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1078

2017.03.08

사회

“스트레스 받는데 일단 질러”

SNS 화제 ‘시발비용’…소소한 금액이지만 누적되면 역(逆)스트레스도

  • 김유림 기자 mupmup@donga.com

    입력2017-03-03 16: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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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상에서 폭발적인 공감을 일으키며 유행하는 단어가 있다. 바로 ‘시발비용’이다. 비속어 ‘X발’과 ‘비용’을 합친 신조어로, 합리성을 따지지 않고 스트레스 해소용으로 자신만의 소소한 사치를 부리는 행위를 뜻한다. SNS에서는 ‘스트레스를 받지 않았으면 쓰지 않았을 비용’으로 통한다. 한 트위터리안이 트위터에 이 말을 쓴 뒤 2만2000건 넘는 리트위트를 기록하며 널리 알려졌다는 게 정설이다.

    실제로 최근 한 온라인 취업 사이트에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성인남녀 10명 중 8명이 ‘스트레스로 홧김에 돈을 낭비한 경험이 있다’고 응답하면서 ‘안 사도 되는 제품을 굳이 구매했던 것’(25%)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꼽았다. 이어 ‘온라인에서 충동구매하기’(24%), ‘스트레스 받고 홧김에 치킨 시키기’(19%) 등의 답변이 이어졌다.



    “이것도 못 사면 우울해서 안 돼”

    물론 한번에 큰돈이 드는 건 아니다. 야근 후 버스가 아닌 택시로 퇴근하기, SPA(제조·유통 일괄) 브랜드에서 ‘색깔별’로 양말 지르기, 유행하는 색깔의 립스틱·매니큐어 쟁여두기 등 대부분 1만~2만 원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들이다. 하지만 이게 누적되면 주머니가 가벼운 직장인에겐 제법 큰 액수가 된다.

    30대 중반인 직장인 A씨는 업무가 바빠 늦게 퇴근한 날에는 전투적으로 모바일 쇼핑에 매진한다. 몸은 천근만근이지만 왠지 이대로 잠들기는 억울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최근에 ‘지른’ 물건은 TV홈쇼핑에서 불티나게 팔린 네일 스티커. 평소 ‘위시리스트’에 있던 품목은 아니지만 ‘50% 할인’ 문구에 즉흥적으로 ‘주문하기’를 눌렀다. A씨는 “거의 매일 하나씩 물건을 사다 보니 어느 순간 신용카드 번호를 주민등록번호처럼 외우게 됐다. 성격상 네일 스티커를 사도 잘 꾸미지 않는데 TV홈쇼핑에서 형형색색의 화려한 손톱을 보니 기분이 확 좋아졌다. 이렇게 사서 쓰지 않고 쌓아두는 물건이 한두 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서울 광화문 소재 직장에 다니는 B씨는 머릿속이 복잡할 때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한 대형서점을 찾는다. 누군가와 얼굴 마주 보며 밥을 먹느니 혼자 조용히 독서, 아니 ‘쇼핑’을 하기 위해서다. 서점에 들어서면 책 판매대가 아닌, 문구 코너로 향한다. 그는 “새로 나온 볼펜, 수첩 등을 구경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 모른다. 먼저 사고 싶은 물건을 쇼핑 바구니에 담은 뒤 1만 원 한도에서 살 수 있는 것을 추린다. 예쁘고 산뜻한 볼펜을 손에 쥐면 일하기 싫은 마음이 조금은 사라지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B씨는 “볼펜 모으는 게 취미일 뿐 허투루 돈을 쓴다고 생각지는 않는다. 힘들게 직장생활을 하면서 볼펜 한 자루도 내 마음대로 못 산다면 너무 서럽지 않나”라고 반문했다.

    양초 모으기가 취미인 C씨도 얼마 전 친구와 한 명품 편집숍에 들렀다 ‘한정판’으로 나온 영국산 양초 세트를 덜컥 구매했다. “가격이 과하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저 아이(?)를 데려오면 우울한 기분이 한결 나아질 것 같았다”는 게 C씨의 얘기다.

    이처럼 시발비용은 지친 일상에 소소한 위로를 안겨준다는 점에서 일종의 ‘힐링비용’으로 여겨진다. 20대 후반인 직장인 D씨는 스트레스가 머리끝까지 뻗칠 때면 점심시간을 이용해 미용실에 들른다. 파마나 커트가 아닌 단지 ‘머리를 감기’ 위해서다. D씨는 “머리를 감는 데 돈 쓴다는 걸 이해 못 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1만 원짜리 한 장으로 이런 호사를 누릴 자격은 있다고 생각한다. 두피 마사지까진 못 하지만…”이라고 말했다.



    乙의 설움·자포자기 심리 대변

    전문가들은 이 같은 현대인의 작은 사치를 ‘을(乙)의 설움 표출’이라 풀이한다. 하재근 문화평론가는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대표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쇼핑이다. 갑(甲)은 을에게 화풀이할 수 있다지만 을은 이게 불가능하다 보니 쇼핑으로 일시적이나마 울화를 잠재우려 한다. 시발비용이란 신조어의 탄생은 그만큼 우리 사회가 많은 스트레스를 안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평했다.

    이러한 소비 형태는 ‘삼포세대’의 현실과 맞닿아 있다. 경기불황과 취업난은 물론,  설령 직장을 구했다 해도 불안정한 취업 구조와 박봉으로 장밋빛 미래를 꿈꾸기조차 힘든 게 현실이다. 그렇기에 이들 중 상당수는 ‘어차피 큰돈 모으지도 못할 거 스트레스라도 풀며 살자’는 생각으로 오늘도 ‘찔끔찔끔’ 시발비용을 쓴다.

    이들의 가장 큰 ‘넘사벽’은 바로 내 집 마련. 직장인 E씨는 “지금 내 월급으로는 죽었다 깨어나도 서울에 아파트를 살 수 없을 것 같다. 내 집은커녕 결혼도 할 수 있을지 모르는 마당에 푼돈 쓰는 재미마저 없으면 인생이 너무 우울할 것 같다”고 푸념했다.

    실제로 통계청에 따르면 일반 직장인이  한 푼도 쓰지 않고 월급을 모을 경우 서울에 평균 수준의 아파트 한 채를 마련하는 데 12년이 걸린다고 한다. 이는 2016년 삼사분기 39세 이하 가구주의 월평균 가처분소득 371만 원을 기준으로 단순 계산한 것이다.

    주머니 사정이 팍팍한 젊은 직장인에게 시발비용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좋은 물건을 사면서 높은 만족감을 얻는다는 점에서는 합리적 소비라 볼 수도 있다. 하지만 적정 수준을 벗어날 경우 경제적 타격이 동반되는 만큼 어디까지를 스트레스 해소 비용으로 책정할지를 잘 판단해야 한다. 내년 결혼을 계획하고 있는 직장인 F씨는 얼마 전 직장생활 10년 만에 처음으로 가계부를 쓰기 시작했다. F씨는 “인터넷 쇼핑이 유일한 취미인데 나중에 보면 ‘이건 왜 샀나’ 싶은 물건이 하나 둘이 아니다. 평소에는 ‘헛돈 쓴다’는 생각을 못 했는데 얼마 전 연말정산을 하면서 지난 1년간 쓴 카드결제 금액을 확인하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월급 대부분을 써버릴 거면 회사는 왜 다녔나 싶더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쇼핑으로 스트레스를 풀려다 자칫 더 곤란해질 수 있다”고 경고한다. 강병훈 서울연마음클리닉 원장은 “소액을 카드로 자주 긁다 보면 전체 규모가 얼마인지 가늠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아 나중에 카드결제 청구서가 날아오면 더 큰 스트레스를 받을 수 있다. 대략적이나마 한도나 횟수를 정해놓는 것도 시발비용 압박을 줄이는 방법”이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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