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488

2005.06.07

자존심 지키기 게릴라식 저항

  • 장석만/ 옥랑문화연구소장

    입력2005-06-02 16: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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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존심 지키기 게릴라식 저항
    잠시라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캘빈이 정물(靜物)처럼 앉아 있다. 캘빈의 이런 모습은 좀처럼 보기 힘들다. 아마 아빠가 무지막지한 압력을 가했거나 엄청난 보상을 약속하여 캘빈은 피치 못해 부동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일 테다.

    하지만 이는 그의 ‘본성’에 어긋나는 일이다. 그런 탓에 캘빈은 잔뜩 골이 나 있다. 압력을 가한 아빠든지, 아니면 달콤한 보상의 약속에 진 자신이든지 누구에게든 지금 캘빈은 화를 내고 싶다. 하지만 그냥 화만 내는 것은 너무 나약하다. 일단 ‘채찍과 당근’으로 자신을 이런 ‘꼴’로 만든 아빠에게 뭔가 효과적인 대응을 해야 한다. 어쨌든 몸은 가만히 있기로 했으니 움직이지 못하더라도, 인상 쓰는 것이야 따로 언급하지 않았으니 아빠도 할 말은 없을 것이다. 이게 캘빈이 인상 쓰고 있는 까닭이다. 움직이지 못하는 몸 대신 얼굴을 끊임없이 찌푸려서 캘빈은 잠시 잃어버렸던 자존심을 되찾으려 한다.

    아빠는 애당초 왜 캘빈의 사진을 찍으려고 했을까? 왜 그런 ‘험한’ 일을 자초했을까? 아빠는 이웃의 얌전하고 귀여운 아이들을 보고 자극을 받았을지도 모르고,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캘빈을 보고 지금의 모습을 담아두려고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빠는 그것이 지나친 욕심이었음을 금방 알게 된다. 아빠의 실수는 캘빈이 다른 아이들처럼 정형화된 틀에 담길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사진 찍는 것이 ‘순간의 연출’이기 때문에 아빠는 아마도 거기에 마음을 놓은 것 같다. 하지만 캘빈이 누구인가? 혼돈(混沌)의 표상이 아니던가. 캘빈의 게릴라식 저항은 도처에서 전개된다.

    캘빈을 찍기 위해 아빠는 20여분 동안 실랑이를 한다. 캘빈이 얼굴 펴는 순간을 기다려서 사진을 찍는 방법도 시도해보았지만, 필름만 낭비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얼굴 찡그리는 것이 캘빈의 명성을 진흙탕에 빠뜨리는 것이라고 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수법도 써본다. 하지만 효과가 있을 리 없다. 아빠 말대로 하면, 오히려 그동안 캘빈이 쌓아놓았던 명성은 땅에 떨어진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지금 아빠와 옥신각신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가 아닌가.

    이제 아빠는 마지막으로 인내심을 발휘하여 캘빈에게 더는 인상 쓰지 말고 2초 동안만 예쁘게 웃으라는 주문을 한다. 이때를 기다려, 캘빈은 준비해놓은 제2 단계의 저항을 한다. 그건 바로 아빠의 소원대로 웃음을 선사하되, 결코 자기의 자존심을 손상하지 않는 방식이다. 결국 캘빈이 아빠에게 보여주는 것은 ‘캘빈식’ 웃음이다.



    사진 찍기 위해 가만히 있으라는 아빠의 강력한 요구에 캘빈이 우선 보인 반응은, 몸을 움직이지 않되 인상을 쓰는 제1 단계의 저항이었다. 그런데 아빠가 인상 쓰는 것을 통제하기 위해 예쁘게 웃을 것을 요구하자 캘빈은 웃는 표정을 짓되 ‘독자적인’ 웃음을 보여주는 제2 단계의 저항을 한다. 겉으로는 아빠 말을 모두 고분고분 받아들이면서도, 실상 캘빈이 아빠의 기대대로 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 셈이다.

    캘빈은 일단 아빠가 제시한 틀을 수용하면서, 그 틀 안에 머문다. 그러면서도 그 틀을 비틀어버린다. 움직이지 말라면 움직이지 않고, 웃으라면 웃는다. 그렇지만 아빠가 캘빈에게 바라는 것은 전혀 이루어진 게 없다. 아빠는 대나무처럼 유연하게 버티는 캘빈의 저항력에 또 한번 좌절감을 느끼게 되었을 뿐이다. 아빠가 실망감에 몸부림치는 모습은 정말 보기가 안쓰럽다. 아빠는 고개를 들고, 이를 악물면서 오른손으로 눈을 가리고 있다. 눈앞의 풍경을 차마 볼 수 없다는 몸짓이다. 왼손은 뭔가를 붙잡으려고 애쓰지만 허공만을 헤맬 뿐이다. 아마도 아빠는 캘빈을 붙잡아 혼내고 싶은 생각도 들 것이다. 하지만 명분이 없다. 가만히 있으라면 가만히 있고, 웃으라면 웃는데 무슨 명목으로 야단을 칠 것인가? 캘빈의 게릴라식 저항에 아빠의 좌절감은 오늘도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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