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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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타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북송 장기수, 국군포로 가족 편지전달 요청 끝내 거절…“답답한 만남”

  • 입력2005-06-14 13:5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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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애타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형님! 고향 단천에 가시면 우리 큰형님께 가족들 사연이라도 좀 전해주십시오.”

    “…북한에는 국군포로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내가 국군포로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찾아 남측의 편지를 전한단 말입니까?”

    비전향 장기수 63명의 북한 송환을 딱 1주일 앞둔 지난 8월26일. 함경남도 단천에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된 국군포로 이보영씨(69)의 동생 이인영씨(54)가 광주에 사는 단천 출신의 비전향 장기수 김동기씨(68)를 찾았다. 납북자 가족들이 송환 예정 장기수들을 찾아다니면서 자신들의 사연을 호소하는 것을 보고 이씨도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북으로 떠나는 김씨를 찾아나선 것이다. 이씨의 손에는 형 보영씨가 다섯 살 때 찍은 빛 바랜 흑백사진 한 장과 편지 한 통이 들려 있었다.

    그러나 정작 김씨는 이씨가 가지고 온 사진과 편지를 이씨 앞으로 다시 밀어놓는 것으로 답변을 대신했다.

    ‘대결의 역사’ 청산 아직도 많은 시간 필요



    애초 ‘고향 사람’이라며 이씨를 반갑게 맞이하던 김씨의 입에서 예기치 못한 말이 튀어나오자 이씨는 일순간 낯빛이 굳어졌다. 1950년까지 북한 상업성(산업자원부에 해당) 과장을 지내다가 66년 공작원으로 남파 후 체포돼 33년간 감옥생활을 한 김씨는 지금도 ‘국군포로는 없다’는 북한의 주장을 자신의 신념으로 새기고 있었다. 장기수 김씨는 “국군포로와 장기수를 맞바꾸자는 것은 쌀과 금덩어리를 맞바꾸자는 것과 같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김씨는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이 제네바협약 등 국제법을 어긴 것이라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남한 정부가 국제법 위반 행위에 대해 사과하지 않는 한 국군포로 문제는 풀기 어려우리라는 견해도 덧붙였다.

    7남매 중 막내로 형님의 소식을 듣기 위해 실오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김씨를 찾은 이씨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국군포로도 결국 이산가족 중 한 사람 아닙니까? 5대 봉사를 하는 집안에서 장손이 살아 있는 것을 확인했는데 가만히 있을 가족이 누가 있겠습니까.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편지 한 통과 사진 한 장을 놓고 전해주려는 사람과 못 받겠다는 사람 사이에서 실랑이가 계속됐다. 이씨는 “우리 포로 가족들은 국방부나 통일부에 찾아다니면서 비전향 장기수는 물론 가족들까지 보내야 한다고 촉구해 왔다”면서 김씨의 협조를 당부했다. 그러나 김씨는 여전히 “나도 30년 넘게 가족과 떨어져 살았는데 어떻게 그 한을 모르겠느냐. 하지만 내 정치적 신분이 있는 이상 어쩔 수 없다”며 버텼다.

    국군포로 이보영씨가 참전한 것은 막내동생 인영씨가 다섯 살 때였다. 그 뒤 이인영씨가 50년 만에 얼굴도 모르는 형님 소식을 접한 것은 지난 98년. 조창호씨에 이어 경남 함양 출신의 양순용씨가 43년 만에 귀환하면서 국군포로에 대한 사회적 여론이 비등할 때 한 방송사에서 내보낸 가족 상봉 프로그램에서였다. 한 탈북자를 통해 형님이 북한에서 결혼해 7남매를 두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들었지만 이씨는 자신이 기필코 형님을 찾아보겠다며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그러나 2년간의 노력도 모두 허사. 남북이산가족들이 서울과 평양을 방문해 얼싸안고 눈물바다를 만들 때도 이씨는 예외였다. 국군포로 문제를 들고 나올 경우 이산가족 상봉 관련 협상이 꼬일 수도 있다는 정부측의 판단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북송을 앞둔 비전향 장기수를 찾은 것은 이씨로서는 마지막 선택이나 다름없었다.

    한 시간 넘게 김씨와 실랑이를 벌인 이씨는 “더 이상 김씨의 처지를 어렵게 하고 싶지는 않다”며 발길을 돌렸다. 김씨도 “편지를 전달해줄 수는 없지만 형님의 이름만은 기억하고 있겠다”며 이씨에게 점심을 대접하는 것으로 미안한 마음을 대신했다. 이념을 달리해 총부리를 겨누었던 대결의 역사가 청산되기에는 아직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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