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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ULTURE

욘사마 책 일본어로 번역 팔순 할머니 남다른 한국어 사랑

고가 후미코 씨 매일 2쪽씩 옮겨 430쪽 완역

  •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욘사마 책 일본어로 번역 팔순 할머니 남다른 한국어 사랑

욘사마 책 일본어로 번역 팔순 할머니 남다른 한국어 사랑

(위) 번역을 끝내고 자축의 의미로 10월 초 두 딸과 손녀들을 데리고 서울을 방문한 고가 후미코 할머니. (아래) 후미코 할머니가 번역한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이 적힌 노트. 9권의 노트에 이런 식으로 책 내용을 한 문장씩 옮겨 적고 번역했다.

일본 열도의 남단 후쿠오카 현 구루메 시 외곽에 사는 고가 후미코(古賀二美子·83) 할머니는 매일 아침 책상 앞에 단정히 앉아, 한류스타 배용준 씨가 쓴 책 ‘한국의 아름다움을 찾아 떠난 여행’을 펼쳤다. 이 책은 지난해 가을 일본어판이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 순위에 올랐고, 한때 품절돼 배용준 씨 팬들의 애간장을 녹이기도 했다.

그러나 후미코 할머니는 일본어판이 아닌 한국어판을 구입했다. 함께 한국어를 배운 일본 아가씨가 인터넷으로 주문해준 책이다. 후미코 할머니는 ‘일본어판은 필요 없다. 내 손으로 직접 번역한 책을 가족들에게 읽히고 싶다’고 생각했다.

2010년 새해가 시작되자 실행에 옮겼다. 목표는 일본의 추석 명절인 오봉(お盆, 양력 8월 15일)까지 마치는 것이었다. 430쪽에 이르는 두꺼운 책이어서 오봉까지 완성하려면 매일 2쪽씩 거르지 않고 번역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왔다. 후미코 할머니의 한국어 실력으로 2쪽을 일본어로 옮기는 데 꼬박 8시간이 걸렸다. 그것도 젊은이들처럼 컴퓨터로 작업하는 것이 아니라 사전에 의지하며 대학노트에 볼펜으로 또박또박 한 글자씩 적어나갔다. 한글로 된 문장을 한 줄 옮겨 적고, 그 밑에 일본어 번역문을 적는 식으로 한 글자도 빠짐없이 직역을 했다. 어찌나 번역 작업에 몰입했는지 도중에 가족들이 “식사하세요”라고 아무리 불러도 모를 정도였다.

후미코 할머니는 혼자 번역한 것에 만족하지 않았다. 일주일치 번역이 끝나면 월요일마다 자신의 한국어 선생님인 윤태숙(구루메 시 거주·45) 씨에게 가지고 가서 교정을 부탁했다. 윤 선생은 빨간 펜을 들고 한국 문화와 한국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해서 어색하게 번역된 부분을 꼼꼼히 고쳐주었다. 이렇게 완성한 번역 노트가 9권, 이것을 다시 다듬어서 최종 완성한 번역 노트가 5권이나 됐다. 후미코 할머니가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꼭 4년 만에 해낸 일이다.

후미코 할머니와 한국어의 인연은 2004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남편을 먼저 떠나보낸 뒤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외손녀가 드라마 ‘겨울연가’를 추천해주었다. 꼬박 밤을 새워가며 20부작을 3일 만에 다 보았다. 주제곡에 흠뻑 빠져서 악보를 사다가 피아노로 연습을 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한국어가 귀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국어는 일본어와 어순이 같고 한자음도 비슷한 것이 많아 중국어보다 훨씬 친근했다. 한국어가 어떤 언어인지 궁금해지자 본격적으로 배워보기로 했다. 그때 일본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윤 선생을 만났다. 윤 선생은 후미코 할머니의 한국어 사랑은 감동적인 수준이라고 말한다.



“후미코 씨는 2006년부터 매주 월요일 오전에 한국어 교실에 나오세요. 구루메 시 외곽에 거주하고 있어 며느리가 전철역까지 차로 태워다드리면 구루메 역에서 내려 다시 버스를 타고 한국어 교실까지 오는 데 1시간 반 이상이 걸린다고 해요. 그렇지만 수업에 빠진 적이 거의 없으세요. 지난해 너무 공부에 몰두한 나머지 쓰러지신 적이 있는데 ‘월요일 수업에 가야 한다’고 말해서 자식들이 ‘이 몸으로 무슨 공부냐’며 어이없어할 정도였지요. 처음 배용준 씨의 책을 번역하겠다고 하셔서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한국 문화를 소개한 것이라 전문용어가 많이 나오고 내용이 결코 쉽지 않은 책이거든요. 솔직히 월요일마다 후미코 씨가 번역한 문장을 교정하는 일이 제게도 벅찼습니다. 그렇지만 여든을 넘긴 할머니가 끝까지 해내시는 모습에 힘을 얻었지요. 번역을 하면서 후미코 씨의 한국어 실력은 일취월장했습니다.”

한국 문화와 한국어 사랑 갈수록 뜨거워

욘사마 책 일본어로 번역 팔순 할머니 남다른 한국어 사랑

한글사랑회 회원들.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모여 한일문화교류를 하고 있다.

윤태숙 씨는 단국대 일어일문과를 졸업하고 일본인 미즈마치 유지 씨와 결혼해 겐타와 유타 두 아들을 낳고 20년째 후쿠오카 현에서 살고 있다. 윤씨는 일본인들에게 한글을 가르친 지 18년이 됐지만 갈수록 뜨거워지는 일본인의 한국 문화와 한국어 사랑을 실감한다고 말한다. 특히 한류 열풍이 분 2004년 이후 학생 수가 크게 늘었다. 현재 그에게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은 100여 명.

일본인은 일단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하면 직접 한국 문화를 체험하고 싶어 한다. 최근에는 ‘주몽’ ‘대장금’ ‘상도’ ‘선덕여왕’ 등 한국의 역사 드라마에 빠져 경주, 공주, 부여, 안동 등지로 역사 여행을 떠나는 이가 늘고 있다. 얼마 전 제자 중 구로다 미에코(黑田三枝子·59) 씨 부부가 경주로 ‘선덕여왕 투어’를 다녀오기도 했다. 또 후쿠오카 현청에 근무하는 사이쇼 마사미쓰(初所正光·55) 씨는 수의사로 제주도 연수를 다녀올 만큼 한국어 실력이 만만치 않다.

“일본인의 특징은 한번 시작하면 끝까지 한다는 겁니다. 또 한국어를 배우는 동기가 순수해요. 퇴역 군인인 시모즈마 도시오(下妻男·76) 씨는 젊은 시절 재일동포 아가씨를 좋아했던 기억 때문에 은퇴 후 한국어를 배우기 시작해 벌써 15년째랍니다. 그분이 한국어를 시작했을 때는 지금처럼 한류 바람이 분 것도 아니고 ‘한국말을 왜 배우느냐’는 식으로 은근히 비하하던 시절이었죠. 60대 중반인 아카우라 겐지(赤裏健治) 씨도 취미로 시작한 한국어 공부가 10년이 넘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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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쿠오카 현 구루메 시에서 18년째 일본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는 윤태숙 씨.

윤 선생과 제자들의 한국어 수업은 강의실에서 끝나지 않는다. 1월 신년회, 5월 여행, 9월 한국어스피치대회, 11월 한국어검정시험, 12월 송년회로 한 해 일정이 빡빡하다. 그 와중에 중급 이상의 한국어 실력을 쌓은 제자들이 중심이 돼 4년 전 ‘한글사랑회’라는 동호회를 만들었다. 회원은 25명 정도로, 이들은 매달 둘째 주 토요일에 구루메 시 소유의 900년 된 전통가옥을 빌려서 어학연수를 온 한국 유학생들을 초청해 일본 음식을 직접 만들어주고 대화하는 자리를 마련한다. 유학생 중 생일을 맞은 이가 있으면 함께 축하하고 선물도 전달한다. 누가 돈을 주고 시킨 일도 아니고, 칭찬해주는 일도 아니다. 단지 한국 문화를 더 알고 싶기에 자발적으로 나선 일이다. 후미코 할머니도 이 모임에 참석하고 있다. 윤 선생은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한일문화교류의 가교가 될 것이라 믿는다.

“일본의 젊은 세대는 일본이 36년간 한국을 지배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오히려 식민지시대를 경험했던 분들이 한국에 많은 관심과 애정을 갖고 있습니다. 매년 4월 새로 한국어 강좌가 열릴 때 학생들이 각자 자기소개를 하는데, 올해는 한 아주머니가 ‘우리가 조선에 너무 나쁜 짓을 많이 해서 미안합니다’라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이셔서 숙연해진 적이 있어요. 올해가 한일강제병합 100년인 해잖아요. 이처럼 한국에 우호적인 일본인들이 한일관계 개선에 큰 힘이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주간동아 2010.10.11 757호 (p60~61)

김현미 기자 khmzip@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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