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6

2000.08.10

N세대들, “으아악 … 공포는 내 친구”

짜릿짜릿 현실 탈출에 ‘쾌감’…영화, 아찔한 놀이기구 등 대중문화로 자리매김

  • 입력2005-08-22 11: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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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눈을 감기가…무서워.” 대학생 김은정씨(19)는 요즘 밤마다 공포영화 ‘블레어 윗치’의 유명한 대사를 뇌까린다. 자신은 결코 ‘공포물 마니아’가 아니라고 주장하면서도 유행하는 공포영화를 보지 않으면 좀이 쑤셔서 견딜 수가 없는 그녀다.

    김씨는 작년에 일본영화 ‘링’을 보고 한동안 텔레비전 근처에도 못 가던 기억이 아직 생생한데도, 얼마 전 인터넷을 통해 ‘링2’ 시사회 티켓을 따낸 데 이어 심야극장에서 결국 영화를 보고야 말았다. 이번에 문제가 된 건 거울. ‘링’에서는 텔레비전이 공포를 쏟아내는 매체로 나오더니 ‘링2’에서는 거울이 그 역할을 수행한 것. 결국 방에 있는 거울이란 거울은 다 떼어내고, 머리끝까지 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청하는 그녀에게 여름밤의 기온은 3, 4도쯤 내려가 있는 느낌이다.

    특별히 공포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더라도 올 여름엔 공포영화 한편쯤 보지 않고 넘어가기 힘들 것 같다. 그만큼 최근의 극장가에는 공포영화 바람이 세차게 불고 있다. 국내 영화계에서도 98년 ‘여고괴담’의 흥행 대성공 이후, 20여년간 맥이 끊겼던 공포영화 장르가 힘차게 부활했다. ‘하피’ ‘가위’ ‘해변으로 가다’ ‘찍히면 죽는다’ 등이 개봉을 했거나, 개봉을 기다리고 있다. 이런 공포영화들은 대부분 출연진과 관객 타깃이 모두 10, 20대의 젊은 층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미국의 10대와 ‘스크림’, 한국의 10대와 ‘여고괴담’. 이 관계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공포영화는 어떤 장르보다 10대들의 삶에 근접해 있다. 이들 젊은 관객은 공포영화를 보면서 비명을 질러대지만, 겁에 질린다기보다 오히려 열광한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듯하다. 그들에게 공포와 엽기는 ‘짜릿함’ ‘스릴감’과 동의어다.

    테마 파크의 아찔한 놀이기구나 번지점프 같은 극한의 스포츠를 즐기면서 즐거움을 느끼는 세대가 바로 젊은 세대다. 공포영화 역시 언제나 젊은 세대의 전유물이었다. 따라서 이들이 느끼고 공감할 수 있는 코드로 짜인 공포영화가 환영받는 것은 당연한 일. 10대의 변모를 따라 공포영화의 스타일이 바뀌어온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요즘 젊은 세대가 환영하는 공포영화 스타일은 ‘스크림’류. 이전의 공포영화가 피범벅 또는 음산함이 중심이었다면 ‘스크림’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산뜻하다. 등장인물들 또한 캐릭터가 밝고 산뜻하며 살인 동기도 그리 심각하지 않다. 영화 ‘주유소 습격사건’ 식으로 말하자면 살인 동기가 “그냥”에 가깝다.

    놀이공원을 찾는 10대들에게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는 ‘드롭’ 기구 역시 “짧고 깨끗하다” “지지부진하지 않다”는 것이 이용자들이 말하는 ‘매력’이다. ‘드롭’ 기종은 순간 낙하운동에 착안한 놀이시설로, 천천히 타워의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순간적으로 시속 80, 90km의 속도로 떨어지는 시설. 몸이 공중에 뜬 것 같은 아찔함과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두려움을 체험할 수 있는 시설이다.

    서울 잠실의 롯데월드는 78m 높이에서 순식간에 떨어지는 ‘자이로 드롭’에 이어 지상 40, 50m까지 끌어올린 뒤 번지점프처럼 2, 3회 상승과 하강을 반복하는 ‘번지 드롭’을 새로 선보였다. 방학을 맞아 놀이공원을 찾는 10대들은 이 새로운 기구를 ‘정복’하고자 아침부터 줄을 서고 있다. 탑승을 위해 대기하는 시간은 평균 40분이 넘지만 클라이맥스인 마지막 하강은 불과 2초를 넘지 않는다. 머리칼이 곤두서는 이 순간의 ‘절정’을 위해 이들은 돈과 시간을 아낌없이 투자한다.

    번지 드롭을 처음 타본 한 여중생의 말. “정말 무서웠지만 다음에 오면 또 탈 것이다. 바이킹이나 청룡열차(롤러코스터)는 이제 시시하다. 내려올 때 스피드 때문에 얼굴이 일그러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는데 정말 짜릿했다.”

    사이버 세상에서도 ‘공포’가 판을 친다. ‘떠도는 넋’ ‘분신사바’ ‘호러 월드’ ‘귀곡산장’ 같은 이름도 으스스한 사이트에 들어가면 화면 가득 피가 흘러내리고 청신경을 건드리는 기괴한 사운드 속에 공포심을 자극하는 글과 사진들을 볼 수 있다. 한번 맛들인 사람은 더 강력한 자극을 맛보기 위해 또 다른 사이트를 찾아 나선다. 네티즌들의 높은 호응 속에 ‘공포’ ‘엽기’ ‘잔혹’의 이름을 단 사이트는 날로 늘어만 간다.

    사이버문화연구실의 민경배 실장은 “인터넷의 보급으로 ‘공포’ ‘엽기’ 같은 소수의 마니아 문화가 보편적인 대중문화로 확산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기존 대중매체 시스템은 검열기제가 강했지만 인터넷은 쉽게 변형과 합성, 재창조할 수 있고 유통이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향유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민실장은 “컴퓨터라는 매체의 특성상 일반에 거부감을 줄 수 있는 내용도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혼자서 몰입할 수 있기 때문에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젊은 세대에겐 안성맞춤”이라고 말한다.

    공포영화제 공포체험단 공포동호회 등 좀더 강도 높은 공포를 체험하려는 이들로 인해 이제 공포는 제법 잘 팔리는 ‘상품’이 되었다. 두려움과 공포의 향연을 즐기는 추세는 이 시대 대중문화의 새로운 감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일상적인 것, 평범한 것, 상식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는 젊은 세대는 공포체험을 통해 현실의 억압을 뚫고 나가는 쾌감을 느낀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기존의 가치관과 권위를 부정하면서,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덕과 가치관을 들고 기성세대에 진입하기 위한 통과제의일지도 모른다.

    “괴담은 그 시대의 정신을 반영한다. 먹을 것이 없던 시절에 ‘인육만두’ 이야기가 떠돌던 것처럼, 요즘의 괴담은 ‘알고 보니 엄마가 귀신이었다’는 식으로 세상에 믿을 존재가 없다는, 사회에 대한 불신을 반영한다. 학교를 공포와 살인의 현장으로 이용해 교사 등 기존 권위에 칼날을 들이댄 ‘여고괴담’에서도 기성세대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10대들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영화평론가 겸 임상심리학자 심영섭씨의 말이다.

    공포 상황을 극복한 뒤에 차오르는 안도감과 자신감도 사람들이 공포체험을 반복하게 만드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공포물 속 공포의 대상들은 실제로 우리를 괴롭힐 수 없다. 현실은 공포영화보다 더 두렵고 끔찍하다. 지금 N세대들은 공포체험을 통해 ‘무서운’ 현실에 대한 면역력을 기르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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