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동아 235

2000.05.25

신의 솜씨 빌린 고딕양식 결정체

성 슈테판 성당 건물 전체가 예술품…화려한 외관·섬세한 장식 보는 이마다 “탄성 절로”

  • 입력2005-12-02 13: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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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의 솜씨 빌린 고딕양식 결정체
    20세기의 끝자락이었던 1999년은 ‘왈츠의 왕’ 요한 슈트라우스 2세가 세상을 떠난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였다. 당연했지만 작년의 빈에는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 일년 내내 연주되었다. 그렇지만 빈에서 울려 퍼지는 선율이 어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뿐이랴.

    프랑스가 미술적 색채를 지닌 나라라면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음악적 국가임을 자처한다. 대부분의 국민은 음악 애호가들로서 음악을 사랑하는 국민성을 지니고 있다. 세계적인 음악가들이 그들의 전성기에 이곳에서 활동했으며 베토벤, 슈베르트, 브람스, 요한 슈트라우스, 쇤베르크 등 음악의 거장들이 빈의 중앙 묘역에 잠들고 있는 것만 보아도 이 사실을 알 수 있다.

    빈 여행의 진정한 묘미는 과거의 시간과 공존하며 조화를 이루고 있는 활기찬 현대적 감각에서 찾아볼 수 있다. 도시 전체가 박물관이라 할 만큼 빈의 건축물들에서는 이 도시 특유의 문화적 독창성이 느껴진다. 도나우강을 끼고 말굽형으로 조성된 구시가지 랑슈트라세에는 합스부르크 왕가의 옛 영화를 떠올리게 만드는 수많은 문화 유적들이 즐비하다. 대부분 이 도시에서 문화적인 독창성이 가장 돋보였던 시기인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의 건축물들이다. 빈은 30개의 궁전과 30개의 성당, 15개의 박물관이 있는 도시다.

    빈을 이야기하면서 성 슈테판 성당을 빼놓을 수 없다. 빈의 중심이면서 상징인 성 슈테판 성당. 슈베르트가 결혼식을 올렸고 또 장례식을 치른 바로 그 성당이다. 어디 슈베르트뿐이랴.

    1782년 모차르트는 바로 이 성당에서 콘스탄체와 결혼식을 올렸다. 당시 모차르트의 나이 26세. 고향 잘츠부르크를 떠나 빈에서 음악 활동을 시작한지 1년이 다 되어 가고 있던 때였다. 그로부터 9년 후 이 성당에서는 모차르트의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모차르트는 1791년 12월5일 라우엔슈타인 거리의 자택에서 죽었다. 향년 36세, 일설에는 독살되었다는 이야기도 전해온다.



    모차르트의 유해는 슈테판 성당의 안쪽 십자가 예배당에 안치되었다. 그러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아내 콘스탄체의 모습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그녀는 너무나 슬픈 나머지 정신착란 상태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장례식이 끝날 무렵, 갑자기 비바람이 몰아쳤다. 결국 참석자들은 장지까지 영구 마차를 따라가지 못했다. 성 마르크스 묘지까지 모차르트의 관을 따라간 사람은 무덤 파는 인부들뿐이었다. 그때 모차르트의 유해는 다른 낯선 네 사람의 유해와 함께 공동묘지에 매장되었다. 지금까지도 정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현재 모차르트 기념비는 빈 중앙 묘지와 성 마르크스 묘지 두 군데에 있다. 그중 어느 것이 진짜 모차르트의 흔적인지 알 수 없다.

    신의 솜씨 빌린 고딕양식 결정체
    슈테판 성당은 13세기 후반부터 300여 년 동안 지어진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건축물이다. 최초의 양식은 로마네스크였으나 1683년에는 터키군, 1945년에는 소련군의 포격을 받아 붕괴되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현재와 같은 고딕 교회로 다시 태어났다. 공해로 인해 외부는 새까맣게 그을린 듯 변색된 짙은 회색이지만 화려하게 장식된 섬세한 조각들과 장식품들은 매우 아름답다. 이탈리아 피렌체의 두오모 성당과 비교해도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다.

    1359년부터 5년간의 대역사 끝에 세워진 남탑의 높이는 137m. 북탑은 무려 400여년이나 걸려 완공됐다. 교회 내부의 파이프 오르간은 1만개의 주석관으로 이루어져 있어 이 성당의 자랑거리다. 또한 합스부르크 왕가의 상징인 쌍두 독수리가 새겨져 있는 지붕의 모자이크는 화려함과 섬세함에 있어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성당 내부에는 16세기의 조각가 안톤 필그람이 조각한 석조 설교단이 있으며 15세기말에 만들어진 프리드리히 3세의 대리석 석관이 있다. 지하 묘지에는 역대 황제들의 내장을 보관한 항아리가 있어 기괴한 감정을 자아내게 만든다. 또한 중세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페스트의 희생자 2000여명의 유골도 역시 보관돼 있다.

    현대 생활에 쫓기고 속된 일에 물든 사람에게 빈은 그야말로 마음의 평화를 주는 곳이다. 음악이든 건축이든 모든 전통적인 것들이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극히 자연스럽게 현대 속에 녹아 있기 때문이다. 광장을 걷고 성당을 순례하고 숙소로 돌아오는 동안에도 여행자들은 갖가지 전통에 접하게 된다.

    빈에서 가장 오래된 레스토랑인 그리켄바이젤은 그 역사가 무려 500년이다. 전 세계 예술가와 과학자, 정치가 등이 만남의 장소로 애용했던 곳이다. 그러나 이곳뿐만이 아니라 거리 곳곳의 레스토랑과 카페에는 마크 트웨인, 루스벨트, 콜 등의 유명 인사가 ‘왔다 갔다’는 낙서판이 걸려 있는 것을 손쉽게 발견할 수 있다.

    이처럼 빈 거리에서는 하찮게 보이는 가구, 선술집의 간판, 레스토랑의 의자 등 그 모든 것에 바로크의 전통이 숨쉬고 있음을 보게 된다. 물론 로마네스크나 고딕의 걸작도 없진 않지만 오스트리아 건축에서 가장 독창적인 것은 역시 바로크양식이다. 카를 5세가 이탈리아에서 도입한 이 양식은 반 종교개혁의 무드를 타고 환영받았다. 1683년 두번째 터키군의 침략을 격퇴한 뒤, 이 나라는 그것을 축복하기 위해 폭발적으로 많은 기념비적 건축물들을 만들거나 장식했다. 온갖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배출된 것도 이 시기였다.

    빈은 700여년 동안 유럽의 중심이었다. 유럽 외교사는 바로 빈의 밤에 이뤄졌다. 그래서 나온 당시 외교관들의 말이 “회의는 춤춘다”. 도시 곳곳에서 턱시도를 입은 외교관들과 가슴이 깊게 팬 드레스에 화려하게 치장한 여인들의 ‘춤추는 외교’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이런 빈의 밤에는 프랑스산 햇포도주 ‘보졸레 누보’처럼 오스트리아산 햇포도주인 ‘호이리게’가 빠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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