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735

2010.05.03

“상민이 오빠, 안녕!”

농구계 골든 세대 맏형 이상민 은퇴 … 지도자 길 선택 조만간 농구 유학길

  • 김종석 동아일보 스포츠레저부 기자 kjs0123@donga.com

    입력2010-05-03 13:3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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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는 ‘영원한 오빠’로 불렸다. 강산이 두 번 바뀌고도 남을 긴 시간 속에서 그의 인기는 식을 줄 몰랐다. 오히려 뜨거워만 갔다. 하지만 흐르는 세월은 어쩔 수 없었다. 누구보다 자신이 그 사실을 절감했기에 어려운 결심을 했다. “이젠 떠날 때가 됐다”며 삼성의 ‘컴퓨터 가드’ 이상민(38)이 은퇴를 선언했다. 늘 코트를 화려하게 수놓았기에 많은 팬은 그의 퇴장을 안타까워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컴퓨터 가드

    이상민은 서울 성북초교 5학년 때인 1983년 처음 농구공을 잡았다. 운동장에 등장한 농구 골대가 축구와 야구를 좋아하던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친구들보다 키가 크다는 이유로 농구부에 들어간 뒤 홍대부중을 거쳐 홍대부고에 진학할 때까지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중학교 시절에는 또래보다 오히려 키가 작아 키 크는 방법이 담긴 책을 탐독하기도 했다. 당근, 사과, 우유, 정어리를 섭취하면 도움이 된다고 해서 3개월 내내 그것만 먹은 적도 있다. 효과가 있었는지 중3 때 8cm가 자라 고등학교 올라가서는 182cm가 됐다.

    이상민이 이름 석 자를 알리기 시작한 것은 홍대부고 졸업반 때인 1990년. 당시 그는 동국대총장배 고교농구대회에서 처음 우승을 경험한 뒤 노기석, 이무진 등과 1년 동안 팀을 5관왕으로 이끌었다. 이상민은 “내 농구 인생에서 첫 번째로 기억에 남는 순간이다. 한 해에 3번밖에 패하지 않았다”고 자랑스러워했다. 이런 활약으로 그는 연세대, 고려대, 중앙대 등의 스카우트 표적이 됐다. 그의 선택은 연세대였다. 같은 가드로 연세대 출신인 유재학의 플레이에 매료된 영향도 컸다. 이상민을 앞세운 연세대는 1994년 농구대잔치에서 기아, 현대, 삼성 등 하늘 같던 선배 팀을 모두 꺾고 우승했다. 당시 연세대는 20연승을 질주하다 상무와의 챔피언결정전 3차전에서 패한 뒤 4차전을 이겨 3승 1패로 승리를 결정지었다.

    농구대잔치에서 대학 팀이 정상에 오른 것은 사상 처음이었다. 연세대는 이상민을 중심으로 서장훈, 우지원, 김훈, 석주일 등 호화 멤버를 갖췄다. 이상민은 특급 포인트 가드로 서장훈의 골 밑 플레이와 우지원, 김훈 등의 외곽슛을 살려주며 맹활약했다. 이상민은 118개의 어시스트로 이 부문 1위를 차지했다. 농구를 소재로 한 TV 드라마 ‘마지막 승부’, 만화 ‘슬램덩크’ 등이 덩달아 관심을 끄는 가운데 이상민은 여성 팬의 우상이었다. 서울 서대문구 신촌동의 연세대 숙소에는 소녀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고, 하루 수백 통의 팬레터가 몰려들었다.



    1995년 연세대 졸업을 앞두고 삼성과의 계약이 유력했다. 그러나 2년 선배 오성식이 현대로 가려다 SBS로 진로를 바꾼 뒤, 1년 선배 문경은이 삼성에 입단한 여파에 휘말려 현대로 바꿨다. 현대 입단 후 바로 국군체육부대 상무에 입대했다. 1997년 프로 출범을 앞두고 병역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불사조 상무의 검은 유니폼을 입은 이상민은 1996년 1월 26일 농구대잔치 SBS와의 경기에서 13득점, 17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국내 남자선수로는 사상 첫 트리플 더블을 작성했다.

    만수는 아니더라도 백수는 되겠다

    제대 후 프로시대를 맞아 코트에 복귀한 이상민은 1997~98시즌 현대를 정상에 올려놓았다. 조니 맥도웰, 조성원, 추승균 등과 탄탄한 팀워크를 떨친 그는 기아와의 챔피언 결정전에서 홈 1·2차전을 먼저 빼앗기고도 승부를 7차전까지 몰고 간 끝에 우승 반지를 끼었다. 1998~99시즌에도 정규시즌 최우수선수에 뽑힌 뒤 다시 현대의 2년 연속 우승을 주도했다. 이상민은 현대를 인수한 KCC 시절인 2004년 통산 세 번째 우승을 보태며 챔피언결정전 최우수선수에 뽑히는 영광을 안았다.

    태극마크를 단 이상민은 한국을 대표하는 간판 가드였다. 199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에서 열린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에서 그는 28년 만에 한국 농구를 정상으로 견인했다. 준결승에서 그는 15점을 터뜨리며 12년 만에 중국을 격파하는 데 앞장섰고, 일본과의 결승에서도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2002년 부산 아시아안게임은 그의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 무대였다. 한국은 필리핀과의 준결승에서 경기 막판 2점차로 뒤져 패색이 짙었다. 결승 진출은 물 건너간 줄 알았다. 마지막 공격에서 이상민은 한 차례 드리블에 이어 3점슛을 시도했다. 포물선을 그린 공은 종료 버저와 동시에 림에 박혔다. 69대 68. 한국의 짜릿한 1점차 역전승이었다. 이상민은 “공이 들어가는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결승에서 한국은 최강 중국과 맞붙었다. 이상민이 노련하게 경기를 조율한 끝에 한국은 연장전까지 치르는 접전에서 결국 살아남아 20년 만에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2007년 이상민은 농구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았다. 현대와 KCC를 거치는 동안 한길을 걸어온 그는 본인의 의사와 달리 팀을 떠나는 운명에 부딪히며 상처를 입었다. KCC가 자유계약선수로 풀린 서장훈과 임재현을 영입하면서 이상민을 보호선수에서 제외해 삼성으로 옮기게 된 것. 충격에 빠진 그는 한동안 외부와의 연락을 끊은 채 은퇴를 고민하기도 했다. 당시 경기 성남시 분당 집에서 만난 이상민의 초췌한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팬들의 따뜻한 격려로 다시 마음을 잡은 그는 삼성을 두 시즌 연속 챔피언 결정전으로 이끄는 활약으로 “역시 이상민”이라는 찬사를 들었다.

    이상민은 올스타전 인기투표에서 9년 연속 1위에 올랐다. 뜨거운 인기를 누리다가도 결혼 후에는 주위의 관심이 한풀 꺾이게 마련인데 그는 달랐다. 이렇다 할 스캔들 없이 깨끗한 이미지를 유지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해결사로 나서며 강렬한 인상을 남긴 덕분이었다. 회원 수 2만 명에 이르는 팬클럽은 절대적인 지지를 보냈다.

    이상민의 은퇴 발표 기자회견에는 100여 명의 팬이 몰려와 눈물을 쏟았다. 은퇴 무효를 외치는 팬들의 절규에 이상민은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그는 “지난해부터 허리가 너무 아팠다.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더 뛸 수 있겠느냐고’. 이젠 힘들다는 결정을 내렸다. 미련을 버렸다”고 고백했다.

    지도자의 길을 선택한 이상민은 영어 공부를 위해 한국인이 비교적 적은 캐나다나 미국 동부로 유학을 떠날 계획이다.

    “나만의 색깔을 내는 지도자가 되고 싶다. 만수(萬數·모비스 유재학 감독의 별명)는 아니더라도 백수(百數)는 돼야 하지 않을까.”

    “상민이 오빠, 안녕!”
    이상민이 꼽은 명장면 BEST 5

    1991년 홍대부고 동국대총장배 고교농구대회 우승

    1994년 연세대 농구대잔치 우승

    1997년 사우디아라비아 리야드 아시아남자농구선수권대회 우승

    1998년 프로농구 현대 우승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 금메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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