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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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호뿐인 IT강국 ‘우물 안 코리아’

부처간 밥그릇 싸움에 효율성 추락 … 국제 경쟁력 뒷걸음질 해외시장 개척 험난

  • 입력2005-02-16 14:2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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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호뿐인 IT강국 ‘우물 안 코리아’
    “(대통령의 중소기업 정책 실행 의지에 따라서) 각 정부 부처에서 좀 경쟁적으로 정책 현안들을 실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저희 중소기업들은 오히려 그런 중복된 정책의 실행으로 인해 여러 가지 혼선을 빚고 있습니다. … 예를 들면 한 부처에서 어떤 기술평가로 인한 인증을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부처에서는 부처가 다르다는 이유 하나로 그 인증을 해주지 않고 있습니다.”(중소기업인 이영아)

    “그런 것은 반드시 시정돼 나가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앞으로도 그런 문제들은 서슴지 마시고 정부측에 제의하고 또 시정을 요구해 주시기 바랍니다. 정 필요할 때는 청와대로 말씀해도 좋습니다.”(김대중 대통령)

    3월1일 저녁 7시부터 2시간 동안 진행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 시간에 나온 대화 한 토막이다. IT(정보통신) 업계 사람들은 중소기업인 이영아씨가 거론한 정부 부처가 다름아닌 산업자원부와 정보통신부라고 생각한다. 김대중 정부 들어 특히 IT산업이 각광받으면서 산자부와 정통부가 서로 자기 부처 소관 업무라며 다투고 있는 것을 이씨가 속시원하게 꼬집었다는 것이다.

    정보통신(IT)과 정보화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세계 각국은 고도화된 정보통신 기반 구축을 위해 앞을 다퉈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정보통신 기반이야말로 사회 전체의 비용을 낮추는 동시에 편익을 증대하는 새로운 형태의 사회간접자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기존의 통신-컴퓨터-방송 등 다양한 매체의 융합을 통해 멀티미디어산업과 같은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기도 한다.

    구호뿐인 IT강국 ‘우물 안 코리아’
    김대중 정부 들어 정부 관계자들이 기회 있을 때마다 ‘전통산업과 IT산업의 쌍두마차론’ ‘IT 부국론’ 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런 차원에서일 것이다. 특히 미국이 90년대 이후 10여년간 물가성장 없는 고성장을 구가할 수 있었던 것도 IT산업 때문이었다는 분석도 있고 보면 김대중 정부가 내세우는 ‘IT 부국론’은 당연한 목표 설정이라는 반응이다.



    김대중 정부 들어 정부가 내놓은 ‘IT화 정책’은 눈이 부실 정도다. 최근에만 해도 산업자원부가 중소기업 1만개 IT화 정책, B2B(기업간 전자상거래) 시범사업 등을 내놓았으며, 정통부도 지식정보 강국을 위한 e-코리아 건설 추진 계획 등을 쏟아냈다. 정부 계획대로라면 한국은 곧 IT 선진국에 진입할 것 같은 환상에 젖게 된다.

    그러나 속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정은 다르다. 한 부처가 IT 정책을 발표하면 다른 부처가 경쟁적으로 비슷한 정책을 내놓는 등 재탕 삼탕인 정책이 많다는 것. 중소기업 1만개 IT화 정책에 대해서는 정통부 쪽에서 자신들이 이미 해오던 사업을 재탕한 것이라는 얘기가 흘러나오고 있고, e-코리아 정책은 산자부 쪽에서 자신들이 해오던 기업 정보화 사업의 재판이라는 지적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다. 일각에서는 “최근 각광받고 있는 IT 산업을 먼저 장악하기 위한 ‘밥그릇 싸움’ 차원의 정책만 쏟아내고 있다”면서 “이영아씨의 지적은 이런 점에서 ‘IT 업계의 금기’를 대통령 앞에서 공개적으로 거론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응이다.

    IT 업계에서는 정부가 거창한 ‘IT 부국론’을 주장하기보다는 고도 정보통신 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인프라라고 할 수 있는 초고속망 정비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IT 업계 관계자는 “현재 수도권만 해도 인터넷 망이 25개나 되는데, 문제는 이들 망이 서로 접속되지 않으며 접속되게 하려면 새로 망을 까는 것보다 더 많은 돈이 들 정도”라고 꼬집었다. 가령 국책 연구기관인 한국개발연구원과 산업연구원이 서로 접속되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 산자부와 정통부가 경쟁적으로 설립하고 있는 벤처기업 해외 지원센터는 더욱 가관이다. 산자부가 지난 2월20일 일본 도쿄에 40평 규모의 지원센터를 설립하자 정통부 역시 6월 중 도쿄에 지원센터를 개설하기 위해 준비 작업을 진행중이다. 이에 대해 IT 업계 관계자들은 “왜 하필이면 두 부처가 모두 도쿄냐”면서 “같은 일본이라고 해도 지역적으로 분산됐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와 관련, 청와대 경제수석실 관계자는 “과거 재정경제원이 경제기획원과 재무부를 통합, 다른 부처 위에 군림만 하다 외환위기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는 데서 알 수 있듯 정부 부처도 서로 경쟁하지 않으면 자만에 빠질 수 있다”면서 “그런 측면에서 산자부와 정통부간 경쟁은 필요한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IT 벤처를 위한 해외 지원센터가 해외 곳곳에 설립돼 있으면 나쁠 게 없다는 입장인 셈이다.

    그러나 문제는 이런 해외 지원센터가 제 역할을 하고 있느냐는 점. IT 업계에서는 정통부가 98년 설립한 한국소프트웨어인큐베이터(KSI)의 예로 봐서 해외지원센터들이 한국 IT 벤처의 해외 전진기지 역할을 하기 힘들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지난해 4월 정통부가 실리콘밸리에 설립한 아이파크(i-PARK)에 흡수 통합된 KSI는 99년 국내 소프트웨어 총 수출액(1억1000만달러)의 3분의 1 정도를 담당하는 등 나름대로 ‘선전’했으나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

    실리콘밸리 사정에 정통한 한국인 변호사 K씨는 “그동안 KSI를 거쳐간 16개 업체중 미국 벤처캐피털로부터 제대로 투자받은 회사는 한 곳도 없었다”고 지적했다. K변호사는 MP3 플레이어를 개발한 디지털캐스트(대표 황정하)가 현지의 다이아몬드 멀티미디어사와 인수-합병에 성공한 게 KSI가 내세울 만한 실적이라고 덧붙였다.

    K변호사에 따르면 KSI가 이처럼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은 실리콘밸리 현지에 네트워크를 가진 ‘마당발’ 매니저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 미국에 첫발을 내딛는 기업의 경우 사업계획서 작성에서 투자 유치까지 직접적으로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는데, KSI는 예산의 제약 때문에 그런 인력을 갖추지 못했고, 이것이 ‘실패’로 이어지는 한 원인이 됐다는 설명이다.

    정통부 정보통신정책총괄과 관계자도 이 점을 인정했다. 이 관계자는 “정통부도 KSI에 대해 △단순 사무공간 제공에 그쳤고 △현지 네트워크를 제공하지 못한 데다 △현지를 방문한 국내 VIP의 접대 등에만 신경썼다는 비판이 제기되는 것을 잘 알고 있다”면서 “아이파크 소장을 현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현지인으로 충원하려고 하는 등 아이파크 운영을 철저히 현지화하려는 것도 이런 비판을 수용한 결과”라고 설명했다.

    이처럼 정부는 IT 분야에 관한 한 ‘우물 안 개구리’ 신세를 면치 못했다. 그렇다면 민간부문은 어떠한가. 유감스럽게도 정부와 비슷한 수준이다. 그동안 벤처 붐 조성에 일익을 담당한 국내의 벤처캐피털 역시 투자 기업을 코스닥에 등록해 자본이득을 얻는 데만 열중했지 IT 벤처들의 해외 진출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것. 그런 점에서 차세대 뱅킹 시스템을 개발한 IMS(대표 임화)의 해외 진출 사례는 참고할 만하다. 은행 업무를 표준화-패키지화하는 솔루션을 개발한 이 회사는 지난해 말 미국의 IBM 등을 물리치고 베트남 중앙은행 결제시스템을 제공하는 데 성공했다. 또 일본의 중형 규모 은행들을 상대로 적극적인 마케팅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 회사가 이처럼 해외 마케팅에서 돋보이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은 이 회사에 자본을 투자한 세계 유수 외국계 은행의 ‘지원’ 덕분. 이 은행이 IMS에 투자했다는 사실 자체가 외국에서는 IMS 솔루션에 대한 보증이 되고 있는 것이다. 이 회사 손진운 감사는 “애초 외자유치를 추진할 때부터 해외 마케팅에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는 자본을 찾았고, 이런 노력이 세계 유수의 외국계 은행 자본 유치로 결실을 보았다”고 밝혔다.

    문제는 또 있다. 산자부와 정통부, 문화관광부까지 ‘IT 부국론’을 외치며 IT 벤처 등에 대한 각종 지원책을 내놓고 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피부에 와닿지 않는다고 말한다. e-비즈니스 솔루션 개발 업체 W사 L사장은 “정부 과제에 선정되면 자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데, IT 업계 입장에서는 산자부나 정통부 등에 모두 과제를 제출할 수 있기 때문에 ‘기회의 확대’ 측면에서는 좋은 점이 있다”면서도 “실질적인 지원보다는 생색내기에 그치는 경우가 많다는 게 문제”라고 지적했다.

    L사장의 항변이다. “정부 과제로 선정되면 정부가 과제 수행비의 60% 정도를 융자해주는데, 이 자금을 쓰려면 담보가 있어야 한다. 운 좋으면 기술신용보증기금이나 신용보증기금에서 보증서를 받을 수 있지만 이 경우 수수료를 물어야 하기 때문에 정부 지원 자금 이자율 6.5~7.5%는 실질적으로 8.5~9%가 된다. 현재 은행 대출금리보다 더 높은 셈이다. 게다가 정통부에서 과제가 선정되면 산자부 산하기관인 기술신용보증에서 보증을 받기 어렵다는 얘기도 IT 업계에서는 공공연히 나돌고 있다.”

    정부 지원 자금 가운데 가장 경쟁이 치열한 것은 정부 출연자금. 연구 성과에 따라 출연자금의 일부만 상환토록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런 만큼 이 자금에 대한 정부의 관리는 상당히 까다로운 편이다. 인터넷 솔루션 업체 B사 L사장은 “정부 출연자금은 국민의 세금이므로 정부가 철저히 사후 관리를 해야 한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지나치게 까다로워 이를 위한 전담 직원이 한 명 있어야 할 정도”라면서 “최근에는 벤처기업들의 이런 어려움 때문에 정부과제 관리 대행업체들이 뜨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가 모든 것을 해주던 시대는 지났다. 이젠 IT 업체 스스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그렇긴 하지만 정부의 ‘IT 부국론’이 현장에서는 공허한 메아리로만 들린다면 문제가 아닐까. 취재 과정에서 만난 IT 벤처 사장 P씨의 말은 곱씹어볼 만하다.

    “개인을 상대로 한 소프트웨어는 마이크로소프트와 같은 거대 자본에 당할 수 없다. 그러나 특화된 부문에서는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전통산업처럼 별도의 기술 축적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IT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우수한 인재가 있어야 한다. 기업은 물론 정부도 인재 양성을 위해 각종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최근 정부가 IT 인력을 집중 육성한다며 내놓은 정책을 보면 컴퓨터 프로그래머 정도를 양성하겠다는 얘기나 마찬가지다. 정부가 아직도 IT산업의 본질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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