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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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오풍정과 유두잔치 즐겨보세

자기 연마하는 오월(吾月), 자신 발전시키는 유월(愈月) … 선인들의 ‘절차탁마’

  • 이영철 목원대 겸임교수·역사학 hanguksaok@hanmail.net

    입력2009-05-29 11: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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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단오풍정과 유두잔치 즐겨보세

    신윤복의 풍속화 ‘단오풍정’.

    음력 5월5일 단오(端午)는 설날, 한가위와 함께 3대 명절의 하나로 수릿날, 천중절, 단양이라고도 한다.

    단오의 ‘단(端)’자는 첫 번째를, ‘오(午)’자는 다섯을 뜻하므로 단오는 ‘초닷새(初五日)’라는 말이 된다. 그리고 ‘수리’란 우리말의 수레(車)인데 높다(高), 위(上), 신(神)이라는 뜻이 있어 단오는 ‘높은 날’ ‘신을 모시는 날’ 등의 뜻도 지녔다.

    단오의 기원은 ‘삼국지’ 위서 동이전 한조(韓條)에 “해마다 5월이면 씨뿌리기를 마치고 귀신에게 제사를 지낸다(五月田竟祭鬼神)”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봐서 초기국가(primitive-state) 시기로 소급되며, 단오는 1년 중 양기(陽氣)가 가장 왕성한 날이라 나라에서 큰 명절로 여겨 여러 행사가 행해졌다. 더구나 단오는 여름을 맞이하기 전 초하(初夏) 때로, 모내기를 끝내고 풍년을 기원하는 기풍제의 성격도 있다.

    단옷날 민간에서는 음식을 장만해 창포가 무성한 물가에 가서 물맞이 놀이를 하며, 창포에 맺힌 이슬을 받아 화장수로 사용하고, 창포를 삶아 창포탕을 만들어 그 물로 머리를 감기도 했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윤기가 나고, 빠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리고 몸에 이롭다 하여 창포 삶은 물을 마시기도 했다.

    단옷날에서도 오시(午時·오전 11시∼오후 1시)가 가장 양기가 왕성한 시각이라 이때를 기해 농가에서는 익모초와 쑥을 뜯었다. 익모초즙은 식욕을 돋우고 몸을 보호하는 효과가 있어서였고, 쑥은 벽사(邪)의 기능이 있어서였다고 한다. 이뿐 아니라 조선시대 사대부가에서는 총명하고 건강한 아들을 단옷날에 낳으려고 합궁 날짜를 계산해 잡았다고 한다.



    단오 민속놀이로는 그네뛰기, 씨름, 격구, 석전(척석희) 등이 있다. 외출이 여의치 못한 부녀자들도 이날만은 밖에서 그네 뛰는 것이 허용됐다. 조선 후기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항간에서는 남녀들이 그네뛰기를 많이 한다”라고 하여 그네가 여성만의 놀이가 아니었음을 말해준다.

    “세상에 좋기로 격구를 따를 것이 없다”

    격구는 말을 타고 공을 치는 경기인데, 고려의 대문장가 이규보(李奎報·1168~1241)가 “세상에 좋기로 격구를 따를 것이 없다”라고 극찬한 것으로 보아 대단히 통쾌한 경기였던 듯하다. 이른 아침부터 화려한 명절 옷차림을 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룬 격구장은 각양각색의 깃발로 장식되고 악대도 준비됐다.

    격구는 좌우 양편 선수들이 나와 줄지어 서고 한 사람이 공을 높이 쳐올리면, 좌우 선수들이 말을 타고 달려나와 먼저 공을 빼앗아 경기를 시작했다. 격구는 조선시대에 와서도 군대 열병식에서 거행됐고 무과 과목에 포함돼 계속 발전했다. 격구는 여자들도 즐겼는데, 조선 후기 고전소설의 백미인 ‘옥루몽’에 나오는 격구는 주인공이 여성들이었다.

    석전은 좌우로 패를 갈라 돌을 던지는 돌팔매놀이인데, 상무(尙武)정신을 고양하고 담력을 기르는 데 일조했다고 한다. 고려시대 이래 척석군(擲石軍)이라는 돌팔매부대를 조직해 운영했는데, 조선 중종 5년(1510) 삼포왜란 당시 삼포에 침입한 왜구를 안동 김해 등지의 척석군이 격퇴했고, 임진왜란 당시 행주대첩에서도 부녀자들이 행주치마로 돌을 날라 조선 군사들이 왜군을 섬멸했다.

    조선 후기 신윤복(申潤福·1758~?)은 당대 김홍도(金弘道·1745~?)와는 달리 남녀간의 낭만과 애정을 화폭에 담아 봉건적 인습에서의 탈피를 시도했다. 그는 남녀간의 정취와 낭만적 분위기를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섬세하고 유려한 필선과 아름다운 채색을 사용, 조선 에로티시즘의 정화를 이뤘다. 그런 그가 그린 ‘단오풍정(端午風情)’은 단옷날 우리 조상들의 멋과 가락과 사랑을 세련된 필치로 담아냈다.

    단오가 지나고 오는 음력 6월 보름은 유두(流頭)인데, 더운 복중(伏中)에 들어 있는 명절이다. 유두란 흐르는 물에 머리를 감는다는 ‘동류수두목욕(東流水頭沐浴)’의 준말로 소두(梳頭) 또는 수두(水頭)라고도 표기했다. 수두는 ‘물마리’(마리는 머리의 옛말)로서 ‘물맞이’라는 뜻이다. 항간에서는 음력 6월을 ‘썩은 달’이라 했는데, 비도 자주 내리고 더위가 심해 음식이 금방 변해 썩었기 때문이다. 농사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농민들이 더위 중에 모처럼 몸을 씻고 머리를 감을 수 있는 날이 유둣날이었다. 평상시에 여성들이 밖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는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으나 이날만큼은 얼마든지 가능했다. 이렇게 머리를 감고 몸을 씻은 뒤 가지고 간 음식을 먹으면서 서늘하게 하루를 보내면 여름철에 질병을 물리치고 더위를 먹지 않는다고 해서 유두잔치가 이어져왔다.

    이 풍속은 신라 때부터 유래했는데 고려 명종 때 양심적인 지식인이자 명문장가인 김극기(金克己)의 ‘김거사집’에 “동도(東都·경주)의 풍속에 6월15일 동류수(東流水)에 머리를 감아 액을 떨어버리고, 술 마시고 놀면서 유두잔치를 한다”라고 기록됐다. ‘고려사’ 명종 세가 15년(1185)조에도 “6월 병인(丙寅)에 시어사(侍御史) 두 사람이 환관 최동수(崔東秀)와 광진사(廣眞寺)에 모여 유두음(流頭飮)을 마련했다. 훗날 이달 15일 동류수에 머리를 감아 불상(不祥)을 없애면서 이 회음(會飮)을 유두음이라 했다”고 나와 있다. 동류수에 머리를 감는 이유는 동쪽이 청(靑)이며, 양기가 가장 왕성한 곳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유둣날엔 農神에게 풍년 기원 고사 지내

    유둣날 무렵에는 새로운 과일과 채소가 나기 시작하므로 수박, 참외, 오이 등을 따고 유두면, 밀전병, 수단, 건단 등을 만들어 사당에서 고사를 지냈는데 이를 ‘유두천신(流頭薦新)’이라 했다. 조상을 숭배하는 사상이 강하던 옛날에는 햇과일이 나면 조상에게 먼저 올린 뒤 먹었다. 특히 밀가루로 만드는 유두면은 참밀의 누룩으로 만들 경우 유두국이라고도 했는데, 구슬 모양으로 만들어 오색물감으로 물들인 뒤 3개씩 포개 색실에 꿰어 몸에 차거나 문짝에 매달면 액을 막는다고 했다. 또한 농촌에서는 밀가루로 떡을 만들고 참외나 기다란 생선 등으로 음식을 장만해 논의 물꼬와 밭 가운데에 차려놓고, 농신(農神)에게 풍년을 기원하면서 고사를 지냈다.

    조선 후기 정약용(丁若鏞·1762~1836)의 둘째 아들인 정학유(丁學游·1786~1855)는 ‘농가월령가’에서 유두의 풍속을 이렇게 노래했다.

    삼복은 속절이요 유두는 가일이라
    원두밭에 참외 따고 밀 갈아 국수하여
    가묘에 천신하고 한때 음식 즐겨보세
    부녀는 헤피 마라 밀기울 한데 모아
    누룩을 디디어라 유두곡을 치느리라

    조선시대 사대부는 더위가 계속되는 중에도 5월을 자기를 연마하는 오월(吾月), 6월을 자기를 발전시키는 유월(愈月)이라 하여 절차탁마했다고 하니 선인들의 가르침에 숙연해질 뿐이다. 이번 단옷날에는 외우(畏友)에게 단오선(端午扇·단오부채)을 선물하는 여유를 가져보고, 유둣날에는 존경하는 벗님네와 연인과 더불어 시내나 계곡을 찾아 온몸과 마음의 때를 씻으며 유두연을 즐겨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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