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81

2009.04.14

미국적 분노, 미국적 가치 뛰어넘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그랜 토리노’

  • 오동진 영화평론가 ohdjin@hanmail.net

    입력2009-04-10 11:2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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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적 분노, 미국적 가치 뛰어넘기

    클린트 이스트우드 (오른쪽)는 이 영화에서 감독과 주연을 맡아 열연했다.

    얼굴을 맞대기도 전, 눈길이 부딪치기만 해도 “내 땅에서 나가라”며 으르렁대던 월트 코왈스키(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이제 막 이웃인 몽족(타이 지역의 소수민족) 출신 수(어니 허)의 집안과 친해지기 시작한 참이다. 손녀뻘인 수가 자신을 미스터 코왈스키 대신 자기 마음대로 ‘월리’라는 애칭으로 부르는 것에 대해서도 뭐라 하는 것을 포기한 상태다.

    수는 이 ‘월리’를 자신들이 전통의식 때마다 부르는 제사장에게 데려가 그의 80년 인생에 대해 점을 친다. 제사장은 그를 보면서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알아주지 않는 외로운 인생인 데다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평생의 짐으로 안고 살아왔다”며 측은해한다. 얼마 전부터 각혈이 잦아진 이 노인네는 화장실에서 토한 피를 닦아내며 이렇게 얘기한다.

    “원 젠장, 어떻게 처음 만난 점쟁이 따위가 평생 키운 아들놈들보다 나를 더 잘 아는 거야.”

    죽음을 코앞에 둔 말년 노인의 고집 센 인생, 그럼에도 그가 결국 선택하게 될 휴머니즘의 극치에 대해 집중하는 척,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감독과 주연을 맡아 열연한 신작 ‘그랜 토리노’는 미국의 현 정치사회적 이슈를 엄청난 가짓수로 담아냈으며 바로 이런 점에서 흥미로운 영화다.

    ‘그랜 토리노’를 보고 있으면 미국 중하층 계급의 스산한 삶과 그 의식의 저변이 느껴진다. 미국은 현재 한참 무너진 상태이며, 그것은 경제적 혹은 군사적 힘의 문제가 아니라 자존심의 문제라는 것을 보여준다. 영화 속 주인공 미스터 코왈스키가 늘 인상을 쓰며 마음속 유황불을 드러내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는 이제 미국인으로서 자신이 지키려 했던 미국적 가치는 모두 사라졌다고 생각한다.



    ‘그랜 토리노’는 영화 제목인 동시에 미국의 자동차 산업을 대표했던 포드사 제품으로, 이미 오래전 단종된 세단의 이름이기도 하다. 단종되기는 코왈스키 자신도 마찬가지다. 코왈스키가(家)는 폴란드계 선조가 미시간으로 이주해 이룬 집안이다. 이 지역이 한창 자동차 산업으로 붐업됐던 수십 년 동안 코왈스키는 평생을 바쳐 포드사에서 자동차를 만드는 노동자로 일하다 퇴직했다. 그는 여태껏 그 자부심으로 살아왔지만 이제 자랑거리가 그저 빛바랜 영광에 불과하게 됐다.

    포드의 자랑스러운 노동자였던 아버지와 달리 아들은 일본 자동차의 영업사원이다. 그는 그 일로 아버지보다 더 호의호식하며 살아간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마땅할 리가 없다.

    ‘그랜 토리노’는 이렇게 미국적인 분노를 담은 작품이어서 언뜻 다른 나라 관객들의 흥미를 끌기에는 한계가 있어 보인다. 코왈스키가 오랫동안 살아온 자신의 동네가 흑인과 히스패닉, 특히 아시아 이주민들에게 잠식당하며 슬럼으로 전락하는 것을 지켜보면서 마음 불편해한 것도 순수 백인들의 생각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에도 영화는 지금 미국인들의 (경제적으로) 상처받은 자존심을 사실적으로 드러냈다는 점, 백인 중하층과 새로운 아시아계 이주민 사이의 갈등과 화해를 따뜻한 시선으로 그려냈다는 점에서 ‘미국적’ 이야기의 한계를 뛰어넘는 데 성공했다 하겠다.

    고집 세고 골통 보수인 노친네 코왈스키는 어쩔 수 없이 몽족 이웃의 일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이웃 아이인 수와 타오는 몽족 갱단에게 괴롭힘을 당하고, 결국 수는 그들에게 집단 윤간을 당한다) 자신이 조금씩 변화하는 것을 감지한다. 결국 그가 ‘위대한’ 결단을 내리는데 그것은 인종적 차원의 선택도 아니고 계급적 문제도 아니며, 민족성이나 나이 차이 따위에서 비롯된 결정도 아니다. 그건 바로 순수 인본주의의 발로, 곧 사람과 사람은 그 모든 것을 뛰어넘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공동체의 정신을 지녀야 한다는, 그것이야말로 자신들이 애써 지키려 했던 ‘미국적 가치’임을 보여주려는 의지에서 나온 것이다. 미국적 가치란 미국을 뛰어넘는 역설의 가치를 말한다. 코왈스키가 입증하려 했던 것도 바로 이것이다.

    거장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세상을 바라보는 혜안과 지혜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다. 그저 그의 날카로운 식견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하고 싶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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