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615

2007.12.18

진실과 농담은 시대 따라 변한다?

  • 이명재 자유기고가

    입력2007-12-12 15:4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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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실과 농담은 시대 따라 변한다?
    지하철역의 어느 전광 광고판에서 대단한 농담을 전하고 있었다.

    “부자 되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

    그 방법으로 내놓은 것은 수돗물 잠그기, 전기 아껴 쓰기 등이었다. 이건 비현실적인 정도가 아니라 반(反)현실적이다. 이 시대 많은 부자들의 자산 축적 과정을 생각해보면 그 반현실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그런 점에서 그 ‘부자 되는 법’ 안내는 지독한 농담으로 들린다.

    진지한 호소가 농담으로 받아들여지는 위의 경우와 반대로, 농담으로 의도했던 것이 진담으로 받아들여질 때는 어떤 일이 벌어질까.

    밀란 쿤데라의 소설을 영화로 옮긴 ‘농담’은 농담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회 속 평범한 개인의 재난을 그리고 있다.



    스무 살의 대학생 루드빅은 한 살 아래인 마르케타를 좋아한다. 그런데 농담을 즐기는 루드빅과 달리 마르케타는 매사에 진지하기만 하다. 그런 마르케타를 답답해하던 루드빅은 당의 교육연수에 참여한 그녀에게 농담조의 엽서를 보낸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분위기는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그러나 엽서의 내용이 빌미가 돼 루드빅은 당에서 제명되고 학업도 계속할 수 없게 된다. 몇 마디의 농담이 인생을 송두리째 앗아가버린 것이다.

    루드빅의 말이 농담임을 당에서는 몰랐을까? 아마 당도 루드빅의 얘기가 농담에 지나지 않음을 알았을 것이다. 다만 두려웠던 것은 그 농담이 진실을 담고 있으며, 그렇게 드러난 진실이 너무도 취약한 기반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농담’에서와 같이 숨막히는 분위기는 옛 동독 시절을 그린 영화 ‘타인의 삶’에서도 비슷하게 그려진다. 부하의 농담을 듣고 있던 비밀경찰 간부가 정색하며 그 말을 물고 늘어진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돌변하고 부하의 얼굴은 사색이 된다.

    ‘농담의 자유’란 사실 이렇듯 간단치만은 않은 것이다. 농담의 자유가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곧 그 사회의 자유와 여유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도 ‘농담의 자유’를 빼앗긴 시절이 있었다. 유신시대 같으면 술집에서 농담 한마디 할 때도 주위에 누가 없는지 살펴야 했다. 이제 우리 사회에서 ‘농담의 자유’는 확보돼 있다. 오히려 그 과잉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위의 지하철 광고처럼 공허한 농담을 남발하는 지금의 대선판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든다.



    영화의 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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