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66

2001.01.04

누가 진짜 ‘노자’를 웃겼나

이경숙씨 '노자를…' 번역의 자유 넘치는 개그수필(?)…불분명한 개념 나열 도올도 책임

  • 입력2005-03-04 14: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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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진짜 ‘노자’를 웃겼나
    도올의 TV 강의 교재 ‘노자와 21세기’는 고전 번역의 오역-악역의 환상적인 모델이다.” ‘노자를 웃긴 남자’라는 책의 앞머리에서 이경숙이란 필명의 저자가 단언한 말이다. 대중적인 학자인 도올당(堂, 호에다 존칭을 붙이자니!)에게 대놓고 그런 말을 퍼부어 대니, 호삿거리를 즐기는 언론이 그것을 크게 보도하는 것도 당연할 터.

    허나 주장은 주장이요 짚어볼 것은 짚어볼 일이 아닌가. 더구나 이씨는 스스로의 번역을 두고 “찬찬히 읽어보면 한문으로 쓰인 고전을 어떻게 번역해야 하는가 감이 잡힐 것”이라고까지 했으니, 한번 살펴보는 것이 마땅할 듯싶다.

    먼저 양해부터 얻고 싶은 게 있다. 번역과 관련되지 않은 다른 이야기는 접어두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해석의 관점이나 글의 내용 및 독설과 익명성 등에 대해서는 말을 안하겠다는 것이다. 아무튼 도올당과 이씨의 번역 사이에는 깊은 골짜기가 있다. 첫 문장부터 다르기 시작해서 끝 문장까지 9할 정도는 다르니 말이다. 대체 어디에 문제가 있는가. 유감스럽지만 결론부터 말하겠다.

    “이씨의 한문문법은 이씨가 역사상 처음으로 만든 ‘특수하고도 유연한’ 문법이다. 이에 견주어 도올당의 한문문법은 원칙적으로 뚜렷한 역사적 실체를 가지는 문법이다.”

    문장은 규칙이며, 결코 임의적인 것이 아니다. 또 비슷해 보이는 어휘라도 모두 그 뜻과 쓰임새가 다르며, 같은 어휘라도 시대와 지역마다 웬만큼 다르다. 한문학자들이 고대 한어의 문법을 두고 적용률이 낮다는 이야기를 하는 데는 그런 사정이 있다.



    어휘를 가지고 문장을 구성하는 방식도 마찬가지다. 끊기가 불분명해 보여도 당시의 음운대로 읽을 경우, 끊어지는 곳은 대부분 뚜렷하다. 또 어조사로 볼 수 있는 한자들인 이른바 허사(虛辭)의 쓰임새도 그런 역할을 맡는다. 뿐만 아니라 수십 가지나 되는 문장의 갈래(장르)에 따라서도 끊는 방법이 정해진다.

    누가 진짜 ‘노자’를 웃겼나
    그런데 어휘에 대한 치밀한 이해 정도나 문맥의 이음새를 논외로 한다면, 도올당의 번역은 상당히 원칙적이다. 허나 이씨의 번역은 이런 원칙을 거의 무시하고 있다. 그는 갑이라는 갈래의 문장에 쓰이는 원칙을 을이라는 갈래의 문장에다 적용하며, 지극히 한정된 경우에만 쓰이는 원칙을 끌어다가 일반적 원칙으로 삼기도 한다. 어휘의 개념을 시대사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허사의 쓰임새에 대해서마저 거의 무지에 가깝다. 몇 가지만 살펴보아도 쉽게 알 수 있다.

    ‘道可道非常道’라는 ‘노자’의 첫 문장부터 살펴보자. 도올당은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늘 그러한 도가 아니다’고 옮겼다. 즉 첫번째 道를 주어로 보았고, 可道는 주어를 꾸며주는 관형구로 보았으며, 非常道를 부정의 뜻을 가진 술어부로 보았다. 그런데 이씨는 첫번째 道를 주어로 보고, 可道와 非常道를 병렬적인 두 개의 술어부로 보아서, ‘도를 도라고 해도 좋겠지만, (도가) 꼭 도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고 옮겼다.

    물론 이씨의 이런 번역은 틀렸다. 먼저 앞 서술부의 술어인 可와 뒤 서술부의 부정사인 非는 어떤 한문에서도 결코 짝을 이루지 않는다. 可와 짝을 이루는 부정사는 非가 아니라 不(弗)이다. 다음으로, ‘반드시’라는 뜻의 必자가 생략되었다고 하더라도, 부정사는 역시 非가 아니라 不이어야 한다. 따라서 可道와 非常道는 결코 병렬된 두 개의 서술어가 될 수 없다.

    허나 도올당의 번역에도 문제는 있다. 그는 可를 ‘말하다’로 옮겼는데, 이런 경우 可는 ‘여기다’는 뜻의 ‘以爲’가 축약된 것으로서 ‘여기다’ 또는 ‘판단하다’로 옮기는 것이 마땅한 바, 그런 것이 불분명하다.

    아무튼 ‘도는 항상성에 달려 있지 않다’(道不于常)는 개념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어이기도 했는데, 그것이 오늘날의 상식으로 이해하기 어렵다면 문법을 창조하지 말고 스스로의 의식을 재창조해야 할 것이다.

    하나 더 들어보자. 이씨는 두번째 장에서 ‘天下皆知美之爲美’를 ‘세상사람들이 다 아름답다고 알고 있는 것이 꾸며진 아름다움이면’이라고 옮겼다. 도올당은 ‘하늘 아래 사람들이 모두 아름다운 것이 아름답다고 알고 있다’고 옮겼다.

    결론부터 밝히자면, 이 또한 원칙적으로 도올당의 번역이 옳다. 그렇다면 이씨 번역의 문제는 무엇인가.

    이씨는 허사인 之자의 다양한 용법을 무시했다. 이 경우, 之자는 독립적 문장을 예속된 절로 만드는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나는 안다’는 문장과 ‘그는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독립적인 문장을 묶어서 “나는 ‘그가 나를 이기지 못한다는 것’을 안다”로 만들 경우, ‘그가 … 것’의 내용은 목적어절이 되는데, 그렇게 만드는 허사가 바로 之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살펴보자. 天下는 주어가 되며, 皆知는 서술어가 되고, 美之爲美는 목적어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씨는 목적어절이 제 생각대로 풀어지지 않는다 하여 마음대로 끊었는데, 그런 문장은 춘추시대 이래 어디에도 없었다.

    이씨는 爲자에 대해서도 너무 일면적으로 알고 있다. 그렇다고 도올당이 이 글자를 정확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爲라는 글자는 분명히 ‘함’이다. 다만 그것은 ‘行’이라는 글자와 달리 ‘목적의식적인 함’을 가리킨다. 이 글자가 ‘위하여’의 뜻으로 쓰이는 것도 그 때문이며, 때로 以와 엮여서 ‘여기다’나 ‘판단하다’로 쓰이는 것도 다 그 때문이다.

    爲가 거짓을 가리키는 뜻으로 쓰인 것은 꽤 뒷날의 일로, 위 문장을 옮기면 ‘세상 사람들은 알고 있다, 아름다움을 아름답게 여기는 것으로’쯤 될 것이다. 요컨대 이 문장에서 爲자는 ‘여기다’의 뜻으로 쓰였다. ‘아름다움을 아름다움으로 여김’이니 조금 어색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으나, 이와 비슷한 맥락의 문장들은 춘추전국시대의 유행이었다. 예를 들어 ‘어울림을 어울림으로 아는 것’(知和以和) 등이 있는데, 이런 논리는 전국시대 변설가들의 애용구로도 되었던 바, ‘국책’(國策)이란 문헌만 살펴보아도 그런 용례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늘날 상식으로 이해 어려운 문장

    어휘의 개념 문제가 나왔으니 몇 가지만 더. 같은 2장에 ‘處無爲之事’라는 구절이 나오는데, 그것은 ‘목적의식이 없다고 할 그런 일을 추구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허사인 之자는, ‘呑舟之魚’를 ‘배를 삼킬 만한 생선’이라고 하듯이 ‘할 만한’의 뜻이며, 處는 ‘추구하다’의 뜻을 갖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논어’의 ‘處仁’에서도 處는 그런 것인 바, ‘어진 마을에 거처하는 것’이 아니라 ‘마을이 어질게 되도록 추구하며 사는 것’이다.

    그런데 도올당은 여기에서 이런 것을 엄밀하게 옮기지 않았다. 그래서 무지한 사람을 혼돈시켰고, 이로 말미암아 그 업보로 ‘날벼락 번역’에 쓸개를 얻어맞게 되었다.

    아무튼 이씨의 번역에는 개념의 ‘자유’가 넘친다. 그래서 ‘노자를 웃긴 남자’는 한문을 잘 모르는 분이 번역이란 이름으로 써내려간 좀 고약한 개그수필이다. 허나 불분명한 개념을 나열한 도올당에게도 그 책임이 없다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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