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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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송덕비로 전락한 공공미술

대형 건물들 법 규정 따라 구색 맞추기 급급…특정작가 싹쓸이·리베이트 등 끝없는 잡음

  • 입력2005-08-22 11:5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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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대판 송덕비로 전락한 공공미술
    경제활동을 규제한다는 재계의 반발로 적용비율을 1%에서 0.5~0.7%로 재조정한 ‘문예진흥법 건축미술장식조항’(1%법)을 둘러싸고 경제계와 미술계 혹은 미술계 내부의 논쟁이 활발하다.

    1%법은 일정 규모 이상으로 건축물이 신-증축될 경우 도시미화와 예술진흥을 위해 건축비의 1%에 해당하는 예술조형물 설치를 규정한 법으로, 일상 속에서 쉽게 만나고 즐기는 ‘거리의 미술관’을 가능하게 하는 근거가 된다.

    우리나라는 지난 84년 외국 사례를 응용해 1%법을 도입한 뒤 연간 수백점의 미술작품을 거리로 방목했다. 덕분에 지금은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외국 도시처럼 거리를 걸으면서 눈에 치일 정도로 많은 조각품, 회화를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일상에서 누릴 수 있는 안복(眼福)에 대한 희망과 기대는 1%법이 비리의 온상으로 변질되면서 깨진 지 오래다. 이 법안과 관련된 주요 기사들은 온통 ‘비리’로 얼룩져 있다. 건축가와 미술가 사이의 담합(이중계약에 의한 비자금 조성 및 탈세), 리베이트에 의한 이면계약, 공무원과 심의위원 매수, 공사비 지급에 관련한 현장 뇌물 공여….

    실제 지난 5월 수원지검이 적발한 미술장식품 리베이트 사건은 우리 공공미술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유명조각가와 화상, 건축주, 미술품 심의위원, 공무원 등이 오로지 금전적 대가를 약속받고 미술품을 무더기로 ‘거래’하려다 적발됐는데, 리베이트 규모가 무려 15억원에 달했다.



    결국 도시미화와 예술진흥이란 취지로 마련된 1%법안은, 해당공간의 성격과도 무관하고 지역 주민들의 생활감각과 괴리된 기형조형물을 양산해내며 문화적 공공성을 해치고 결과적으로 사회적 낭비와 공해를 초래하는 경우가 99%이고 본래의 취지대로 실행되는 것은 겨우 1%밖에 안 된다는 의미로 전락하고 말았다.

    우리가 모방한 1%법은 원래 프랑스 영국 미국 등 선진국에서 건축`-`도시개발과 같은 개발사업이 생태적 환경과 생활기반을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에서, 이들 개발사업을 펼칠 경우 공공미술로 보완하라는 뜻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외국의 법을 도입했지만 막상 구체적인 시행과정에서는 큰 차이가 있었다. 외국 정부나 지방자치제는 법이 정착되기까지 작가와 작품 선정에 직접 개입하는 등 솔선수범을 보였지만, 우리는 법만 만들었을 뿐 나머지는 민간차원에서 법의 시행만 강요했다. 대신 반대급부로 건축주 마음대로 작가를 선정하는 권한을 부여했다. 처음부터 공공미술의 질적인 문제에는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아울러 외국의 1%법이 공간을 중심으로 적용되는 것과 달리 우리는 개별 건축물을 대상으로 하다보니 실행과정에서 애초의 취지와는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결국 1%법은 →정부도 하지 않는 도덕적 의무를 이윤을 좇는 기업이 억지로 하다 보니 →이왕 설치할 바에는 리베이트의 룰을 잘 아는 작가나 중개상을 고르게 되며 →차, 포 다 떼인 작가 역시 작품성보다는 이윤에 맞춰 작품을 제작하며 →이런 사정을 뻔히 아는 동료미술인으로 구성된 심의위원들은 공공미술에 대한 견제와 감시의 역할을 포기하고 단지 도심 곳곳에 미술장식품만 설치하는 데 만족하는 것으로 변질됐다.

    지난 16년 동안 미술장식품제도가 남긴 가장 심각한 폐해는 정신적-경제적으로 미술계를 양극화했다는 것이다. 앞의 리베이트 사건에서 보듯이 극소수 작가들이 리베이트와 뇌물수수 관행에 능숙한 인맥을 중심으로 연간 300억원에 달하는 미술장식품 시장을 독점했다. 이들은 자신의 독점행위를 정당화하기 위해 미학적 포장을 남발, 미술현장을 어지럽게 했을 뿐 아니라 다른 작가들이 선정과정에 응모할 기회조차 차단해버렸다.

    그럼에도 미술장식품 설치사례 조사는 성남시에서 단 한 차례 이루어졌을 뿐이다. 98년 분당 신도시를 대상으로 벌인 환경조형물 실태조사를 보면 144점의 작품(회화-조각) 가운데 17점은 성남시 미술장식품 심의위원을 지낸 A씨의 작품이었고, 전체 작품의 60% 이상이 중복 설치된 것으로 보고됐다. 이처럼 ‘힘있는’ 작가의 비슷한 작품을 도심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은 결국 건축주-미술가-관의 유착의혹을 불러일으키고, 전국구(전국적으로 힘있는 작가), 지역구(특정지역 조형물을 싹쓸이하는 작가)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설령 부정의혹이 없다 해도 동일 작가의 비슷한 작품이 도시 여기저기에 설치되면서 오히려 시각환경을 획일화하고, 다른 작가의 창작기회를 차단하는 악영향을 가져왔다. 오죽하면 미술인의 권익단체인 한국미술협회가 ‘동일작가 2km 이내 중복설치 금지’, ‘연간 수주 5점 이내’라는 개혁안까지 냈을까.

    한편 미술장식이 ‘예술가’와 ‘예술작품’이라는 신비화된 베일 아래 마치 건축주와 미술가의 사유재산권 차원의 문제인 것처럼 인식되는 것도 하루빨리 시정돼야 할 시각이다.

    서울 강남의 포스코센터 앞에는 높이 9m에 작품 가격이 180만 달러(약21억원)에 이르는 프랭크 스텔라의 거대한 조형물(작품명 ‘아마벨’)이 있다. 세계적인 거장의 작품, 한국에서 가장 비싼 작품이라는 엄청난 미술적 방호벽을 쳤음에도 이 작품은 철거-보존논쟁이라는 뜻밖의 도전을 받았다.

    비슷한 논란은 지난 90년 미국 뉴욕에서도 있었다. 미국이 낳은 세계적 거장 리처드 세라의 ‘비스듬한 호’가 역시 엄청난 예산과 규모로 미국연방에 설치되자 철거냐 보존이냐를 놓고 시민사회와 미술계가 대립했다. 그러나 논쟁의 진행방식에서 서울과 뉴욕은 큰 차이를 보였다.

    당시 뉴욕 시민사회는 세라의 작품에 대해 일상을 압도하는 큰 규모와 난해한 미학을 이유로 “공용공간에 대한 예술적 폭력을 철회하라”고 주장했다. 그러자 예술계와 작가는 “예술의 평가는 예술계 내에서…” “철거하면 이민하겠다”며 맞섰다. 결국 “공공미술이란 도시인을 ‘공공적으로’ 배려해야 한다”는 근거가 시민의 손을 들어주었고 작품은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반면 한국에서 벌어진 철거논쟁은 매우 ‘사적으로’ 진행됐다. 평소 스텔라의 작품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포철의 새 경영진이 작품의 철거의사를 밝히자, 일부 미술애호가들은 세계적 작품에 대한 몰이해와 반(反)문화를 내세워 이전은 불가능하다고 포철을 공격했다.

    하지만 서울의 논쟁은 더 이상 발전되지 않고 여기서 끝나버렸다. 스텔라의 작품이 과연 서울이라는 삶의 공간에 필요한 것인지 사용자(도시인)의 판단과 논의에 대한 참여도 없었으며, 이러한 공공미술이 (경제적으로, 문화적으로, 심리적으로) 포철 것인지 아니면 서울시민의 것인지에 대한 논의로까지 확대되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 크다.

    이제 공공미술은 갈림길에 서 있다. 일반 대중이 쉽게 접근하고(public access) 쉽게 사용하고 감상하며(public access) 종국에는 도시 삶의 문맥 속에서 공용자산이 되는(public ownership) ‘공공적 삶의 아이콘’이 될 것인가, 아니면 새로운 위계와 격리를 만드는 현대판 송덕비로 남을 것인가. 공공미술의 사용자인 시민의 참여와 관심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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