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301

2001.09.13

구수하고 시원한 ‘제주의 미각’

  • 시인 송수권

    입력2004-12-20 14: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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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수하고 시원한 ‘제주의 미각’
    자리젓은 깅이젓·게웃젓과 함께 제주의 3대 젓갈 중 하나다. 자리젓은 자리가 재료다. 자리젓 한 중발을 풀어놓으면 온 방안이 그 향기로 후끈하게 달아오른다. 향기 아닌 느랏내가 진동하면 곰삭지 않았다는 증거다.

    제주의 봄은 자리에서 온다. 유채꽃이 피면 자리가 벌써 식탁에 오른다. 제주에서는 자리돔 잡는 것을 ‘자리 뜬다’고 한다. 유채꽃이 노랗게 땅을 흔들 때다. 이때 잡히는 자리돔은 살이 넉넉하면서도 뼈가 보드랍다. 그래서 물회감으로 가장 좋다. 5∼6cm급이 알맞은데 몸체가 큰 놈은 대가리를 떼어내고, 작은 놈은 그대로 비늘만 치고 뼈째 잘게 썰어 물회로 만든다. 시원한 통물에 날된장을 풀고 자리를 숭숭 썰어 띄운 다음 미나리·부추 등 채소란 채소는 다 썰어 넣는다. 이는 모두가 가족 협동으로 이루어진다.

    그리고 밥을 말아 거의 한 옹배기씩이나 먹는다. 이것이 곧 여름 무더위와 흉년을 넘기게 한 구황(救荒)식품이었음은 두말할 여지없다. 옥돔은 바다 밑창 깊숙이 들어앉아 혈거생활(穴居生活)을 하므로 구하기가 힘들지만 자리는 떼를 지어 연안 가까이 몰려다녀 잡기가 쉬운 까닭이다.

    구수하고 시원한 ‘제주의 미각’
    자리 물회는 비린내가 나지 않고 구수하면서도 시원한 맛을 내는 것이 특징이다. 입 안에서 뼈와 함께 씹히는 연한 자리돔 살의 독특한 맛은 제주를 대표하는 맛으로 부족함이 없다. 자리 물회는 여름 음식이다. 외지 관광객도 어느새 이 맛에 길들어 물회를 찾는 일이 잦아져 지금은 철을 타지 않는 음식으로 바뀌고 있다. 자리 물회 특유의 맛이 널리 알려졌기 때문이다.

    남제주군 대정읍 추사관(秋史官)을 지나 모슬포의 부두 쪽에 자리 물회를 잘하는 항구식당(대표 조명민, 064-794-2254)이 있다. 물회뿐만 아니라 자리젓과 구이로도 유명한 집이다. 유채꽃이 피기 전에 벌써 추사관 안마당이나 대정읍성을 둘러 제주 수선화가 초봄을 부르는 향기를 뱉는다. 세한도(歲寒圖)를 그려 벽에 붙여 놓고 노오란 또는 하얀 제주 수선화가 피는 것에서 한세월 귀양살이 수심을 달랜 추사관의 추사 유묵(遺墨)을 만나보는 것도 관광 코스의 중요한 여정이다. 이때는 꼭 모슬포항에 들러 자리돔 구이 백반이나 자리 물회를 들고 갈 일이다. 한창 귤이 익는 내음과 자리젓내가 섞여드는 모슬포항에서 ‘가파도 그만 말아도 그만인 마라도’를 건너다 봄도 좋다.



    구수하고 시원한 ‘제주의 미각’
    또한 ‘자리 물회 다섯 번이면 약보(藥保)가 필요 없다’는 현지인의 옛 이야기도 들을 만하다. 옛날엔 못 살아서 모슬포고 모래바람이 많아서 모슬포(몹쓸포)였다는 거친 땅에서 식보(食保)가 무엇이었겠느냐는 물음 끝에 으레 따라붙는 것이 자리돔이었다면 말이다. 그래서 ‘자리를 뜨는’ 데도 모슬포쪽 자리돔은 까만 색깔에 뼈가 억세고, 서귀포쪽은 몸 색깔이 밝으며, 가파도 것은 구워 먹기 좋고, 보목리 것은 부드럽고 맛이 고소해 날로 썰어 강회나 물회감으로 해야 좋다던가. 제주에 허리 굽은 노인이 없는 것은 단백질의 보고요 칼슘의 보고인 자리를 먹고 자랐기에 그렇다던가. 하여튼 자리는 제주인에게 약보요 식보 음식인 것만은 당연한 것만 같다.

    돔자 항렬 중에서도 작고 못생긴 것이 자리돔이고, 남도인 식탁에서 물에 만 밥의 밑반찬인 조기(굴비)에 비하면 턱도 없지만 제주인에겐 조기보다 품계가 높은 게 자리돔 아니겠는가. 아직도 값이 싸고 연중무휴로 고정식탁을 지켜 향토색깔로 맛과 멋을 건사해 주니 말이다. 적어도 제주관광이라면 값비싼 바리(다금바리)는 먹을 수 없어도 자리 물회, 옥돔 구이, 오분작 뚝배기, 도새기회 정도는 들어야 체면이 서지 않겠는가. 고맙다, 자리야. 또 제주 여름은 한치와 물오징어철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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