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수백억원대의 재산가가 지성과 미모를 겸비한 신부를 찾는다며 공개구혼해 화젭니다. 한발 늦으셨네요.”
KBS ‘개그콘서트’의 ‘언저리뉴스’에서 앵커로, ‘봉숭아학당’에서 섹시한 아줌마로 나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개그우먼 김지선(31)씨를 만났다. 5월9일 사업가 김현민씨와 결혼식을 올린 그는 연예인으로서나, 한 개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개그콘서트’를 통해 여러 차례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청첩장을 돌렸던 그는 “결혼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라면서 ‘언저리뉴스’ 앵커의 목소리로 자신을 ‘놓친’ 수백억원대 재산가의 이야기를 ‘생방송’한다.
고교 때 성대모사로 학교 스타 … 원하던 대학 낙방한 게 인생의 전기
커피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개그콘서트’에서 제 결혼식을 자주 소재로 삼은 건, 처음엔 거의 제 애드리브였지만 PD의 요구도 있었어요. 실제상황과 지어낸 이야기가 섞이니까 재미있다고. 그런데 네티즌들이 닭살 돋는대요. 그만 해야죠. 덕분에 주례를 맡으신 이순재 선생님의 스케줄이 일찌감치 정해지긴 했어요.”
-결혼식에 2000명이 넘는 하객들이 온 걸 보니, 확실히 톱스타인 것 같습니다.
“제가 1990년에 데뷔했으니 그동안 뿌려놓은 게 얼마나 많겠어요. 개콘(마니아들이 부르는 ‘개그콘서트’ 애칭)에서 서열로 보면 박미선 선배 다음이 저예요. 중견이죠.”
김지선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고 염광여고 시절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개그우먼이었다. 과학을 좋아해 입시 때 미생물학과를 지원했다 떨어져 낙심한 그에게 ‘전화위복’이라며 서울예대 방송연예과를 추천한 것이 선생님들과 부모님이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KBS 코미디언 탤런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1인 8역을 소화하는 걸 보면 성대모사 능력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4당 총재 성대모사를 했어요. 그때 애국조회란 걸 했는데 교장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단상에 올라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네 분을 흉내내서 전교생을 웃기기도 했고 ‘비바 청춘’이란 하이틴 프로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제 경우 성대모사는 노력을 통한 것이라기보다 인물의 특성을 관찰하고 잡아내는 능력에 의한 것이에요.”
-이경래씨와 함께 한 ‘남남북녀’ 코너에서 북한 사투리를 선보여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쇼 행운열차’에서 ‘연변늬우스’를 진행하고 있으니, 북한 사투리와 인연이 깊네요.
“시청자들 중에 ‘김지선은 북한 사투리로 10년을 우려먹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얼마 전까지 귀순배우 김혜영씨와 ‘꽃봉오리 예술단’ 코너를 하기도 했으니 그럴 만하죠. 그런데 북한과 관련 있다는 게 편하지 않은 분들이 있나봐요. 그저 시대적인 흐름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제가 코미디언 생활을 하는 동안 귀순, 탈북자들이 많이 생겼고, 남북교류가 많아져 교예단, 예술단도 오니까 거기서 힌트를 많이 얻게 된 거죠.”
-데뷔도 화려했고, 올해 다시 백상예술상을 받았으니 상복도 많은 편인데 슬럼프는 없었나요?
“91년 말 SBS로 옮겨 매주 마돈나나 마이클 잭슨을 흉내내 노래하는 ‘서태순과 아이들’이란 코너를 했는데, 이 코너가 인기를 얻자 음반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어요. 주변의 말이나 칭찬에 그렇게 혹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스물한 살 나이에 사랑이나 이별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어요. 노래를 부르면서도 감정 처리가 벅차다는 걸 스스로 알았고, 당연히 실패했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었는데 제가 먼저 매니저에게 그만두자고 했어요. 그렇게 되고 나니 한동안 가수도 개그우먼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어요. 코미디로 복귀했지만 단역만 주어지더라고요. 그러다 전국 대학을 찾아다니며 진행하는 KBS ‘열려라 강의실’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다시 힘을 얻었죠. 많은 것을 배운 셈이에요.”
-올 초 ‘개그콘서트’ 인기 출연자들이 집단으로 경쟁사로 옮길 때 프로그램 폐지설이 나오기도 했는데 내부에선 어땠습니까?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밖에서 걱정하는 것만큼은 아닐 거라고 내심 자신했어요. 박준형씨 같은 후배들이 라이브 공연에서 쌓은 내공이 보통이 아니니까요. 나간 사람들 자리가 빨리 채워졌고 묻혀 있던 후배들이 기회를 얻었죠. 저도 장용씨와 김준호씨가 하던 코너에 김준호씨 대신 들어가며 ‘언저리 뉴스’를 하게 됐고요. 어쨌든 여기서 나간 후배들도 잘 돼야죠.”
‘언저리뉴스’는 스테레오타입화한 뉴스의 전달방식을 비틂으로써 웃음을 끌어낸다. 그것은 매일 쏟아지는 어둡고 무서운 뉴스들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희망이기도 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조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언저리 뉴스’의 소재는 어디서 얻습니까?
“작가와 장용씨, 저 세 사람이 만들어요. 1차적으로 작가가 뉴스 아이템을 정리하는데, 전 라디오뉴스에서 기자나 앵커가 심각하게 말하는 걸 듣다가 ‘아무것도 아닌’ 극적인 반전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언저리뉴스’와 ‘연변늬우스’를 맡자 한 아나운서가 보통 아나운서는 하나도 해보기 어려운 뉴스를 두 개나 맡았다고 하더군요.”
-‘봉숭아학당’에서 샘 브라운의 ‘Stop’과 함께 등장하는 섹시한 여성 캐릭터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시청자 모니터에서 간혹 ‘선정적’이라고 지적을 받는데….
“전부터 선배들이 개그우먼들이 더 이상 못생기고 뚱뚱한 캐릭터로 웃기려고 하지 말고, 정말 여성스런 역으로 웃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에어로빅하는 파마머리 아줌마를 하다 개편 때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가장 섹시하게 변신해보기로 했고, 거기에 시사성 있는 영어를 넣어보기로 했죠. 미국 대통령이 부시인데, 전쟁 땜에 잠이 안 오면 부시럭부시럭, 화장실에 가면 부시쉬, 이런 식으로요.”
고정출연하는 프로그램이 3개에 각종 인터뷰와 행사, 막 시작한 신혼살림까지 눈코 뜰 새가 없을 것 같은데, 그는 “그래도 집에서 가끔 밥도 해 먹을 시간은 있으니 됐다”고 한다. 단지 지난해 말 정년퇴직한 친정아버지를 위해 차려드린 레스토랑에 자주 나가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낙천적인 성격이다. 음반을 내자마자 가수 되기를 포기한 일이나 잘나가던 방송을 접고 1년간 훌쩍 서울을 떠나 뉴욕에서 혼자 살다온 ‘이력’이 말해주듯, 욕심내지 않기, 천천히 가기가 그 웃음의 힘인 듯했다.
“일요일에 ‘개콘’ 안 보면 월요일에 ‘왕따’된대요. 이런 말이 저희에겐 최고의 칭찬이죠.”
종이를 내민 팬에게 시원스럽게 사인을 해주며 그가 한 말이다.
KBS ‘개그콘서트’의 ‘언저리뉴스’에서 앵커로, ‘봉숭아학당’에서 섹시한 아줌마로 나와 제2의 전성기를 맞고 있는 개그우먼 김지선(31)씨를 만났다. 5월9일 사업가 김현민씨와 결혼식을 올린 그는 연예인으로서나, 한 개인으로서 가장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 듯했다. ‘개그콘서트’를 통해 여러 차례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청첩장을 돌렸던 그는 “결혼이야기는 이것으로 끝”이라면서 ‘언저리뉴스’ 앵커의 목소리로 자신을 ‘놓친’ 수백억원대 재산가의 이야기를 ‘생방송’한다.
고교 때 성대모사로 학교 스타 … 원하던 대학 낙방한 게 인생의 전기
커피숍에 앉아 있던 사람들이 그를 돌아보지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개그콘서트’에서 제 결혼식을 자주 소재로 삼은 건, 처음엔 거의 제 애드리브였지만 PD의 요구도 있었어요. 실제상황과 지어낸 이야기가 섞이니까 재미있다고. 그런데 네티즌들이 닭살 돋는대요. 그만 해야죠. 덕분에 주례를 맡으신 이순재 선생님의 스케줄이 일찌감치 정해지긴 했어요.”
-결혼식에 2000명이 넘는 하객들이 온 걸 보니, 확실히 톱스타인 것 같습니다.
“제가 1990년에 데뷔했으니 그동안 뿌려놓은 게 얼마나 많겠어요. 개콘(마니아들이 부르는 ‘개그콘서트’ 애칭)에서 서열로 보면 박미선 선배 다음이 저예요. 중견이죠.”
김지선은 전북 고창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4학년 때 서울로 올라왔고 염광여고 시절 이미 자타가 공인하는 개그우먼이었다. 과학을 좋아해 입시 때 미생물학과를 지원했다 떨어져 낙심한 그에게 ‘전화위복’이라며 서울예대 방송연예과를 추천한 것이 선생님들과 부모님이었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KBS 코미디언 탤런트 콘테스트에서 대상을 받으며 데뷔했고, 그해 백상예술대상 신인상을 받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1인 8역을 소화하는 걸 보면 성대모사 능력은 타고난 것 같습니다.
“고등학교 때 4당 총재 성대모사를 했어요. 그때 애국조회란 걸 했는데 교장선생님의 부름을 받고 단상에 올라가 김대중, 김영삼, 김종필, 노태우 네 분을 흉내내서 전교생을 웃기기도 했고 ‘비바 청춘’이란 하이틴 프로에 출연하기도 했어요. 제 경우 성대모사는 노력을 통한 것이라기보다 인물의 특성을 관찰하고 잡아내는 능력에 의한 것이에요.”
-이경래씨와 함께 한 ‘남남북녀’ 코너에서 북한 사투리를 선보여 데뷔하자마자 인기를 끌었고 지금도 ‘쇼 행운열차’에서 ‘연변늬우스’를 진행하고 있으니, 북한 사투리와 인연이 깊네요.
“시청자들 중에 ‘김지선은 북한 사투리로 10년을 우려먹는다’고 말하는 분들이 있어요. 얼마 전까지 귀순배우 김혜영씨와 ‘꽃봉오리 예술단’ 코너를 하기도 했으니 그럴 만하죠. 그런데 북한과 관련 있다는 게 편하지 않은 분들이 있나봐요. 그저 시대적인 흐름으로 이해해주셨으면 해요. 제가 코미디언 생활을 하는 동안 귀순, 탈북자들이 많이 생겼고, 남북교류가 많아져 교예단, 예술단도 오니까 거기서 힌트를 많이 얻게 된 거죠.”
5월9일 김지선의 결혼식. 김지선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위염으로 응급실에 실려 가기도 했으나 지금은 신혼 재미에 빠져 행복하기만 하다(위).
“91년 말 SBS로 옮겨 매주 마돈나나 마이클 잭슨을 흉내내 노래하는 ‘서태순과 아이들’이란 코너를 했는데, 이 코너가 인기를 얻자 음반을 내자는 제의를 받았어요. 주변의 말이나 칭찬에 그렇게 혹해서는 안 되는 거였는데 스물한 살 나이에 사랑이나 이별을 알면 얼마나 알았겠어요. 노래를 부르면서도 감정 처리가 벅차다는 걸 스스로 알았고, 당연히 실패했죠. 가요 순위 프로그램에도 출연했었는데 제가 먼저 매니저에게 그만두자고 했어요. 그렇게 되고 나니 한동안 가수도 개그우먼도 아닌 어정쩡한 상태였어요. 코미디로 복귀했지만 단역만 주어지더라고요. 그러다 전국 대학을 찾아다니며 진행하는 KBS ‘열려라 강의실’이란 프로그램에 출연하게 되면서 다시 힘을 얻었죠. 많은 것을 배운 셈이에요.”
-올 초 ‘개그콘서트’ 인기 출연자들이 집단으로 경쟁사로 옮길 때 프로그램 폐지설이 나오기도 했는데 내부에선 어땠습니까?
“위기감을 전혀 느끼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밖에서 걱정하는 것만큼은 아닐 거라고 내심 자신했어요. 박준형씨 같은 후배들이 라이브 공연에서 쌓은 내공이 보통이 아니니까요. 나간 사람들 자리가 빨리 채워졌고 묻혀 있던 후배들이 기회를 얻었죠. 저도 장용씨와 김준호씨가 하던 코너에 김준호씨 대신 들어가며 ‘언저리 뉴스’를 하게 됐고요. 어쨌든 여기서 나간 후배들도 잘 돼야죠.”
‘언저리뉴스’는 스테레오타입화한 뉴스의 전달방식을 비틂으로써 웃음을 끌어낸다. 그것은 매일 쏟아지는 어둡고 무서운 뉴스들이 현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희망이기도 하고 엽기적인 사건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현실에 대한 조소를 담고 있기도 하다.
-‘언저리 뉴스’의 소재는 어디서 얻습니까?
“작가와 장용씨, 저 세 사람이 만들어요. 1차적으로 작가가 뉴스 아이템을 정리하는데, 전 라디오뉴스에서 기자나 앵커가 심각하게 말하는 걸 듣다가 ‘아무것도 아닌’ 극적인 반전을 떠올리게 되는 경우가 많아요. 제가 ‘언저리뉴스’와 ‘연변늬우스’를 맡자 한 아나운서가 보통 아나운서는 하나도 해보기 어려운 뉴스를 두 개나 맡았다고 하더군요.”
-‘봉숭아학당’에서 샘 브라운의 ‘Stop’과 함께 등장하는 섹시한 여성 캐릭터는 어떻게 태어났나요? 시청자 모니터에서 간혹 ‘선정적’이라고 지적을 받는데….
“전부터 선배들이 개그우먼들이 더 이상 못생기고 뚱뚱한 캐릭터로 웃기려고 하지 말고, 정말 여성스런 역으로 웃길 수 있어야 한다고 했어요. 그래서 에어로빅하는 파마머리 아줌마를 하다 개편 때 한번 해보자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가능하면 가장 섹시하게 변신해보기로 했고, 거기에 시사성 있는 영어를 넣어보기로 했죠. 미국 대통령이 부시인데, 전쟁 땜에 잠이 안 오면 부시럭부시럭, 화장실에 가면 부시쉬, 이런 식으로요.”
고정출연하는 프로그램이 3개에 각종 인터뷰와 행사, 막 시작한 신혼살림까지 눈코 뜰 새가 없을 것 같은데, 그는 “그래도 집에서 가끔 밥도 해 먹을 시간은 있으니 됐다”고 한다. 단지 지난해 말 정년퇴직한 친정아버지를 위해 차려드린 레스토랑에 자주 나가보지 못하는 것이 미안할 뿐이라고. 그는 그렇게 낙천적인 성격이다. 음반을 내자마자 가수 되기를 포기한 일이나 잘나가던 방송을 접고 1년간 훌쩍 서울을 떠나 뉴욕에서 혼자 살다온 ‘이력’이 말해주듯, 욕심내지 않기, 천천히 가기가 그 웃음의 힘인 듯했다.
“일요일에 ‘개콘’ 안 보면 월요일에 ‘왕따’된대요. 이런 말이 저희에겐 최고의 칭찬이죠.”
종이를 내민 팬에게 시원스럽게 사인을 해주며 그가 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