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19

2002.01.24

이탈리아 TV는 천박한 ‘야만의 잔치’

미디어 황제 베를루스코니 총리 무소불위 권력 행사 … 비판기능 실종

  • < 최재한/ 베를린 통신원 > redrot@hanmail.net

    입력2004-11-08 15: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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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탈리아 TV는 천박한 ‘야만의 잔치’
    이탈리아의 총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66)는 총리인 동시에 미디어 산업의 황제다. 이탈리아의 3개 국영 방송국과 3개 민영 방송국, 일간지 ‘일 조르날레’, 영화와 비디오를 제작·판매하는 업체인 ‘메두사필름’, 200여개 상영관의 체인망인 ‘시네마5’, 비디오 대여 체인점 ‘블록버스터’ 등이 그의 소유다. 이 밖에도 베를루스코니 총리는 최대 판매부수의 시사잡지 ‘파노라마’를 발행하는 출판사 ‘몬다도리그룹’, 최대 광고대행사 ‘퍼블이탈리아’ 그리고 명문 축구단인 ‘AC밀란’의 소유주이기도 하다. 심지어 그는 인터넷 최대의 백화점 체인망과 보험·금융업까지 장악하고 있다. 베를루스코니 가계가 소유한 자산가치는 약 18조원에 이른다.

    은행원의 아들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1980년대에 이탈리아 미디어 산업의 대부분을 장악, 단기간에 미디어 황제가 되었다. 그의 급부상은 전 총리 베티노 크락시 등 거물 정치인들의 후원, 그리고 고위층과 연결된 비밀 결사단체 ‘P2’ 등의 지원으로 가능했다. 마피아 보스였던 스테파노 본타데가 베를루스코니의 ‘TV 왕국’ 건설 자금을 지원했다는 것이 전직 마피아들의 증언이다.

    이탈리아 TV는 천박한 ‘야만의 잔치’
    베를루스코니는 원래 정치가가 아니라 사업가 출신이다. 그의 사업적 기반은 6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베를루스코니는 밀라노에 ‘텔레밀라노’라는 이름의 지역방송국을 설립했는데 이 TV 방송국이 오늘날 그의 미디어 제국 초석이 되었다. 이후 80년대 들어 3대 민영방송사인 ‘카날레5’ ‘이탈리아1’ ‘레테4’를 차례로 사들여 ‘미디어세트’라는 민영방송 독점체를 구축했다. 베를루스코니의 회사가 없었다면 상당수의 이탈리아 미디어 종사자들은 실업자 신세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떻게 조그만 지역방송국이 대규모의 민영방송사들을 매입할 수 있었느냐 하는 의문은 오늘날까지도 베일에 싸여 있다.

    지난해 5월에 치러진 이탈리아 총선 당시 국민들은 베를루스코니의 재집권에 대해 대부분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선거 자체가 베를루스코니의 미디어 독재 아래 실시되었기에 이러한 반응은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단적으로 베를루스코니가 인터넷을 통한 선거운동을 벌이자 상대 좌파진영의 대변인은 “1200만권의 자서전을 인쇄해 각 가정에 돌렸으니 종이가 있을 턱이 없다”며 비아냥거렸다.

    이탈리아 TV는 천박한 ‘야만의 잔치’
    한편 유럽연합(EU) 회원국들은 미디어 재벌 베를루스코니 후보의 언론 장악 외에도 반(反)외국인 정책을 표방한 극우정당 ‘북부연맹’과의 연립 등을 문제 삼으며 그의 재집권 후에 빚어질 외교적 마찰을 우려해 왔다. 또 선거중에도 베를루스코니가 집권하면 국영·민영 방송 통제권을 완전 장악하게 되는 점, 뇌물증여와 돈세탁 혐의로 재판중인 그가 총리직에 재도전한 데 대한 도덕성 등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선거 결과는 이 같은 우려들을 현실로 만들고 말았다. 총리가 된 베를루스코니는 3개 국영방송(RAI 1, 2, 3)까지 동시에 장악했다. 유럽 어느 나라에도 여론을 형성하고 계도할 각종 미디어를 총리가 장악한 경우는 없다. 이탈리아의 작가 움베르토 에코는 “미디어 재벌 총수의 선택이 마침내 이탈리아의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에코의 지적은 옳았다. 저급한 TV 프로그램들이 점차 이탈리아의 안방을 점령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탈리아 주간지 ‘기독교가족’은 TV 방송의 경향에 대해 “야만인을 위한 프로그램”이라고 평가한다. 이탈리아 TV 프로그램은 대부분 경품 잔치의 연속, 폭력이 난무하는 영화, 스포츠와 천박한 쇼 프로그램 등으로 뒤범벅되어 있다. 여기에 나체의 미녀들이 등장해 선정성을 더한다. 심지어 축구 등 스포츠 경기나 가족시간대조차 아슬아슬한 차림새의 소녀들이 활개친다. 저속한 성적 개그들도 좀처럼 빠지지 않는다. 유명한 쇼걸이 붉은 핫팬츠를 벗으면 사회자가 코를 들이대는 장면까지 여과 없이 방송되는 지경이다.

    이탈리아 TV는 천박한 ‘야만의 잔치’
    국영방송들도 점차 상업화되어 현재는 민영방송과 차별성을 찾기 힘들다. 뉴스나 대담 프로들은 항상 상업 광고로 시작된다. 문제는 이미 국영방송의 보도 프로그램들이 시청자를 잃은 상태에서 민영방송들이 여론을 주도하고 있다는 데 있다. 예컨대 뉴스쇼 ‘스튜디오 아페르토’는 일주일간의 방송에서 베를루스코니와 여당의 동정에 대해 11차례(9분) 보도한 반면, 야당은 불과 세 차례, 33초를 할애하는 데 그쳤다.

    TV정책을 담당하는 공보부 장관은 이런 편파보도 주장들에 골머리를 앓고 있지만 총리가 프로그램의 제왕인 까닭에 문제의 해결이 쉽지 않다. 베를루스코니는 국영·민영 방송(시청률 42%)을 통해 시청자의 90% 이상을 그의 통제권 아래 두었다. 결과적으로 방송을 통한 여론 형성은 총리 개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셈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이탈리아의 미디어 재벌과 여당의 실수 등을 보도하는 매체는 외국 언론뿐이다. 독일의 언론은 “그렇다면 독일에서는 독일 미디어 재벌인 레오 키르히가 총리가 되어야 하나”라고 반문하며 이탈리아의 현실을 비꼬았다. 또 선거 당시 스페인의 일간지 ‘엘 문도’와 영국의 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돈세탁, 판사 매수, 마피아와의 결탁 등 범죄 의혹설을 제기하며 베를루스코니가 총리에 부적합한 인물이라고 공격했다.

    베를루스코니는 언론의 공정성 문제가 끊임없이 제기되자 공정보도를 감시하기 위한 특별위원회 구성을 제의했다. 미국, 영국, 독일의 전문가 3명으로 구성된 특별위원회는 언론의 편파보도 등 공익에 반하는 행위들을 조사할 계획이다. 그러나 베를루스코니는 민영방송의 매각 주장에 대해서는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 베를루스코니는 임기 5년인 총리 외에 외무장관직도 겸하고 있다. 정치와 언론 양측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고 있는 그가 임기를 무사히 마칠 수 있을지가 세인의 관심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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