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72

2001.02.22

‘넋 나간 사람들’의 ‘넋 나간 이야기’

“컴퓨터는 원격조종장치” “나는 순종황제의 동생”… 음모론부터 종말론까지 내용도 다양

  • < 황일도 기자 shamora@donga.com>

    입력2005-03-21 14:5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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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 나간 사람들’의 ‘넋 나간 이야기’
    “지금도 바로 위층에서 다 도청하고 있어요.” 불안한 눈빛과 잘 연결되지 않는 말투로 끊임없이 같은 말을 반복하는 K씨(48·경기도 안산).

    낮이면 생선장수나 아파트 경비원으로 위장한 ‘기관원들’이 자신을 끌어내기 위해 시끄럽게 떠들어댄다는 K씨는 외출도 거의 삼간 채 집에서만 생활한다. 독신인데다 변변한 일자리도 없는 그의 수입원은 동생들이 보태주는 용돈이 전부. 기자를 만나서도 그가 던진 첫 질문은 고향이 어디냐는 것이었다. “○○도 출신이면 아무 얘기도 안 해주고 얼른 도망가려고 그랬죠.”

    인터넷이나 거리에서 쉽게 접해

    ‘넋 나간 사람들’의 ‘넋 나간 이야기’
    부산 출신으로 서울의 한 명문대를 나와 항공사에서 근무하던 그가 문득 동료들의 시선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8년 전. “처음에는 그냥 국가기관이 나를 감시하는 줄 알았는데 재작년 무렵에 비로소 확실히 알게 됐어요.” ○○도 출신은 모두 ‘남조선 인민공화국’의 조직원들이라고 확신(?)하고 있는 그의 주장에 따르면 북한과 내통하고 있는 이 조직의 우두머리는 김대중 대통령. 언론사마다 돌아다니며 이런 주장을 떠들다가 작년에는 공주 치료감호소에서 치료도 받았지만 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어렵게 전화 통화에 성공한 그의 동생은 힘없이 말한다. “그냥 그러려니 하세요. 저희도 벌써 포기했습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이나 역사는 거짓이며 그 뒤에는 모든 것을 조작하는 거대한 음모가 있다.’ 영화 또는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이런 이야기를 현실로 믿으며 사는 사람들이 있다. 인터넷 게시판이나 거리에서 드물지 않게 만날 수 있는 황당무계한 이야기의 주인공들.



    청와대, 국가정보원 등 각급 기관 민원실에 밀려드는 이들의 투서는 IMF 사태를 계기로 꾸준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어 담당자들을 곤란하게 만든다. 보는 사람은 ‘정신나간 이야기’로 치부하고 무시해버리지만 정작 당사자들에게는 목숨만큼 소중한 ‘신념’이다.

    “나는 고종황제의 밀지(密旨)를 갖고 있다.” 정해진 주거도 없이 서울을 떠돌고 있는 L씨(72). 말끔한 외모와 기품 있는 태도로 상대방을 압도하는 이 노인은 자신이 고종황제의 친아들이며 순종황제의 이복동생이라고 주장한다. 일본 총독부에 의해 제거될 것을 두려워한 황실에서 한 양반가에 자신을 입적해 비밀리에 키우게 했다는 것.

    “사람들은 황제께서 1919년에 승하하셨다고 하지만 그분은 1930년대까지 살아 계셨어요. 내가 5세 되던 무렵 실제로 ‘너는 내 아들이다’는 이야기를 그분께서 직접 해 주셨다니까….” 광복 이후에도 이승만 정부를 비롯한 공화주의자들에게 쫓겨 평생을 도망다녔다는 그는, 정부 최고위층에서는 자신을 인정하고 있고 은밀히 도움도 준다고 주장한다. “평생 직업을 가져본 적 없는 내가 70년을 돈 한 푼 없이도 이렇게 살아왔다는 게 누군가 도와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는 것이 그 나름의 설명. 결혼을 한 적도, 가족도 없는 L씨지만 그 누구 못지않게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 누가 뭐라 해도 그는 ‘황족’이니까.

    이보다 한 차원 큰 규모의 얘기를 하는 당사자들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가장 낯익은 형태는 지난 세기말 맹위를 떨쳤던 종말론. 올해가 1999년이라고 믿고 있는 여대생 K씨(25·서울 천호3동)가 대표적인 사례다.

    그는 신약성서 요한계시록의 모든 내용이 이제 실현되고 있어 곧 선과 악의 최후의 싸움이 일어날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가족에 따르면 K씨가 이런 생각에 집착하게 된 것은 지난 99년 8월. 교회에는 가본 적도 없는 그가 갑자기 종말론에 빠지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가족도 알지 못한다. 밤낮을 거의 자지 않고 전국을 떠돌면서 ‘예언’을 행하던 K씨가 결국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대구의 한 병원에서 발견된 것은 지난해 말. 지난 1월 인도에서 발생한 지진도 종말의 징조라고 확신하는 그녀는 몸을 추스르자마자 다시 거리로 나섰다.

    지난 98년 아시아 경제위기 때 말레이시아의 마하티르 총리가 제기했던 ‘유대계 투기자본 음모론’의 영향을 받은 경우도 있다. “당장 모든 컴퓨터를 부숴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J씨(41). 중소기업체에서 근무하다 98년 퇴직한 그는 마이크로소프트사의 프로그램이 장착된 모든 컴퓨터가 전자파를 통해 인간의 생각을 지배하는 원격조종장치라고 믿는다.

    “그 뒤에는 세계를 지배하려는 유대인들의 음모가 숨어 있습니다. 빌 게이츠와 국제 금융자본가 조지 소로스가 그 핵심세력이고요.” 평소에 5개 신문과 8개 시사잡지를 구독하며 세계의 모든 흐름을 놓치지 않고 체크하고 있다는 그는 최근 지하철 2호선을 타고 사람들에게 자신의 ‘신념’을 전파하는 일을 시작했다. 기자와의 통화를 끝내 거부한 아내와는 작년에 이혼했고, 본인은 가능한 한 컴퓨터에서 멀리 떨어져 있기 위해 주변에 건물이 없는 일산의 단독주택에서 혼자 살고 있다.

    사이버 세계는 이같은 사람들이 활동하기에 이상적인 공간이다. 자신이 제2건국운동과 세계화 구상의 창안자라고 주장하는 K씨는 “우리나라를 단번에 세계 1등 국가로 만들 수 있는 획기적인 인터넷 공익사업 아이템이 있으니 투자해 달라”고 말한다. 게시판에 글을 올리는 족족 한 시간을 못 넘기고 삭제되기 일쑤지만 그는 절대 멈추지 않는다.

    그런가하면 세계를 바로잡고 인류를 구원할 비책이 있다고 주장하는 또 다른 K씨는 전국의 석학들과의 공개토론을 제안한다. 누구든지 대면하면 1시간 안에 판가름이 난다고 확신하는 그는 토론회를 주선하는 기자에게는 1인당 200만원을 즉석에서 지급한다고 약속한 바도 있다. 보이는 곳마다 글을 올리는 강력한 홍보에 힘입어 개인 홈페이지가 어느새 조회수 4만 건을 기록중이건만 자신의 제안을 계속 무시하는 정부가 야속하기만 하다.

    한양대 구리병원장 김광일 교수(정신과)에 따르면 이렇듯 현실성이 없는 생각에 집착하여 정상적으로 생활하기 어려운 상태를 가리켜 의학용어로는 ‘망상’(delusion)이라 한다. 눈여겨볼 대목은 이 망상의 형태와 한 시대의 사회상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점. 지역갈등, 레드 컴플렉스, 정치적 혼란, 세기말의 불안감, 기술 발달에 따른 부적응 등 우리 사회에서 가장 첨예하게 나타나는 갈등이 망상증 환자에게서 발현된다는 것이다.

    “결국 안정된 사회보다는 전환기에 있는 과정에서 이런 환자들이 자주 발생하지요. 혼란한 사회가 이들 증상을 가중시킨다고 볼 수 있고요. 어떻게 보면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 일종의 희생자라고 할까요.” 이들이 만드는 ‘가상의 세계’가 아름답지 못하다는 건, 우리 사회 또한 아름답지 못하다는 증거가 아니겠느냐고 김교수는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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