렸다. 장조(사도세자)의 현륭원도 융릉(融陵)으로 능호를 추존 변경했다. 황제국으로 가는 국가 시스템의 정비였던 것이다.



    1910년 한일강제병합으로 일본에 국권을 강탈당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통한하던 고종은 1919년 1월 21일(음력 1918년 12월 20일)에 덕수궁 함녕전에서 승하했다. 일제 강점 하의 대한제국 황제였던 고종의 장례는 황제의 국장도 아닌 왕족의 장으로 치렀는데 그마저도 7개월도 아닌 3개월 장으로 했다. 처음에는 조선의 국장제인 ‘상례보편제’를 따랐는데 갑작스럽게 일제가 개입해 장례위원회를 도쿄 국내성에 두고 조선총독부가 ‘대훈위 이태왕 훙거(薨去)’ 칙령에 따라 일본식으로 치르도록 했다. 장례위원장인 총호사도 일본인인 정무총감이 맡아 진행했다. 국장이 아닌 이왕직제로 이루어져 조선의 상왕제에 일본식이 가미된 특이한 장례였다.

    장례는 일본군과 일본군함까지 동원된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 치렀다. 일제의 만행과 억압에 분노한 국민은 고종의 발인 날인 1919년 3월 1일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일으켰다. 그러자 3월 4일 현궁에 관을 내리는 하관식도 민심이 두려워 밤 10시에 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청량리 홍릉을 조영한 후, 조선을 황제국으로 바꾸고 황제릉을 만들어 자신의 능과 합장하고자 했다. 그래서 금곡에 능의 자리를 잡고 틈틈이 많은 석물을 만들어놓았다. 그리고 천봉을 위해 청량리에서 금곡까지 60여 리 신작로를 만들고 버드나무(미루나무) 가로수를 심었다. 황제국에 대한 고종의 의지와 집념을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명성황후는 여성부원군 민치록의 딸로 1851년 9월 25일에 태어났다. 세도정치에 치를 떨며 외척의 발호를 경계하던 시아버지 흥선대원군과 시어머니 민씨의 천거로 왕실에 들어온 명성황후는 고종이 친정에 들어가자 쇄국정책을 지향하는 흥선대원군과 다르게 열강과 우호적 관계를 이뤄 대원군과 대립관계를 유지했다. 민비가 정권의 핵심이 돼 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맺고, 임오군란·갑신정변 등을 외세를 끌어들여 막았다.

    그런데 민씨가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 친러 분위기를 조성하자,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군은 1895년 10월 8일(음력 8월 20일) 묘시(새벽 4시경)에 민비를 경복궁 건청궁 곤녕합에서 시해하고, 시신은 경복궁 뒷산 녹원(鹿苑)에서 불태웠다. 한 나라의 국모가 외세에 의해 실로 끔찍한 일을 당한 것이다. 바로 을미사변이다. 일제에 의해 집권한 김홍집 내각은 시해 사실을 고종에게 알리지 않았다. 일본군의 내정간섭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하게 하는 대목이다.

    민비는 시해 3개월 만에 소렴과 대렴을 마친 후 재궁에 안치됐다. 능호는 숙릉(肅陵)으로 정했다. 하지만 장지는 쉽게 정하지 못했다. 맨 처음 동구릉 숭릉의 오른쪽으로 정해 역사를 시작했으나 중지하고 다시 교하, 창릉 주변 등 27곳의 후보지를 놓고 길지를 택했지만 1년 3개월이 돼도 정하지 못했다. 후보지 중 연희궁터는 길이 번창할 땅이고 청량리는 더없이 편안한 곳으로 평가돼 최종적으로는 청량리로 결정했다.

    그러나 고종은 국장을 치르지 않고 날마다 재궁(관)에 가칠(加漆)할 것만 명했다. 불태워진 부인에 대한 통한이었을까? 복수를 위한 준비였을까? 그리고 1년간 묘, 전, 궁, 능, 원의 향사(제사 올리는 행사)를 정지했다. 심지어 사가의 장례조차 한동안 금지했다 풀어줬다. 일제는 삼통의 삭일인 11월 17일을 양력 1월 1일로 쓰도록 했다. 이때부터 우리나라는 양력을 쓰기 시작했다. 그런데 양력 1월 1일 바로 전날, 즉 음력 11월 16일에 고종은 500년마다 변하는 시운(時運)에 대응한다며 상투와 망건을 벗고 삭발을 했다. 그리고 구습과 쇄국을 버리고 시제의 변화를 백성도 따르도록 명했다. 연호도 건양(建陽)으로 했다.

    국모 시해…강제 하야…힘없이 나라 잃은 설움이여!

    고종황제가 친히 조영한 홍릉.

    각 능·원·묘의 한식 제사도 청명에 행하도록 했는데, 이것은 지금 우리가 매년 청명에 조상의 산소를 찾는 문화로 이어져온다. 종묘와 각 능·원의 제사는 신역서보다 구역서를 따르는 것이 혼란을 덜 가져온다고 해 구역서를 따르도록 한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제례는 음력을, 일상생활은 양력을 따르는 이중과세의 발단이 됐다. 1897년 5월 고종은 황제로 즉위하고 그해 10월 민비를 황후로 추봉했다. 민비는 황후로 추봉된 다음 달 청량리에 황후의 예에 따라 모셔졌으니, 홍릉은 한반도 최초의 황후릉이 됐다. 그것도 일본군에 시해된 지 2년 2개월 만이니 민비는 조선의 왕과 왕비 중 장례기간이 가장 긴 기록을 갖게 됐다. 여기서 고종이 민비의 시해와 죽음을 애통해하며 국왕으로서 권위를 강화하고 자주독립국가로 위상을 높이고자 했음을 알 수 있다. 고종은 민비의 국장을 빌미로 조선을 대한제국의 황제국으로 승격해 국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2년여에 걸쳐 조영한 홍릉의 석물은 고종의 마음에 들지 않아 당시 총호사(장례위원장), 부석소 낭청(석물제조 책임관), 감조관(감독관), 석수 등이 징계를 당했다. 그도 그럴 것이 홍릉 석물은 이제까지의 조선왕릉 석물과는 규모와 형태 등에서 사뭇 달랐다. 하지만 이는 고종이 명성황후의 홍릉에 함께 묻히기 위해 시간 끌기를 한 것이다. 고종은 풍수적으로 허하다는 이유를 들어 홍릉을 자신이 묻힐 황제릉(수릉·壽陵, 생전에 만들어두는 능)으로 조성하려 했던 것이다. 고종이 재임 중에도, 퇴임 후에도 석물까지 직접 감독해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홍릉을 청량리에 조영하면서 강화에서 채취한 석물 운반을 위해 마포나루에서 청량리까지 신작로를 만들고(현 중앙선, 이후 일제는 이것을 중앙선 열차 놓는 데 사용했다) 종각에서 청량리까지 전철을 놓기도 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전철이다.

    홍릉은 한반도 최초의 황후릉

    국모 시해…강제 하야…힘없이 나라 잃은 설움이여!

    고종이 생전에 황제릉을 구상해 만들어놓은 것으로 추정되는 홍릉의 사자상. 정교하고 해학적인 표현이 예술미를 더해준다. 조선 왕릉에는 호랑이상이 있으며, 사자상은 이곳에서 처음 나타난다.

    금곡의 홍릉 정자각은 ‘오례의’의 예대로 침전(寢殿)이라는 배위청을 전각 안에 두도록 했다. 정자각 변화를 볼 수 있는 내용이다. 홍릉은 혼란기였던 조선 말기에 조성한 황릉제 능역으로 능침의 삼계를 없애고, 석물을 배전(침전) 앞으로 배치했으며, 정자각 대신 일(一)자형 건물의 배전을 세웠다. 능침 주위에 배치한 석수는 배전 앞, 참도의 좌우에 그 종류를 더해 나란히 세웠다. 황제릉은 일반 왕릉에 비해 능침의 석수가 배전 앞에 놓이고 정자형의 정자각이 일자형 침전으로 바뀌며 석수가 많아졌다. 특히 능침의 석양과 석호가 없어지고 명·청의 황제릉처럼 여러 종류의 석수가 놓였다.

    능침은 병풍석으로 하고 난간석을 둘렀으며, 능침을 수호하는 석양과 석호는 세우지 않고 혼유석 1좌를 세웠다. 그 양옆으로 망주석 1쌍과 사각 장명등을 놓았다. 이곳 능침의 석물은 청량리 홍릉의 명성황후 능침에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침전 앞 석물은 홍전문과 배전 사이에 문석인, 무석인, 기린, 코끼리, 사자, 해태, 낙타를 한 쌍씩, 그리고 말상을 두 쌍씩 대칭 배치했다. 중국 황제릉의 석물 배치에서와 같은 동물상이지만 그 조각의 형태는 사뭇 다르다. 참도는 어도와 신도의 두 단으로 구분돼 있던 기존의 것에 비해 가운데가 높고 양옆이 한 단 낮은 삼단으로 돼 있다. 이 밖에 수복방, 수라간, 비각, 소전대, 산신석, 어정, 제정 등이 배치돼 있다.

    홍유릉의 삼문을 지나 오른쪽 홍릉을 향하다 보면 원지원도(圓池圓島) 형태의 홍릉 연지가 있다. 조선의 왕릉 중 가장 큰 연지(蓮池)다. 원형의 연못에 둥근 섬이 있는 형태인데, 천원지방설(天圓地方說)에 따라 네모난 연못에 원형의 섬을 둔 일반적인 조선시대 연못과는 다르다. 그 조영 철학이 무엇인지 궁금증을 일으키는데 아마도 일제강점기에 조영한 홍릉이라 왜곡된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왕릉의 연지는 능역의 방화 및 급수 역할을 할 뿐 아니라 풍수적 합수의 의미가 있어 중요시하는 시설이다. 연못에는 부들과 연꽃 등 수생식물이 있으며 원형의 섬에는 향나무, 소나무, 진달래 등이 식재돼 아름답다. 금천교 안쪽 좌측에는 일반 재실보다 규모가 큰 재궁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존돼 있다. 이는 황제릉에만 있는 특이한 형태다. 일반적인 외재실은 능역 담장 밖 입구에 일부 훼손된 상태로 있다.

    고종은 명성황후 민씨를 비롯해 7명의 아내에게서 6남 1녀를 두었는데 귀인 이씨 사이에서 태어난 완친왕이 장남, 명성황후 사이에서 태어난 순종이 둘째다. 순종의 능호는 유릉(裕陵)으로 바로 옆 능선에 있다. 의친왕과 영친왕의 원이 능선 너머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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