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간동아 로고

  • Magazine dongA
통합검색 전체메뉴열기

이영철 교수의 5분 한국사

“한국의 방두(房杜)는 없는고?”

당태종 ‘정관의 치’ 이끈 방현령·두여회 … 公望 갖춘 재상 등용한 ‘인재론’ 배워야

“한국의 방두(房杜)는 없는고?”

“한국의 방두(房杜)는 없는고?”

당태종 이세민은 정직하고 충성스런 인물을 등용해 그들의 직언을 따랐다. 14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명군으로 추앙받는 것도 그의 ‘인재론’에서 기인한 바 크다.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599∼649)의 치세(627∼649)를 ‘정관(貞觀)의 치(治)’라 일컬으며 후세까지 훌륭한 정치의 귀감으로 삼고 있다. 사서는 “길바닥에 떨어진 남의 물건을 줍지 않고, 행상으로 여행하는 사람들은 도둑이 없는 세상이라 아무 데서나 노숙을 하고 다녔다”라고 당시를 기록했다.

당태종은 즉위 첫날부터 사치와 허식을 배격하고 자신의 권위가 신하들에게 공연히 두려움을 일으킬 것을 우려해 언제나 따뜻하고 부드러운 얼굴로 대했으며, 아무리 어려운 문제와 당돌한 주장일지라도 거침없이 직언(直言)하는 신하를 사랑했다.

특히 당태종이 여러 대신과 국정을 논한 ‘정관정요(貞觀政要)’는 제왕학(帝王學)의 교본으로 당태종 사후 50여 년이 지나 오긍(吳兢·670∼749)이 편찬했는데, 중국뿐 아니라 동양 각국에서 시정(施政)의 텍스트로 택했다(필자가 당태종을 칼럼의 주제로 삼은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굳이 따지자면 ‘한국사’가 아닐 수 있지만 ‘정관정요’는 고려, 조선 국왕들의 제왕학 교재였고 그의 통치철학은 지금까지 한국인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구에 회자되는 “군주는 배요, 백성은 물이다. 물은 능히 배를 실어 띄울 수 있지만, 한편 배를 전복시킬 수도 있다(君舟也人水也水能載舟亦能覆舟)”라는 명구도 ‘정관정요’ 정체편(政體篇) 제7장에 나오는 글귀다.

우리나라에서도 일찍이 고려 광종이 ‘정관정요’를 중시해 문한(文翰)기구를 정비했고 고려 성종 때 최승로(崔承老)가 ‘정관정요’를 참조해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을 올린 바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까지 국왕의 경연(經筵·임금 앞에서 경서를 강론하는 자리) 참고서로 채택해 역대 국왕의 정치교훈서로 필독했다.



고려·조선 국왕의 정치교훈서 ‘정관정요’

이러한 정관의 치세가 가능했던 이유로 무엇보다도 먼저 당태종이 제왕으로 출중하고 정직하고 충성된 인물들을 등용했다는 사실을 들 수 있다. 어떠한 계획을 세우더라도 남이 미처 생각도 못할 만큼 총명하고 치밀했던 방현령(房玄齡·579∼648)과 무슨 일에나 결단력이 뛰어난 두여회(杜如晦·585∼630)가 좌우 복야(僕射·정2품)로 있었고, 천하에 강직하고 깨끗하기로 유명한 위징(魏徵·580∼643)이 승지(承旨)를 맡았으며, 청렴결백하기 이를 데 없는 왕규(王珪)가 시중(侍中)으로 모두 합심 협력해 당태종을 보필했다.

‘구당서(舊唐書)’ 66권 ‘방현령열전’을 보면 다음의 고사가 전해진다. 어느 날 당태종이 왕규에게 “그대는 방현령 이하 여러 대신과 비교할 때 스스로를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묻자 왕규는 서슴지 않고 당당하게 “나라에 봉사하고, 알면서도 입 밖으로 말하지 않는 점에서 소신은 방현령을 따르지 못합니다. 재능에서도 문무를 겸비한 이정(李靖)을 당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지금이 요순(堯舜)의 시대가 되지 못함을 자신의 부족이요, 수치로 여겨 나라와 백성을 위해서라면 주저함 없이 제왕에게 직간을 올리고 부정을 바로잡는 데 여념이 없는 위징을 따르지 못합니다”라고 지극히 겸손하게 대답했다. 또 정관 10년(636)에 당태종이 조정의 측근 대신들에게 “창업(創業)과 수성(守成) 가운데 어느 것이 더 쉽고 더 어려운가”라고 묻자, 방현령이 대답하기를 “천하가 어지러우면 군웅(群雄)이 다투어 일어납니다.

“한국의 방두(房杜)는 없는고?”

지난 8월20일 이명박 대통령(왼쪽)이 김준규 신임 검찰총장에게 임명장을 주고 있다. ‘창업’은 했으나 ‘수성’에 고심하는 이명박 정부로서는 당태종의 인재론을 거울삼을 만하다.

적을 공파(攻破)해서는 항복을 받고, 싸워 이겨서는 겨우 세상을 평정합니다. 이러한 연유로 말씀드리자면 초창(草創·창업) 쪽이 어렵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위징은 의견을 달리하며 “제왕(帝王)이 일어나면 반드시 전대의 쇠퇴하고 어지러웠던 일들을 이어받게 되니, 저 어둡고 교활한 자를 뒤엎으면 백성은 즐겨 천자를 추대해 사해가 천명(天命)으로 돌아옵니다. 이것은 하늘이 내려주고 백성으로부터 받는 것이므로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천하를 얻은 뒤에는 제왕의 지향하는 바가 교만해지고 방일해집니다. 백성이 안정을 되찾고자 하나 부역이 그치지 않습니다. 백성은 지칠 대로 지쳤건만 사치한 사업은 그치지 않습니다. 나라가 쇠퇴하는 것은 언제나 이런 일로 말미암아 일어납니다. 이로써 말씀드리면 수문(守文·수성) 쪽이 어렵습니다”라고 했다.

이에 두 사람의 소견을 들은 당태종은 결론을 내리기를 “두 사람의 말이 그 뜻은 다르나 모두 옳은 말이다. 왜냐하면 방현령은 짐과 같이 천하를 잡음으로써 백사(百死)에 일생(一生)을 얻은 사람이니 창업이 얼마나 지난(至難)한 것인지 익히 알고 있는 것이요, 반면 위징으로 말하면 천하를 평정하고 민생도 안정됐으나 방만하면 교만과 사치가 부귀에서 나오고, 환난과 재난이 나태에서 생긴다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러므로 위징은 수성의 어려움을 익히 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는 창업의 어려움은 이미 과거지사로 넘어갔고, 이제는 수성의 어려움만이 앞에 놓여 있다는 것을 제공(諸公)들과 함께 명심하도록 하라”고 했다. 그 후 시류에 아부하지 않고, 자신을 돌보지 않으며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진실한 말로 황제에게 200여 차례 직간한 충간(忠諫)의 대표적 인물인 위징이 죽었을 때 당태종은 “나는 거울 하나를 잃었다”라고 탄식했다고 한다.

創業했지만 守成 고심하는 MB 정부

이명박 정부가 집권 1년 반이 지난 시점에서 내각과 청와대 개편을 둘러싸고 자질, 지역 안배, 재산, 도덕성 문제 등으로 몇 달째 마땅한 인물을 찾지 못해 심한 몸살을 앓았다. 자고로 ‘업(業)을 창(創)하여 이를 잃어버린 예는 매우 드물며, 성업(成業)을 보수하되 이를 잃어버린 예는 매우 허다하다’라고 했는데 현 정부도 창업은 했으나 수성에 고심하고 있다.

이런 가운데 지난 8월30일 치러진 일본 중의원선거에서 제1야당인 민주당이 반세기에 걸쳐 일본 열도를 장기 집권한 자민당을 제압하고 선거혁명을 통해 압승, 정권을 교체했다. 자민당의 몰락과 민주당의 부상(浮上)을 보면서 창업과 수성의 고사를 다시 한 번 떠올린다.

같은 날 충청권 기반의 자유선진당 대표가 총리직 기용설의 후유증으로 탈당함으로써 지난해 2월에 창당한 자유선진당은 국회 원내교섭단체 자격을 상실, 잘 보존해 지킨다는 수성의 지난함을 실감케 했다. 총리의 역할이 얼마나 중차대한지를 조선 개국의 1등공신 정도전(鄭道傳·1342∼1398)이 쓴 ‘삼봉집’에서 찾고자 한다.

“통치자는 백성을 위해 존재하며, 통치자가 민심을 잃었을 때에는 교체할 수 있다. 통치자는 언제나 백성을 위한 민본정치를 실시하려고 노력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훌륭한 재상을 선택해 재상에게 정치의 실권을 부여함으로써 위로는 임금을 받들어 올바르게 인도하고, 아래로는 백관을 통괄하고 만인을 다스리는 중책을 담당하게 해야 한다.”

어진 자가 벼슬을 하고 능력 있는 자가 제자리에 있다면 국운(國運)은 반드시 펼쳐질 텐데, 왜 우리에게는 공재(公才·재상의 재주)와 공망(公望·재상의 덕망)을 갖춘 성당(盛唐)의 ‘방두(房杜·방현령과 두여회)’ 같은 인물이 없을까. 초야에 묻힌 인재라도 찾아내 어진 사람이 불우한 처지에 있게 해서는 안 되겠다.



주간동아 2009.09.15 703호 (p74~75)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 hanguksaok@hanmail.net
다른호 더보기 목록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